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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 언약 (갈 04: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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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강남에는 수표족이란 게 등장했다고 합니다. 오렌지족, 야타족에 이은 또 다른 종족이 생겨났는데, 이 수표족이란 게 뭔가 하면요, 나이트 클럽 같은 유흥업소에서 처음 만난 여자에게 고액권의 수표 뒷면에 주소와 이름을 적어 주면서 다음 만나자는 약속을 하는 젊은 애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대기업마저 도산하는 최근의 경제불황 속에서 마치 별천지 인간처럼 돈을 펑펑 써 대는 이런 아이들은 도대체 어떤 애들이겠습니까? 제가 믿기로 이런 아이들은 돈은 많지만 의식은 없는 졸부들의 아이들이라고 생각됩니다.

부모가 의식이 없으니 아이들이 의식있는 행동을 할 수가 있겠어요? 다시 말해서 정상적인 사고와 행위 능력이 없는 이 철없는 아이들을 제멋대로 행동하도록 놔 둔 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애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래, 너는 이 집안의 아들이니까 이 모든 재산이 네 것이야, 네 맘껏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다. 이렇게 한다면 결국 자식 버리고 재산도 모두 날리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겠어요? 이런 아이들은 차라리 공장에 가서 일을 시켜서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게 땀을 흘리며 돈을 벌고 있는가, 가난하고 돈 없는 사람들의 비애가 어떤 것인가를 보고 느끼게 한다면 정말 의식있는 상속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이 아이들이 부모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아들이지만, 아직 철이 들지 않고 재산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그 권리가 유보되면서, 그에 맞는 훈련을 받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다고 그가 영원히 훈련만 받다가 유산을 상속받지도 못하고 죽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공장에서 일을 할 망정 그의 신분은 공장의 노동자가 아니라 그 공장을 상속받아 운영해 나갈 미래의 사장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의 신분을 이런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그 율법대로 살려고 애쓰다가 결국 죽게 하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은혜의 복음을 주셔서 그 복음으로 참된 자유를 누리고 사는 길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공장에서의 고된 훈련기간처럼 율법의 지배 아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오렌지족이나 수표족이 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그 어렵고 고된 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율법 아래 있을 때는 마치 종과 같은 신분이었습니다. 공장 노동자에게 사장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율법 아래 있던 우리에게 하나님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율법을 조금이라도 지키지 못하면 무서운 형벌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로 무슨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구요? 네, 바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입니다. 종의 상태에서 아들의 상태로 옮겨 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여기서 아바라는 말은 아빠라는 뜻입니다. (아빠라는 말은 세계 공통어인 모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유교전통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살아 온 우리는 아버지를 이렇게 친근하게 아빠라고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그만큼 친밀하고 편안하게 되었다는 것 아니겠어요?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니고 아들입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모든 것을 상속받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상속자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아들이라는 것이 중요하지 다른 부수적인 이유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아들이 상속자로서 모든 재산을 상속받는 것을 포기하고, 공장에 가서 일해 받은 월급으로 그 모든 재산의 대가를 치르고 사들이겠다고 한다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그것이 가능하기나 하겠습니까?

사도는 이 갈라디아 교인들이 아들의 지위와 권리를 포기하고 종의 신분과 상태로 돌아가고 있다고 책망합니다. 이제 넌 아들이다. 공장에 나가 고생할 필요도 없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러도 좋다. 모든 구원을 약속대로 유산으로 물려 주겠다. 이런 엄청난 축복과 권리를 받아 누리던 갈라디아 사람들이 이제 안식일을 지킨다, 절기를 지킨다, 거룩한 날과 그렇지 않은 날을 구별한다, 깨끗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구별한다 하면서 과거의 초등학문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몽학선생에 불과합니다. 비록 그 선생님이 엄하고 지식을 전수해 주긴 하지만 그 몽학선생은 노예입니다. 아들이 성장해서 상속자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되기까지 이 몽학선생의 지도와 권위 아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아들이 성장해서 어른이 되면 더 이상 몽학선생의 권위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노예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위를 갖게 됩니다. 그런데 다시 몽학선생의 지도와 권위 아래로 돌아가려는 사람이 있다면 어리석은 사람들 중에서도 어리석은 사람일텐데, 바로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랬다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열심히 복음을 전해서 가르쳤던 자신의 모든 수고가 물거품이 되어버린 현장을 바라보는 사도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그래서 사도는 안타까운 심장으로 이렇게 외칩니다.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가 눈이라도 나에게 빼어 주었을 것이다. 그만큼 바울의 가르침을 소중하게 받아들이고 사도를 귀하게 받들던 이들이 이제 그 바울 사도의 모든 가르침에서 떠나 잘못된 가르침을 따르고 있으니 사도의 가슴이 얼마나 쓰라렸겠어요?

사도는 아브라함의 두 아들의 비유로 다시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낳지 못하게 되자 답답하고 초조해진 아브라함은 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계집종에게서 난 자식입니다. 이스마엘은 종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결국 종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에 사라에게서 난 이삭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대로 난 아들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의 신분과 이삭의 신분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면요, 이 육체를 따라 난 계집종의 아들이 약속을 따라 난 진짜 아들을 핍박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계집종과 그 아들을 쫓아내야 하게 되었습니다. 계집종의 아들은 자유하는 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받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종이 상속자를 핍박했으니 온전할 리가 있겠습니까?

사도는 이 두 아들을 두 언약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복음으로 인한 자유를 알기 전에는 마치 종과 같은 신분이었습니다. 종이 당분간은 아들의 행세도 하고 진짜 아들을 핍박하기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의 결말은 무엇입니까? 쫓겨나는 것입니다. 종이 절대로 주인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율법이라는 언약을 통해서는 결코 구원을 상속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유자의 아들, 약속을 따라 난 아들은 어떻습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아들은 아들입니다. 아들은 당연히 아버지의 유업을 물려받게 됩니다. 이 아들이 종에게 핍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종이나 노예의 감독을 받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아들이 종보다 낮아지거나 아들의 신분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아들의 결국은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죠.

종과 아들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종은 주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애를 써야 합니다. 만약 주인의 눈에 나게 되면 그 집에서 쫓겨나는 일만 남게 되지요. 또 아무리 잘 보여서 총애를 받는다 할지라도 그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일을 잘한다고 종이 아들 되는 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어떻습니까? 아들은 말을 잘 들어도 아들이요, 맨날 속을 썩여도 아들입니다. 말 안듣고 말썽만 피운다고 너 이제부터 내 아들 아니야 라고 할 수 있습니까? 저도 아이들을 키우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다른 집 아이들은 말 잘 듣고 하는 짓이 예쁘면 사랑스럽지요. 하지만 말 안듣고 말썽만 피우는 아이들은 사랑스러운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아이들은 말을 잘 들어도 사랑스럽고 말썽을 피워도 사랑스럽습니다. 왜냐하면 내 아이들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요 축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잘하거나 잘못하거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착한 일을 많이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더 사랑하시고, 여러분이 잘못을 저지르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만들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덜 사랑한다고 생각한다면, 큰 문제입니다. 그런 생각은 아들의 영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입니까? 아니면 종의 영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입니까?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 8:15).

이 세상의 어떤 것도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덜 사랑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그 어떤 행위나 시도도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조금이라도 더 사랑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방적으로 사랑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뭘 잘 해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9절 보세요.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된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도 하나님이 우리를 알아 주셨다는 것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그 사랑과 은혜에 기대는 것입니다. 그것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내 힘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는 것은, 다시 말해서 조금이라도 나의 힘으로 의를 이루려고 한다면, 그것은 다시 종의 영을 받은 상태, 이스마엘의 신분, 결국 유업을 받지 못하고 쫓게나게 될 상태로 돌아가려는 시도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종이 아니라 아들이며,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하고 조금만 잘못하면 천벌이라도 받을 줄 안다거나, 내가 좀 잘했다고 우쭐대면서 의를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그런 종의 영을 버리고, 아들의 영으로 자유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누리며 살아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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