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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부의 비밀 (엡 05: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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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사람들로 구성이 됩니다. 교회도 하나의 커뮤니티라는 것입니다. 이 교회 안에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 성격이 낙천적인 사람도 있고 칼 같은 사람도 있고, 에베소 교회의 경우 헬라인도 있고 유대인도 있고, 자유인도 있고 노예도 있고, 하여튼 각기 다른 사람들이 이 교회를 구성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교회를 말하는 데 있어서 그 구성원 사이의 인간관계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교회의 본질, 즉 교회란 무엇인지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셨고, 그래서 구원받은 인간들이 어떻게 교회를 이루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부분에 와서 바울은 그 교회 안에 있는 구성원들의 상호관계의 이상적인 모습들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지요. 한문으로 인간(人間)이라고 할 때 그것은 두 사람 이상의 관계를 내포합니다. 혼자서는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활동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의미가 발생하고 가치를 부여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 역시 사람들로 구성된 하나의 커뮤니티라는 것은 교회가 사람들 사이의 인간관계 위에 건설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관계가 기름과 물처럼 서로 배척하고 따로 노는 것이라면 교회가 든든하게 설 수 있겠어요? 서로 의심하고 미워하고 경계하는 관계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그래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교회 안에서 매우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는 이 에베소서에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에베소서의 중요한 내용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어떻게 우리의 삶이 변화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인데, 그 변화는 인간관계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세 가지의 인간관계를 제시합니다. 부부간의 관계,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 그리고 종과 상전의 관계입니다. 인간관계가 이 세 가지만 있는 것은 물론 아니지요. 친구나 이웃관계도 있고, 물건을 사고 파는 사람의 관계도 있습니다. 여기 언급되어 있는 것은 가장 중요하고 근원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고, 이것을 확대해석해서 다른 관계에 관한 지침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모든 인간관계가 존재하고 있으며, 이 중 어느 하나라도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는 데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인간관계에 대해 말하면서 부부간의 관계를 맨 처음 말하고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인간관계의 시작이 되기도 하고 또 모든 관계의 근본이 되는 것은 부부입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단위를 가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정을 이루는 최초의 구성분자는 바로 남편과 아내인 것이지요. 이 부부의 관계는 참 신비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보고 큰 비밀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형제가 가까운 사이가 되는 것은 같은 피를 나누어 태어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있어서 자녀는 자신의 살붙이이기 때문에 아무리 멀어질래야 멀어질 수가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부부관계는 그런 것이 아니지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전혀 다른 남남이 만나서 가장 가까운 관계를 형성한 것이 바로 부부입니다.

여권이 신장되고 여성의 경제능력이 증가되면서 현대사회는 이혼이라는 메카니즘에 매우 익숙해지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나온 작년 1년 동안의 통계를 보니까 결혼한 부부가 33만 4천 쌍이었습니다. 하루에 915쌍이 결혼을 한 셈입니다. 반면에 이혼을 한 부부는 12만 쌍이었어요. 하루에 329쌍이 이혼을 했습니다. 결혼해서 이혼하지 않고 잘 사는 부부가 세 쌍 중에 두 쌍이 채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부부는 신혼여행 갔다오자마자 이혼하기도 하고, 결혼식 끝난 후 피로연에서 한바탕 하고 당장 이혼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어떤 부부는 폐백하다가 이혼했다고도 해요. 요즘에는 70이 넘은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이혼을 하는 수가 종종 있어요. 어쨌든 그렇게 이혼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시 결혼하기 이전의 남남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지요. 아무리 부부의 정을 나누었다고 해도 그렇게 이혼을 해 버리면 영원한 타인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 형제가 무슨 소송을 하거나 합의에 의해서 형제의 관계를 중단하기로 했다는 얘기 들어보셨습니까? 부자간의 정을 끊는다는 말이 있지만, 실제로 부자의 관계를 무효로 만드는 방법이 있나요? 부자는 영원한 부자요, 형제도 영원한 형제입니다. 그러나 부부관계는 얼마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둘 사이에 아무리 자녀를 낳았어도 이혼하면 더 이상 부부가 아니요, 전혀 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부부관계는 다른 가족관계에 비해서 훨씬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 불안정한 부부관계는 영원불변한 형제나 부자의 관계보다 더 가까운 관계가 됩니다. 이것도 참 신기한 노릇이지요? 부자는 1촌입니다. 형제는 2촌간이지요?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는 2촌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부부관계는 촌수가 없습니다. 0촌인 거예요. 1촌보다 가까운 0촌이고, 0촌이라는 것은 동일인, 즉 자기 자신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부부는 한 몸이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부부관계는 모든 인간관계의 시작입니다. 부부관계로 시작해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파생되고, 거기서 다시 형제의 관계가 생겨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이 땅에 두실 때 하나님의 손으로 만드신 관계가 바로 이 부부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만드시고 그에게 아들을 주시거나 동생을 주신 것이 아니라 아내를 주셨단 말이지요. 부자나 형제의 관계는 거기서부터 자동으로 생겨난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도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잠 19:14)고 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교회 안의 인간관계, 혹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의 변화된 인간관계를 말하면서 이 부부관계를 맨 먼저 언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바울은 부부간의 관계가 어떠해야 할 것이라고 한참 얘기를 한 다음에 32절에서 갑자기 '내가 부부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부관계에 대해서 한참 얘기하다 보니까 부부관계 얘기를 하는 것인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얘기를 하는 것인지 혼동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 부부관계의 모델이야말로 교회의 모델이고,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부부관계의 비밀은 그 연합에 있습니다. 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들입니다. 형제도 처음부터 형제지요. 그러나 부부는 처음부터 부부가 아닙니다. 전혀 남남이 만나 연합해서 부부가 되는 것인데, 그 연합이 어떤 연합인가 하면 첫째로 부모를 떠나게 하는 연합입니다. 부자관의 관계는 1촌이라고 했지요? 즉 생물학적으로나 심리학적으로나 가장 가까운 관계입니다. 그런데 그 가까운 관계를 떠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보다 더 가까운 다른 관계가 나타난 것입니다.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연합한다는 것, 이것은 부부가 부모와 자녀의 관계보다 더 가까운 관계로 연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연합해서 어떤 결과를 만드는가 하면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0촌, 즉 자신과 동일인이 되는 것이지요. 이 세상의 어떤 관계도 두 사람을 한 몸으로 만드는 관계는 없습니다. 아무리 자기 뱃속에서 나온 아이라고 해서 엄마와 아이를 한 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생김새가 똑같은 쌍둥이 형제라도 한 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부부는 출신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고 또 전혀 모르던 사람들인데도 한 몸으로 연합을 하는 것 아닙니까? 이와 같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을 한 몸으로 연합시켜 주는 이 관계야말로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즉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머리와 몸을 두 개의 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와 교회는 완전한 하나의 몸으로 연합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가깝고 친밀한 사이였느냐? 물론 아니지요.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 원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도저히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사이였습니다. 신분도 다르고 같은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관계였지요.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인하여 버림받고 멸망당하게 되어 있던 에베소 사람들이, 또 오늘의 우리들이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즉 교회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리스도께서는 이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목숨의 대가로 교회가 생겨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했을 때만 교회로서 구원받은 백성의 모체가 됩니다. 에베소 사람들 같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큰 비밀입니까?

부부관계는 형제나 부자관계에 비해 매우 불안정한 것이라고 했지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같은 배에서 나온 형제도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 다투는데, 전혀 다른 환경과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서로 만났으니 얼마나 많이 다투어야겠어요? 그래서 0촌이라는 가장 가까운 사이이면서도 동시에 서로 다르고 서로 이해하기 어려운 가장 먼 사이인 것도 사실이에요. 여러분 가운데서 부부가 갈등과 의견충돌이 없는 분 한번 손들어 보세요. 부부 사이에는 한 몸이면서 동시에 타인이라는 갈등이 늘 존재합니다. 없다면 그것이 비정상이지요.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없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매우 어렵다는 것이고, 대부분의 부부관계의 실존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부부관계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혼동할 정도로 이 두 관계는 같은 성질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부부관계가 어떤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벌써 답이 나왔지요?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부부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와 똑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사랑과 복종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부부의 관계도 사랑과 복종의 관계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갑자기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렇게 말합니다. 잘못하면 아내들이 단체로 들고일어날 일이지요? 아니, 어떻게 주님께 복종하는 것처럼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입니까? 주님께 복종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고 아무런 이의가 없지만, 남편이 나를 구원해 주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주님께 하는 것처럼 복종하란 말입니까? 불만이 있을 수 있겠지요? 반면에 남편들은 이 구절을 달달 외우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내가 잔소리하고 자꾸 자기주장을 내세우면 이 구절을 갖다대지요.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에베소서 5장 22절 말씀.' 그러면 일단 아내의 기가 꺾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여자들이 기피하는 인물로 뽑힐지도 모르지요.

그러다가 25절에 가면 전세가 역전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여기서는 남편들이 할 말이 없습니다. 애처가들은 여기서 마음의 찔림이 덜하겠지만, 대부분의 남편들은 유구무언이지요. 결혼하기 전에는 맨날 꽃 사들고 쫓아다니다가 일단 결혼하고 나면 아내 생일도 챙겨주지 못할 만큼 무감각해지거든요. 잡은 고기한테 낚시밥 주는 사람 있던가요?

그래서 늘 무시당하고 큰소리만 치는 남편에게 기가 죽어 있던 아내들은 이 구절에 와서 노래를 부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심 같이 아내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당신은 낚시밥도 안주면서 복종은 무슨 복종을 하라고 그래요?' 그러다 보니까 서로 사랑하고 복종하라는 바울 사도의 말이 오히려 부부싸움을 만들어 버렸네요?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아내들에게 하신 말씀을 남편들이 너무 잘 지켰기 때문입니다. 또 아내들은 남편들에게 하신 말씀만 지키기 위해 애를 쓰기 때문이지요.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남편 여러분, 이 말씀에 너무 감명받지 마세요. 이 말씀은 남편들과 아무 상관이 없는 말씀입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아내 여러분, 신경 끄세요. 여러분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는 말씀이에요.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버리세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것과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되는 것은 물론 같을 수가 없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구원하는 것도 아니고 위해서 죽는 것도 아니지요. 마찬가지로 아내가 남편을 예배하거나 믿음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사도가 말하는 것은 그 관계의 원리이지요. 그리스도와 교회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룬 것처럼 부부가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에, 특별히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의 부부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자신들의 관계에 적용해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부부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사랑과 복종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부부관계에 갈등이 생기고 위기가 올 때는 언제이던가요? 남편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입니다. 아내가 복종하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입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려는 마음이 없을 때 그 관계가 불편해지고, 내가 아내를 사랑하고 그것을 올바로 표현하지 못했을 때 부부관계가 삐걱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부관계를 포함해서 모든 인간관계를 지배하는 첫번째 원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인간관계를 설명하기 전에 사도가 서론으로 하는 말씀이 21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럼 남편도 아내에게 복종하라는 것입니까? 물론이지요. 부모도 자녀에게 복종하고, 상전이 종에게 복종해야 합니까? 당연합니다. 피차 복종하게 되는 전제가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기대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 후 변화된 사람들의 삶에서 마땅히 나타나야 할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몸이 된 사람들이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은 피차 복종하는 것이고, 이것이 우리 교회에서 아름답게 나타나야겠지요. 또한 사랑과 복종이라는 교회의 원리, 나아가 피차 복종이라는 인간관계의 원리가 여러분의 가정에서, 여러분의 부부관계에서 충실하게 이루어진다면 남남으로 이루어진 불안정한 온전한 한 몸이 되는 비밀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아울러 여러분의 가정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천국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러한 축복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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