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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파선한 믿음 (딤전 01: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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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선한 믿음 (딤전 1:18-20)

죽기를 각오한 소수 정예부대를 거느리고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의 운명을 구하기 위해 결전을 벌이고 있던 백제의 계백장군이 매우 용맹스러운 적장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런데 끌고 와서 투구를 벗겨보니 아직 나이 어린 소년입니다. 계백장군은 이 소년을 차마 죽이지 못하고 말에 실어 신라의 진영으로 돌려보냅니다. 그 소년은 다름 아닌 신라의 총사령관 김유신 장군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들 관창이 그렇게 불명예스러운 모습으로 살아 돌아왔다는 소식에 김유신 장군은 대노해서 만나주지도 않습니다. 화랑 관창은 다시 창을 비껴들고 전장으로 나가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김유신이라도 아들이 사는 것보다 죽기를 바랐겠어요? 아들에게 전쟁에 임하는 장수의 자세와 임무를 가르치려는 것이지요. 백전노장 아버지가 어린 장수 아들에게 주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아들 관창아, 무릇 대장부가 나라를 위한 전쟁에 나가서 물러서는 법이란 없는 것이다. 임전무퇴(臨戰無退)라 하지 않았느냐? 차라리 전쟁에서 죽을지언정 패해서 도망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이것은 아들에게 주는 교훈이라기보다 군대의 사령관이 부하에게 내리는 명령입니다. 전쟁시의 군령은 매우 엄해서 어기는 즉시 사형 아닙니까?

이단이 들끓다시피 하는 에베소 교회에 디모데를 보내 놓고 바울은 황산벌 전투에 아들을 내보내는 김유신 장군처럼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너에게 단단히 명령을 내린다. 전에 내가 너에게 가르쳤던 대로, 내가 너를 훈련시켰던 대로 나가 싸워라.' 디모데는 지금 에베소에서 목회 현장실습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곳은 바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쟁터였단 말이죠. 그리고 바울은 그 전쟁을 지휘하고 감독하는 사령관입니다.

이 디모데전서는 교회나 교인들에게 보낸 다른 편지와 달리 교회의 목회자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디도서와 더불어 목회서신이라고 불리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은 여러분보다 목사인 저에게 더 해당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것은 내가 설교를 해야 할 내용이 아니라 이 말씀으로 설교를 듣고 내가 교훈을 받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목회의 대선배이신 바울 사도께서 저에게 이 말씀을 하신다면 뭐라고 하실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손자의 손자의 손자 손자 손자 이정선 목사, 너 내 명령을 잘 들어라. 해밀턴 전투에서 너는 이러이러한 전략으로 전투에 임하도록 해라.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우리편에 큰 손실을 초래할 패배를 당할 수도 있다.'

학교에서 공부를 할 때, 조금 못해도 괜찮습니다. 시험봐서 몇 문제 틀릴 수도 있고, 1등 못하면 2등 할 수도 있습니다. 장사를 하면서도 조금 못하거나 실수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난달에 3,000달러 벌었는데 이번 달에는 2,000달러밖에 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덜 벌었으면 좀 덜 쓰고 살면 됩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전쟁을 치를 수는 없습니다. 이기면 좋고, 지면 할 수 없지 하는 식으로 전쟁을 하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물론 전쟁이란 한 편이 이기면 다른 편이 지게 되어 있지만, 전쟁에 임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기기 위한 목표로 싸우는 것입니다. 제가 주사랑교회의 목사로서 영적 싸움을 싸우는 마당에 얼마나 치열한 자세와 열심을 가지고 이 전쟁에 임하고 있는가 하는 부분을 생각하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전쟁에는 아들도 없습니다. 아들이기 이전에 당장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장수이지요.

꼭 저만 지금 이 전쟁을 치르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가 영적 전투에 임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어떤 존재입니까? 베드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는 것이 마귀입니다. 우리는 그 마귀와 대적해서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적당히 할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 마귀와의 전쟁에서 스위스처럼 중립국 선언을 하고 이쪽 저쪽에 가담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남들은 피흘리며 싸우는 동안 '나는 마귀와 원수진 일 없으니까' 하면서 뒷전에서 구경하는 것이 가능한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마귀와 죽기살기로 싸우거나 아니면 마귀의 손아귀에 잡혀 있거나 둘 중 한가지밖에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전쟁터가 아닌 중립국에서 살 듯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는 전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장사하는 일이야 '꼭 그렇게 죽기살기로 해서 3,000불 벌어야 하나? 좀 쉬엄쉬엄 하면서 2,000불만 벌고 말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쟁을 하는 사람이 '꼭 그렇게 힘들여서 이겨야 하나? 좀 쉬엄쉬엄 하지.' 그럴 수 있습니까?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나가면 됐지, 무슨 수요일에도 나가야 하나? 게다가 매주 무슨 홈그룹 모임까지 나가나? 예수도 적당히 믿어야지. 자칫하면 광신자 되겠어.' 이런 식으로 대충 신앙생활하려는 사람들이 의외로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믿음은 헌신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싸움에 임하는 장수처럼 헌신하지 않고는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의 구원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지요. 적당히 전쟁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수믿는 일은 절대로 적당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자, 그런데 이 선한 싸움, 영적 싸움을 싸우는 데 필요한 전략은 무엇입니까? 바울이 디모데에게 지시하는 전략, 전에 디모데를 지도한 예언은 무엇입니까?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지금 바울은 새로 믿기로 작정한 사람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믿음이 좋고 충성스러운 영적 아들, 에베소 교회를 목회하면서 성도들에게 믿음을 심어주고 있는 디모데에게 하는 말이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수십년 해오고 있는 사람에게, 또는 교회의 장로나 목사에게 '당신 믿음을 가지라'고 말하면 불쾌하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그 목사는 믿음이 없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정도 되면 믿음이 완숙한 단계에 도달했을 것이라고 자타가 무작정 인정을 해버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얼마나 많은 지도자들이 믿음 없는 행동을 하는지 보세요. 총회장 선거에 나가 수억의 돈을 뿌리면서 표를 사고 부정선거를 해서 총회장이 되고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것이 존경받는 지도층 목사님의 믿음 있는 행동입니까? 부동산 투기나 부정한 사채놀이로 수십억을 번 장로님이 수억 십일조하는 것을 보고 참 좋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종교적 열성은 될지 모르지만 기독교 신앙과는 거리가 먼 행위들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저버리고 자기 욕망과 이기적인 동기에 의해 교회의 일을 한다고 설쳐대는지 모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어떤 사람들은 이 믿음에 관하여 파선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믿음이 좋았어요. 순수한 믿음으로 순조롭게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잘 나가던 항해 도중 그만 폭풍을 만나거나 암초에 걸려 배가 파선하게 되는 것처럼, 그 순수하던 믿음이 변질되고 결국은 그 믿음을 저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 시대에 오늘날처럼 좋은 시설을 갖추지 못했고 SOS 신호를 보낼 무전기도 없는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파선한다는 것은 끝장을 의미합니다. 애초부터 믿음이 없었다면 파선할 것도 없고 안타까울 것도 없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의 풍성한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이 믿음에 관하여 파선한다는 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고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 6:4-6).

무릇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은 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행동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이기 때문입니다(롬 14:23). 특히 교회의 지도자, 직분자들에게 첫 번째로 요구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 때문이 아니라 억지로 하는 의무감이나 남들에게 내보이기 위한 공명심이나 또는 자기만족으로 하는 섬김이나 봉사의 행위는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으로 교회의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것이 착한 양심입니다. 명색이 교회의 지도자인데 희생이나 자기부인, 인내, 이런 좀더 고상하고 높은 수준의 도덕이 요구될 줄 알았는데, 가장 기본적인 것만 얘기하고 있군요. 양심이란 무엇입니까? 나무로 깎아 만든 인형 피노키오에게 요정이 나타나서 생명을 주겠다고 합니다. 주의사항은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피노키오가 묻지요. '양심이 뭔데요?' 귀뚜라미 제미니가 옆에 있다가 '양심이란 마음 속에서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라고 일러줍니다. 그러자 요정은 제미니에게 피노키오의 양심이 되어 달라고 합니다. 그 후로 피노키오에게는 이 귀뚜라미 제미니가 아주 귀찮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사건건 참견하고 반대하고 하고 싶은 것만 골라서 못하게 막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피노키오는 제미니가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제미니 의 말을 듣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했다가는 꼭 나쁜 일을 하게 되거든요. 그리고 좋은 일을 했을 때 제미니는 누구보다 좋은 친구가 됩니다.

이 양심이라는 것은 우리의 모든 행위에 대하여 반응하도록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 속에 심어두신 매우 중요한 장치입니다. 물론 이것을 두신 것은 우리가 죄짓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양심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때 우리의 행위는 선하고 그래서 파멸을 면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 속의 양심은 육체가 감지하는 고통과 똑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지요. 육체가 고통을 느끼는 것은 그 고통의 원인을 제거해서 육체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육체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부서지든지 어떻게 되겠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양심을 버렸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바울은 양심에 화인을 맞은 사람들이라고 4장에서 말합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육체가 파멸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양심을 버린 사람들은 영적으로 파멸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선한 양심은 선한 행실로 귀결되고, 그렇게 해서 교회의 건전한 교리를 뒷받침하게 되기 때문에, 교회를 다스릴 지도자가 선한 양심을 가지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이 에베소 교회에 양심을 버리고 믿음에 파선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고 잘못 인도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런 사람들로 후메네오와 알렉산더가 소개됩니다. 바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했는가 하면 사탄에게 내어주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대체로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탄에게 내어준다는 것은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옳다는 것을 확증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탄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지요. 욥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또한 성령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셔서 사탄에게 내어주신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내고 사탄이 틀렸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 다른 형태는 징계와 심판을 위해서 사탄에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후메네오와 알렉산더의 경우는 징계를 위해서 사탄에게 내어준 경우지요. 저희로 징계를 받아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를 훼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사탄에게 내어주었다고 했지요? 즉 이 사람들이 갑자기 중풍에 걸려서 꼼짝달싹도 못하게 되었거나 벙어리가 되어서 더 이상 사람들에게 거짓된 교리를 가르치지 못하게 했을 수도 있겠지요. 아주 급한 경우에는 이처럼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셔서 교회 안의 문제를 잠잠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또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교회 안의 음행하는 자들을 사탄에게 내어주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육신이 멸하고 영이 구원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즉 육체의 병이나 어려움으로 징계를 받음으로써 더 이상 음행이라는 범죄를 계속하지 못하게 하고 또 정신을 차리고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징계를 위해 사탄에게 내어주었다는 것 자체가 구원받지 못하게 된 것이라고 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아주 최종적인 징계와 심판으로서 사탄에게 내어준 경우가 있을 수 있고, 조금 내주어서 단단히 혼이 난 다음에 정신을 차리도록 하기 위한 경우가 있을 수 있지요. 결국 징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 징계를 위하여 사탄이 사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사탄에게 내어주는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여러분 중에 그렇게 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목사인 제가 믿음과 착한 양심을 지켜 선한 싸움에서 승리하도록 위해서 늘 기도해 주시고, 여러분도 언제나 어디서나 이 믿음과 양심을 지켜나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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