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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빛의 열매 (엡 05: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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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열매(에베소서 5:8-14)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크게 오해하는 것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고 나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는 나도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겠다' 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이런 생각이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찬송가 185장에도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내 몸을 희생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여기서도 역시 은혜로 구원을 받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드리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지도 않으시는 일을 하면서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죽도록 충성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항상 강조하는 구절입니다만 갈라디아서에 기록된 성령의 열매를 다시 한번 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 이하에서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말씀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오직 성품의 열매입니다. 내 성품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로 인해 불평과 원망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는 그 자리에는 언제나 희락과 화평이 넘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전 같았으면 불같이 화를 냈을 일을 웃음으로 참아내며 오히려 그를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전에는 남의 단점만을 찾아내어 흉을 보던 사람이 이제는 넓고 따듯한 마음으로 남의 허물을 감싸줍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은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성경의 기록을 살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신 후에 가장 먼저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우신 일이 아닙니다. 그 분께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이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심령이 변화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또한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십시오. 초대교회 교인들이 성령을 받은 후에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나가서 전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맨 처음 한 일은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떡을 떼며 서로 교제하는 일이었습니다. 미워하던 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자리에 모여 앉아 떡을 떼고, 서로 냉랭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모여서 교제를 나누고, 자기를 위해 욕심을 부리며 살던 사람들이 재산을 다 팔아서 나누어주는 일이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성령을 받았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들의 삶의 자세가 변화되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언제나 우리에게 가장 먼저 우리의 성품이 변화되고, 우리의 심령이 변화되고, 우리의 삶의 자세가 변화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하지 않고서는 교회를 아무리 크게 지어도 소용이 없고, 선교사를 아무리 많이 파송해도 소용이 없고, 40일 금식기도를 40번해도 소용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이런 시각을 가지고 오늘 본문 8-9절을 다시 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말씀했습니다. 빛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어떤 위대하고 훌륭한 일을 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성품이 착하고, 의롭고, 진실해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는, 착함이라고 했습니다.

요즘에는 착하다고 하는 단어가 '바보 같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몇 해전에 제 큰아들이 학교에서 미국여행을 갔습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날 밤에 용돈을 주면서 따로 비상금을 챙겨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당부하기를 '이 돈은 비상금이다.
보통 때는 절대로 쓰지 말고 잘 가지고 있다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이 될 때만 쓰거라'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나중에 여행에서 돌아 온 다음에 비상금은 어떻게 했느냐고 물었더니 다 썼답니다. 그래서 무슨 급한 일이 있었기에 다 썼느냐고 물었더니 한번은 친구들하고 식당에 들어갔는데 지갑을 가져 온 친구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다 냈답니다. 그러면서
'이보다 더 비상사태가 어디있느냐' 하면서 자랑스러운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제가 뭐라고 했겠습니까? '너 그래 가지고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그러느냐'

그런데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이런 구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마태복음 5장 42절 말씀입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저보다 제 아들이 더 성경적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너는 목사가 되라' 그랬더니 처음에는 하겠다고 하더니 요즘에 와서는 오리발을 내밀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착하게 살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착하게 산다고 하는 것은 편견을 갖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사람은 사랑할만한 사람이고 저 사람은 미워할 사람이다, 이 사람은 아무리 베풀어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고, 저 사람은 먹다 남은 빵 조각도 아깝다' 이런 생각을 갖지 않고 다 똑같은 자세로 대하는 것을 착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요나 선지자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요나 선지자에게 나타나셔서 니느웨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내가 니느웨를 심판하려고 하시는데 그 전에 네가 가서 다시 한번 회개할 것을 선포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가기 싫었습니다.
왜냐하면 니느웨는 이스라엘과 원수지간이기 때문입니다. 저 원수 나라 니느웨, 그렇지 않아도 망하기를 기다리던 참인데 뭣 때문에 간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정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탄 배를 뒤집어 놓으시고 물고기 밥이 되게 하십니다. 사흘 후에 다시 꺼내놓으시고 니느웨로 가게 만드십니다. 요나는 하는 수 없이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고 회개할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왕을 비롯해서 니느웨의 온 백성들이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이 모습을 보시고 니느웨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자 요나가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 날 죽여주십시오' 이것이 요나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요 나(我)'의 마음입니다.

서로 미워하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천사가 이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둘이 매일 싸우는 것이 하도 안타까워서 좋은 생각을 해냈습니다. 서로를 축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는 두 사람에게 '만일 누구든지 소원을 말하면 네 옆의 사람에게는 두 배를 주겠다' 제안을 했습니다. '100만원을 주십시오' 그러면 내 옆에 있는 사람이 200만원을 갖게 되고, 또 내 옆에 있는 사람이 '100만원을 주십시오' 그러면 내게는 200만원을 준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옆 사람 때문에 두 배를 가지게 되니 서로 서로 감사한 일입니다. 천사로서는 상당히 머리를 짜낸 아이디어입니다.
그러자 한 사람은 처음에는 한 일억쯤 달라고 할까 했는데 그러면 옆 사람이 2억을 갖게되는 것이 배가 아파서 고민을 하다가 '100원만 주십시오' 그랬습니다. 그래서 옆 사람은 200원을 갖게 되었습니다. 옆에 서있던 사람은 너무너무 화가 났습니다. '아니, 내가 두 배로 갖는 것이 배가 아프다고 100원을 달라고 하다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그래서 이번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한쪽 눈을 뽑아주십시오'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과 점심을 먹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하다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어떤 사람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막 입을 열어서 욕을 하려는 순간, 저 사람이 갑자기 그 사람 칭찬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술 더 떠서 그 사람을 위해서 좋은 선물을 준비했는데 이제 막 가져다 주려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럴 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갑자기 밥이 맛이 없어지지 않습니까? '이 집에 주방장이 바뀌었나?' 이런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제 한쪽 눈을 뽑아주십시오' 이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창세기 18장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아브라함이 장막 문에 앉아있는데 저 멀리 세 사람의 나그네가 나타났습니다.
그 때가 오정쯤이라고 기록되었는데 팔레스틴에서 낮 12시면 너무 더워서 아무도 나가 다니지 않는 시간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아니, 이 더운데 뭐가 급해서 저렇게 돌아다니나' 하고 시원한 그늘 밑에서 낮잠을 청했겠지만 아브라함은 그 길로 달려나가서 나그네들을 맞아 들였습니다. 그리고 발을 씻고 그늘 아래 쉬게 한 다음에 떡을 굽고 송아지를 잡아서 음식을
만들어 대접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세 사람의 나그네는 하나님과 천사들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가리켜서 히브리서 13장 2절은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말씀합니다.

여러분 눈에 보기에 귀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서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부지중에 하나님을 대접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제가 늘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 교회 선교위원회에서는 선교사님들이 홍콩에 오시면 언제나 잠자리를 마련해 드리는 것입니다.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분들이지만 그 분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채워드리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선교사님들이 홍콩에 오실 때마다 연락을 주십니다.

며칠 전에도 수상한 분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전화가 왔는데 비행기를 놓쳐서 하루 묵고 가야하는데 잘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숙소를 마련해 드리고 성함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우물쭈물하면서 '그냥 장로교 목사입니다'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저도 더 이상 묻지 않고 '편안히 쉬십시오' 하고 그냥 끊었습니다. 알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이 진짜 목사냐, 목사면 선교사냐 목회자냐, 어떻게 되었기에 잠잘 돈도 없느냐, 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느냐?' 이런 것 다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을 때 베풀면 그만입니다. 이름을 안 가르쳐 주는 것을 보니 그
분이 혹시 천사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편견을 갖지 맙시다. 귀한 분이든 그렇지 않은 분이든, 잘 아는 사람이든 이름도 모르고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든 똑같이 귀하게 대하는 것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사랑할만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이나 선인이나 똑같이 햇빛을 비추어주시고 비를 내려주시듯이 우리들도 그렇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의 시각으로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을 내가 판단해서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사람을 내 마음대로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되는 하나님을 닮아서 모든 사람을 다 똑같이 귀하게 여기는 마음, 이런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의로움입니다.

여기서 의롭다는 것은 내 감정과 내 생각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을 기준으로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가지고 있는 의의 기준은 언제나 변합니다. 절대적인 기준이 없습니다. 요즘에 김종필이라는 분이 주연으로 나오고 이한동이라는 분이 조연으로 나오는 코미디가 우리를 즐겁게 해주고 있습니다. 그 분들이 하는 대사 중에 가장 압권은 이것입니다. '우리더러 말을 바꾼다고 하지만 지난 선거에서 우리가 17석을 얻을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나?' 왜 몰라요? 홍콩에 사는 저도 벌써 알고 있었는데. 또 하나는 이것입니다. '야당의 길을 가려고 그렇게 몸부림쳤지만 국민은 우리를 야당으로 보아주지 않았다' 남자가 가발 쓰고 여자 옷을 입고 '나는 지금부터 여자입니다' 하는 것과 뭐가 다릅니까? 이게 도대체 무슨 코미디입니까?

이것이 이 세상이 가지고 있는 의의 기준입니다. 오늘 내게 유익이 되는 일이라면 신의도 필요 없고 책임질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그때 자기의 입장과 자기 생각에 따라 '이것이 의로운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대로 믿어버리는 것이 세상이 가지고 있는 의의 기준입니다.

우리말에 '의적'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의로운 도적'이라는 뜻입니다. 홍길동이나 임꺽정 같은 사람을 가리켜 '의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사실 앞뒤가 안 맞는 말입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면 다 나쁜 놈이지 세상에 의로운 도적이 어디 있습니까? 시대를 탓하지 마십시오. 상황을 탓하지 마십시오. 어떤 시대, 어떤 상황이든지 의로운 것은 의로운 것이고 나쁜 것은 나쁜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들이 길을 걸어가다가 횡단보도를 만났는데 빨간 불이 들어왔습니다. 이때 건너가는 것이 자유입니까? 아니면 파란 불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고 서있는 것이 자유입니까? 어느 것이 진짜 자유입니까?

짧게 생각하면 빨간 불이 켜지든 말든 건너가고 싶은 대로 건너가는 것이 자유입니다. '내 가고 싶은 길을 내가 가는데 누가 빨간 불을 만들어서 바쁜 발걸음을 막느냐? 이것은 내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그러고 가는 것이 자유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라고 그럽니다. 빨간 불이 켜졌을 때는 서고 파란 불이 켜져 있을 때는 가는 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겉으로는 자유를 빼앗기는 것 같으나 그것이 자유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내 생각을 기준으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의한 의의 기준을 갖고 사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면 내가 손해보는 것 같아도 그것이 의로운 일입니다. 내가 손해본다고 해서 나쁘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기준한 것만이 의로운 일입니다.

사울 왕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로 하여금 아말렉을 치도록 명령하시면서 아말렉의 사람이나 모든 짐승을 하나도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군대를 이끌고 나가서 아말렉과 싸웠는데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아말렉 왕 아각을 포로로 잡아왔고 수많은 소와 양을 전리품으로 끌고 왔습니다.
사울의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비합리적으로 보였습니다. 아말렉의 왕을 포로로 끌고 오면 백성들이 얼마나 사기가 높아질까를 생각했습니다. 더욱이 저렇게 좋은 소와 양을 다 죽인다는 것은 쓸데없는 낭비로 보여졌습니다. 그래서 몰래 가져다 감추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세우신 기준이 아니라 자기가 세운 의의 기준에 따라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의로움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세우신 의의 기준과 일치하는 것입니까? 내 생각과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뜻에 기초한 의로움의 기준을 가지고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는, 진실함입니다.

진실하다고 하는 것은 겉과 속이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하는 것과 행동이 같은 것, 말하는 것과 행동이 같은 것을 진실하다고 말합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과 공부를 못하는 학생 중에 누가 더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습니까? 공부 못하는 학생이 훨씬 더 스트레스를 많이 받습니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은 항상 '공부를 해야지'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책상 앞에다 '공부를 열심히 하자' '3당 4락, 세 시간 자면 붙고 네 시간 자면 떨어진다' 이런 글귀도 써 붙여놓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공부를 하자' 하고 책상에 앉는데, 우선 공부하기 전에 책상정리를 합니다. 정리가 다 된 다음에는 공부하기 전에 컴퓨터를 켜고 e-mail이 들어 온 것이 없나 확인을 합니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배가 고픕니다. 그래서 라면을 하나 끓여 먹습니다. 배부른데 앉아있자니 슬슬 졸음이 옵니다. 그래서 책상에 엎드려 두 시간을 자다가 깨보니 새벽 두 시입니다. 그래서 침대에 가서
떳떳하게 잡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는 '어젯밤에 두 시까지 공부했더니 머리가 아프다' 이럽니다.

여러분도 그 비슷합니다. 매일 '신앙생활을 잘해야지, 열심히 해야지' 생각합니다. 그런데 막상 성경을 보려고 하면 왜 그렇게 할 일이 많고, 기도를 하려고 앉으면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습니까? 3년 전에 500불 꾸어간 것 안 갚고 한국에 들어간 사람 얼굴이 왜 갑자기 나타나는 것입니까? 그러는 사이에 그럭저럭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납니다. 어느덧 집사가 되고 구역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래봬도 신앙생활을 10년 한 사람이다' 자랑을 합니다. 그러나 내용은 없습니다. 제직근속 기념패만 번쩍거릴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는 길에 무화과나무를 발견하셨습니다. 그 무화과나무에는 잎사귀가 무성하게 돋아있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까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는 다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저주하셨고 그 즉시로 나무는 말라죽었습니다. 나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저주를 하셨습니까? 더욱이 이 기사가 기록된 성경구절을 보면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하였습니다. 때가 아닌데 열매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무화과는 하나의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잎사귀가 돋아나기 시작할 때에 반드시 열매도 열리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잎사귀가 무성한 나무는 곧 열매가 달려있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이 나무는 때도 아닌데 잎사귀를 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열매는 없었습니다. 공연히 기대를 가지게 만들었다가 실망만 안겨주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껍데기만 화려하고 열매는 없는 신앙인의 모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차라리 잎사귀가 없었다면, 껍데기가 화려하지 않았다면 기대하지도 않았을 터인데 기대를 가지게 만들었다가 실망하게 만드는 그런 모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진실 되다고 하는 것은 겉과 속이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말이 있으면 행동이 있고, 생각이 있으면 열매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이 없으면 공연히 나서서 이러고 저러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직 때도 아닌데 잎사귀만 무성하게 열리고 정작 열매는 없는 무화과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여러분들은 이제는 주 안에서 빛 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빛의 열매는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입니다. 모든 이들에게 편견을 갖지 않고 똑같은 사랑으로 대하는 착함과, 하나님의 뜻에 기초한 의로움과, 겉과 속이 같은 진실 됨을 갖추어, 주를 기쁘시게 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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