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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인 중에 내가 괴수 (딤전 0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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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어떤 종이 밖에서 하루 종일 일하고 피곤한 몸으로 돌아오니 주인이 저녁식사를 하려고 식탁에 앉아 있습니다. 그러면 주인이 '수고했구나. 배고프지? 이리 와서 어서 밥먹어라.' 이렇게 말했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너 이리 와서 내가 식사하는 동안 시중을 들어라.' 이 종은 몸도 피곤하고 배도 고픈데, 주인이 맛있게 먹는 것을 바라만 보면서 식탁 옆에서 시중을 들어야 하니, 이런 괴로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주인이 빨리 식사를 끝내주기라도 하면 좋겠지만 주인의 식사습관이 천천히 먹는 것이라면 더 괴로운 일이겠지요. 어쨌든 결국 주인이 식사를 끝냈습니다. 이제야 이 종은 식사를 하러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종이 그렇게 수고하고 시키는 대로 다 했다고 주인이 칭찬을 한 마디 하거나 고맙다고 하거나 무슨 선물을 주었을 것 같습니까? 그것도 천만의 말씀입니다. 한편 그 종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에이, 주인 잘못 만나 가지고 하루종일 힘들게 일하고 와서 또 주인 식탁에서 시중을 들어야 하니, 참 세상 불공평하다. 우리 주인 참 나쁘다.' 이런 생각을 해도 마땅할 것 같지요? 그러나 그 종은 '천만의 말씀입니다. 내가 무슨 잘한 것이 있습니까? 그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요. 오히려 그런 일이라도 맡겨 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이렇게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해마다 봄만 되면 월급 올려달라는 투쟁이 연례행사가 되어 있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파업해서 회사도 망해보라고 버틸 수 있는 오늘의 노동자들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태도입니다. 빨간 머리띠만 보아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사장님에게는 꿈만 같은 이야기이겠지요. 과거에는 악덕기업주가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폭리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도 노동자들은 아무 소리 못하고 당하기만 했었습니다. 노동자들의 고통 속에서 기업주는 사회악이라는 등식이 사회적인 공감대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다가 노동자들이 힘을 발휘하게 되면서 또 다른 형태의 사회악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제 몫을 찾는다는 노력 너머, 힘으로라도 억지를 부리면 자기 주장을 관철시킬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우리 사회가 오랜 독재 아래 신음하다가 민주화라는 큰 성과를 이루었지만, 그 과정에서 생겨난 병폐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만의 논리를 가지고 상대방이 수용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는 풍토, 정 안되면 나도 죽고 너도 죽자 하는 식의 극단적인 행동으로 사회를 마비시키고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는 일들이 너무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툭하면 투쟁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종이 우리 생각에 그렇게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불평은커녕 감지덕지하게 생각했던 이유는 자신의 처지와 신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본다면 노예제도가 지극히 악한 것이지만, 당시에는 노예제도가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선이었습니다. 그것이 잘된 제도라는 의미가 아니라 당시로서는 이의를 제기하거나 변화를 시도할 필요가 없는 극히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상황이라는 말이지요. 노예는 자기가 노예라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노예가 해야 할 일을 아무런 불평없이 수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가치관으로 '이 바보야, 모든 인간은 평등한 거야. 도망을 가든지 반란을 일으켜서라도 자유를 얻어야지.' 이렇게 접근한다면 예수님의 이야기를 가지고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1세기의 상황에서 하신 말씀은 1세기 당시의 기준으로 접근해야 올바른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겠지요?

노예가 되는 사람들은 전쟁에서 잡혀왔거나 파산을 해서 자기 몸을 판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노예가 되었다는 것이 그들의 목숨을 부지하게 해 주는 수단입니다. 전쟁에서 죽었어야 할 목숨이 포로가 되어 죽지 않고 노예가 되었으니, 노예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파산을 해서 빚을 갚을 방법이 없는데, 마지막으로 자기 몸이라도 팔 수 있어서 빚을 갚게 되었으니, 노예가 되는 방법이 아니었다면 큰일날 뻔했지요? 그런데 노예가 하는 일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주인을 위해서 주인을 섬기는 일입니다. 그게 싫으면 노예가 되지 말았어야죠. 다른 사람을 섬기는 노예노릇 못하겠다면 전쟁에서 죽었어야죠. 빚도 못갚고 감옥에 가든지 빚쟁이에게 괴로움을 당하든지 했어야죠. 그래서 노예는 주인에게 충성하고 감사하는 것이 당연한 본분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위해서 누구보다도 많은 수고를 한 사람입니다.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고, 가는 곳마다 위험과 핍박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편안하고 여유있는 생활과는 점점 멀어지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외롭고 지쳤을 때 위로와 평안을 얻을 가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평생 주님을 위해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일을 했지만, 주님께서 바울에게 편안한 집 한 채 주시지 않았고, 안락한 노후생활을 보장해 주시지도 않았습니다. 그 병든 몸을 이끌고 어디든지 주님의 명령에 따라 가야 했고, 감옥을 자기 집처럼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 바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 주님께 감사한다는 말뿐입니다. 나에게 이런 일을 맡겨주신 것을 감사한다는 것이지요. 왜 나에게 이런 일을 시킵니까? 나도 피곤한데 좀 쉬어야죠. 내가 지금 당장 배고파 죽을 지경인데, 어떻게 다른 일도 아니고 식사 시중을 시킵니까? 우리 기준으로는 얼마든지 이렇게 불평하고 데모도 하고 투쟁도 해야 될 상황이지만, 바울은 그저 감사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처럼 주님께 무조건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자신의 과거 때문입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바울이 얼마나 극심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하고 그 추종자들을 핍박했었는지는 온 세상이 아는 일이지요. 그의 주도 아래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고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을 만하던 스데반이 첫 번째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예수의 예자만 부르는 사람을 보아도 모조리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누가는 '사울이 교회를 잔멸했다'고 사도행전에 기록했습니다. 사울에게는 이 예수가 원수였어요. 할 수만 있다면 예수를 직접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다시는 사람들을 미혹하지 못하도록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사울이 예수님께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가짜, 사기꾼, 원수로 생각했던 그 예수가 알고 보니 자신이 가장 충성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야말로 큰일이 난 것입니다. 세상에 핍박하고 반대할 사람이 따로 있지, 하나님을 핍박했으니 그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습니까? 자기 죄를 무슨 죄에다 비교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말하는 것 아닙니까? 그 하나님을 가짜, 사기꾼으로 생각하고 핍박했으니, 사울이 받을 것은 너무나 뻔한 것입니다. 아무리 심한 극형을 당한다 해도 사울이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고, 자기 전 재산을 팔아도 보석금을 충당할 수 없습니다. 사형을 당해도 한번 당해서는 시원치 않고 수십 번 사형을 당해도 그것으로 자기가 저지른 일을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사울이 그것을 왜 모르겠어요?

그렇게 처분만 기다리고 있는 사울에게 주님이 하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놀랍게도 자기 종을 삼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일을 맡기셨습니다. 죄수들을 감옥에 가둬놓고 노동을 시키는 그런 징역이 아니라, 마치 자기 비서실장을 시키는 것처럼, 바울을 충성스럽게 여기고 중요한 일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할 수 있는 말이 감사하다는 것 외에 무엇이 있겠어요? 바울이 그 주님을 위해서 매를 맞는다면 그것은 어떤 즐거움보다 컸을 것입니다. 그 주님을 위해서 감옥에 가야 한다면 백 번이라도 갔을 것입니다. 자기 몸 병들고 외로운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죄인 중의 괴수인 자신을 벌하시지 않고 살려주신 것만도 몸이 가루가 되도록 충성해도 못갚을 은혜입니다. 그런데 거기다가 충성스러운 종에게 맡길 일을 주셨으니 몸둘 바를 모를 일이지요.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일꾼된 사람의 마음가짐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께 감사 대신 불평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을 시키십니까? 작년에 그만큼 했으니까 올해는 좀 쉬게 해 주셔야죠. 지금 내 앞가림도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교회 일까지 신경을 쓰라는 말입니까? 물론 여러 가지 타당한 이유와 사정이 있을 수 있고, 또 교회 안에서 그런 것들이 마땅히 고려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우리의 태도가 중요한 것이지요.

반면에 안시켜준다고 불평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교회 다닌 지 10년이 지났는데 왜 장로 안시켜 주는 겁니까? 나보다 나이도 적은 아무개는 안수집사 됐는데, 왜 나는 번번이 투표에서 떨어뜨리십니까? 내가 아무개보다 못한 게 무엇입니까? 사실 교회마다 이 직분 문제 때문에 잡음도 많고 문제도 많이 발생합니다. 특히 문제는 장로를 목표로 뛰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분은 노골적으로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 교회에 투자한 것이 얼마나 많은데 장로를 안시켜줘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로는 참 이상한 직분입니다. 장로도 주님을 섬기기 위한 하나의 직분일텐데,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장로가 되기 전과 장로가 된 후의 사람이 너무 다르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겠지만, 그렇게 겸손하고 온유하던 사람도 일단 장로가 되면 고집과 오만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장로가 사람을 변하게 하는지, 아니면 장로가 되고 나서 본색이 드러나는지 모르겠지만, 그럴 바에 장로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이런 경우들을 종합해서 결론을 내린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의 직분을 맡음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서로 하려고 하는 일은 안하려고 하는 것이 유익하고, 다른 사람들이 안하려고 하는 것은 자원해서 열심히 하는 것이 참된 직분자, 성실하고 충성스러운 종의 모습이라고 생각됩니다. 바울은 아들이라고까지 부르는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가 직분을 맡아서 수행하게 된 것을 격려하고 돕기 위한 편지에서, 죄인 중에 괴수인 자신을 충성되이 여겨 직분 맡기셨으니 감사하고 그래서 충성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스승인 바울의 이 편지를 읽으면서 디모데 역시 직분자의 자세를 가다듬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바울과 디모데같은 위대한 분들이 자신들을 그처럼 무익한 종으로 여기면서 교회를 섬기는 직분을 감당했다면,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와 주님을 섬기는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이 디모데전서는 디모데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바울처럼 직접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경험이 없다 할지라도 '나는 죄인 중에 제일 책임이 가벼운 똘마니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어떤 죄인들이었습니까? 마땅히 심판에 처해져 멸망받아야 할 죄인들 아니었습니까? 그런 우리가 그 심판을 면제받고 구원얻었다는 사실, 거기다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도록 직분을 맡았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또한 제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것만을 보아도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좋은 일만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슬픔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가 아니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 시켜서 억지로 하는 종이 아니라, 받은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기쁨으로 충성하는 그런 직분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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