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세월 아끼는 법 좀 알려주세요 (엡 05:15-21)

첨부 1


1. 세월을 아낀다?

우리가 이 본문을 읽다 보면 얼른 눈에 띠는 구절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이지요. 세월을 아낀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돈을 아낄 수 있습니다. 돈을 있는 대로 다 쓰지 않고 아껴서 은행에 예금해 놓으면 나중에 돈이 없을 때 찾아서 쓸 수 있습니다. 세월도 그런 식으로 아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할 일도 없고 시간이 정말 가지 않게 느껴질 때 은행에 저축해 놓았다가 늙은 다음에 저축해 놓은 청춘을 찾아서 사용한다거나 바쁠 때 찾아서 쓸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요. 그러나 애석하게도 세월은 그런 식으로 아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늘 느끼는 것은 세월이 참 빠르다는 것입니다. 내가 한 10년만 젊었어도 뭔가 해볼텐데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제가 작년에 바이블칼리지에서 공부할 때, 저보다 10년 정도 젊은 전도사님들이 많이 있었는데, 사실 그분들도 공부하는 데 적은 나이는 아니지요. 한국에서 대학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온 사람들도 있고, 대학원을 졸업한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그래도 저는 그 사람들이 부러워서 '내가 10년만 젊었다면 이렇게 힘들지 않게 공부를 할 수 있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마침 저보다 꼭 10년 나이가 많으신 집사님이 '아이구, 나는 지금 목사님 나이만 됐어도 더 바랄 것이 없겠네요.' 하시는 거예요. 그 말을 들으니까 혼란이 생기더군요. 젊은 전도사님들을 보면서 내가 나이 많다고 생각을 해야 하나? 아니면 나이드신 집사님을 보면서 아직 내가 창창하다고 생각을 해야 하나? 어쨌든 자기 나이를 생각하면 늘 지난 세월이 아깝고 한 것도 없이 세월만 보냈다고 느껴지는 것이 인지상정인지라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이 별다르게 느껴지지요?

그럼 여기서 사도가 말하고 있는 세월을 아끼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살펴봅시다. 우선 15절과 16절은 한 문장이지요? 그리고 이 문장을 분사구문입니다. 16절이 주절이고, 15절이 분사구로서 16절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에 보면 이것이 반대로 되어 있어요. 세월을 아끼라는 동사가 분사이고, 15절의 동사가 주동사입니다. 서구 언어에서는 분사구가 주절의 앞에 나올 수도 있고 뒤에 붙을 수도 있습니다. 주로 뒤에 나오지요. 그런데 우리 한국말에서는 항상 앞에 나옵니다. 그래서 이 문장을 원래의 의미로 해석하면 한국말에서는 15절과 16절이 바뀌어버립니다. 즉 '세월을 아껴서'가 먼저 나와 15절이 되고, '지혜 있는 자같이 하라'가 뒤에 나와 16절이 되어버리겠지요. 그래서 절을 바꾸지 않고 말이 되도록 하다 보니까 엉뚱한 번역이 된 것입니다. 영어도 헬라어와 어순이 비슷하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영어성경이 큰 도움이 되겠지요?

우리말 번역에 의하면 세월을 아끼는 것이 최후의 목적입니다. 즉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지혜 있는 자같이 함으로써 세월을 아끼라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원문대로 문장을 바꾸면 세월을 아낌으로써 지혜 있는 자같이 하라는 뜻이 됩니다. 세월을 아끼기 위해서 지혜 있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지혜 있는 자가 되기 위해서 세월을 아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장에서 중요한 얘기는 세월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지혜 있는 자같이 행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바울은 지금 에베소 교인들에게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 바보처럼 살지 말고 현명하게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지혜란 무엇입니까? 철학의 꽃을 피웠던 그리스인들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니지요. 지혜 있는 자가 되는 것은 17절에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없이, 또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사는 것을 어리석은 자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어 변화된 사람으로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과거에 하나님을 모르고 살던 때와 같이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과거의 삶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사도는 지금까지 계속 말해 왔었지요?

이처럼 자기가 멸망하는 줄도 모르고 하나님 없이 사는 어리석은 삶을 떠나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데 있어서 필요한 한 가지가 세월을 아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월은 흘러가는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 정해진 시간의 개념입니다. 헬라어에서 시간이라는 말이 두 가지인데, '카이로스'와 '크로노스'입니다. 크로노스는 흘러가는 시간이고, 카이로스는 특별하게 지정된 시간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할 때의 때는 카이로스입니다. 시간이 쌓이고 흘러서 어느 때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미리 정해 놓으신 특정한 때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세월을 아끼라고 할 때 사용된 단어가 바로 카이로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인간들에게 숨쉬며 살 수 있는 때를 정해 두셨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늘리거나 줄일 수 없고 그것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 정해진 때를 살아가는 우리들로서는 그 때를 통해서 할 수 있는 한 많은 날 동안 하나님을 섬기며 변화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사는 것이 가장 복되고 의미있는 일입니다. 한번 잃어버린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한번 허비해 버린 시간은 어디 가서 찾아올 수 없습니다. 남의 것을 뺏어올 수도 없고, 돈주고 사올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아끼는 수밖에 없지요. 세월을 아낀다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어리석은 삶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그 삶의 기간을 허비하지 말고 지혜롭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며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현대의 영어성경들은 '세월을 아껴'라는 말을 '주어진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라고 번역했습니다.

젊은 시절에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회개하고 돌아온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결국 회개하고 돌아왔으니까 젊어서부터 성실하게 하나님을 섬긴 사람과 똑같습니까? 물론 구원받았다는 점에서는 똑같지만, 자신의 카이로스 중 일부를 허비했다는 점에서 책망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의 인생 가운데, 즉 하나님이 정해 주신 나의 카이로스 중에서 얼마만큼을 지혜 있는 자같이 살았고, 얼마만큼을 어리석은 자처럼 허비했는가 점검해 보는 것이 우리 성도의 삶에 필요합니다. 또한 오늘 하루의 카이로스 중에서 내가 부지중에나 혹은 연약함으로 인해 허비한 분량은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겠지요? 지금 이 순간 나는 나의 카이로스를 아끼고 있는가 허비하고 있는가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올바른 태도입니다.

왜 이처럼 세월을 아껴야 합니까? 사도는 때가 악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때는 카이로스나 크로노스가 아니라 날(days)입니다. 세대라고 해석할 수 있겠지요? 이 세대가 악하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세월을 아끼지 않으면 그 악한 세대에 물들어 우리의 귀중한 카이로스를 허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없이 사는 당시 헬레니즘 문화 속에서,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성도의 순결을 지키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오늘 우리가 사는 세대는 어떻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충성하고 진실되게 믿음을 지키며 살도록 돕는 세대입니까? 아니면 우리를 하나님 없는 어리석은 생활로 끌어들이려는 세대입니까? 어차피 공중의 권세잡은 자가 세력을 떨치는 것이 허락되어 있는 한, 고대의 헬라 사회이든지, 뉴 밀레니엄 시대의 이곳 뉴질랜드이든지, 우리가 사는 세대는 악한 세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악한 세대를 살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세월을 아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2. 술에 취할까? 성령에 취할까?

그렇게 사는 것, 세월을 아끼며 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사도는 술에 취하는 것과 성령에 취하는 것을 비유로 들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는 이 말씀은 문맥상 술 자체를 금한다는 뜻이 전혀 아니지요? 많은 분들이 술을 금지하는 근거로 이 구절을 사용하는데, 앞뒤 문맥은 살펴보지도 않고 '술 취하지 말라'는 부분만 잘라서 말한다는 것은 성경을 올바로 접근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술을 마셔도 된다는 근거로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고 했지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지금 사도 바울이 술을 마셔도 되는지 안 되는지에 대한 해답을 주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까? 전혀 아니지요? 물론 여기서 술 취하는 것을 방탕한 것이라고 함으로써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다음에 나오는 다른 이미지와 대비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어쨌든 술에 대한 이 논쟁에 이 구절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이 악한 세대를 살면서 세월을 아껴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이 무엇이냐? 그것은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는 역부족입니다. 그러면 방법이 없다는 말입니까?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에 붙들려 그 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술에 취한 사람이 평소에 제정신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제가 아는 한 아가씨는 좋아하는 남자에게 도저히 사랑한다고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술을 마시고 술기운으로 사랑을 고백했다고 하더군요. 여러분 엿 좋아하시지요? 그런데 그 엿을 어디서 만드는지 아세요? 물론 엿공장에서 만듭니다. 제가 옛날에 엿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는데, 거기 술 힘으로 일하는 기술자 한 사람이 있었어요. 술을 마셔야 힘이 생겨서 일을 해요. 술을 마시지 않으면 팔에 힘이 없어서 밀가루 한 포도 메지 못하더군요. 참 신기하지요?

사도가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악한 세대에게 지지 않고 우리의 카이로스를 허비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방법은 바로 성령에 취해서 그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성령충만이라고 합니다. 그럼 성령충만이 무엇이냐? 성령세례는 또 무엇이고, 그것들이 같은 것이냐, 다른 것이냐? 뜨거운 논쟁의 주제이기도 합니다만,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성령에 사로잡혀 그분의 다스리심과 인도하심에 따라 살게 될 때 참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술에 취한 사람의 입에서 욕설과 더러운 것이 나온다면, 성령충만을 받은 사람의 입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이 끊이지 않고 나올 것입니다. 여기서 또 시(시편)는 무엇이고 찬미(찬송가)와 신령한 노래(복음성가? CCM?)는 어떻게 다르고 예배에 사용할 수 있나 없나를 따지는 복잡한 문제가 나올 수 있지만,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된 후 변화된 우리의 모습입니다. 성령충만한 삶으로 늘 하나님을 찬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