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집사님, 우리 집사님 (딤전 03:8-13)

첨부 1



집사님, 우리 집사님 (딤전 3:8-13)

아무리 높은 이상과 훌륭한 계획이 준비되었다 해도, 그것이 실행에 옮겨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머리로 아무리 좋은 생각을 했어도, 입으로 아무리 아름다운 말을 했어도, 그것이 손발의 수고를 통해 실행되지 않으면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성능이 우수한 엔진과 안락하고 멋진 차체는 가졌지만 바퀴가 없는 자동차와도 같습니다.

교회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교회라는 유기체 안에 기능과 역할을 달리하는 지체들이 여럿 있지만, 일이 집행되고 실제로 진행되어가는 것은 어떤 부분에 의해서입니까? 바로 집사들에 의해서지요. 애초에 집사라는 직분이 생겨났던 것도 바로 그러한 필요를 충당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집사는 교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우선 숫적인 면에서 교회구성의 근간이 되는 인력이 집사입니다. 그래서 집사부대가 튼튼하면 그 교회는 튼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집사부대가 힘이 없으면 교회 자체가 휘청거릴 수밖에 없지요. 나이드신 분들이 마음은 청춘이지만, 그래서 달음박질이라도 막 할 것 같지만, 손발이 그렇게 움직여주지 않아서 못하지 않습니까? 교회가 좋은 계획과 효과적인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어도, 숫적인 면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집사들이 힘이 없거나 열심이 없으면 몸이 마음같지 않은 노인과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즉 교회의 모습은 집사들의 행동으로 나타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집사들이 교회에서 얼마나 바쁜지, 얼마나 열심을 가지고 교회 구석구석에서 자기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 집사들이 얼마나 충성스러운지에 따라서 그 교회가 살아 움직이는 교회인지, 혹은 고인 물처럼 정체되어 있는 교회인지 알 수가 있겠지요.

또 한가지 집사들의 모습이 교회를 대변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세상에 대해서입니다. 집사란 교회에서 일정한 분량의 책임과 역할을 수행할 만큼 그 믿음이 인정되는 사람입니다. 즉 기독교 진리에 대해서 거의 이해가 없는 사람이 집사가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교회를 반대하는 사람도 집사가 될 수 없지요. 즉 집사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고, 교회에서 양적으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일단의 신자 그룹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세상 사람들을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것이 누구이겠습니까? 물론 집사입니다. 목사는 세상 사람들과 접하고 여러 관계를 맺고 살 기회가 많지 않아요. 세상 사람들이 목사에 대한 비난을 하고 또 목사의 행위가 도마에 오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실제로 목사를 만나서 목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특정한 경우에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하는지 잘 몰라요. 예수 안믿는 사람들이 목사를 친구로 사귀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목사와 늘 만나 거래하고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거나 개인적으로 가까이에서 지내는 불신자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세상에서 불신자들과 같이 사업하고, 만나고, 사귀고, 이런저런 관계를 맺고 사는 신자들은 다름아닌 집사라는 것입니다. 물론 집사가 아닌 초신자들도 그리스도인의 이름표를 달고 세상 사람들과 접하고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초신자 자신도 그렇고 상대하는 사람들도 초신자들을 full license를 가진 그리스도인으로 보지 않습니다. learner's license를 가진 정도라고 할까요? 경우에 따라서 초신자는 아직 세상에 더 많이 속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모습을 보고 교인들이 다 그렇다고 할 사람은 없어요. 그러나 집사라고 하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집사는 세상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나타나게 됩니다. 즉 자신이 속해있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세상을 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집사인 것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는 집사의 신분으로부터 자유로울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웃 사람에게 집사라는 것을 숨기고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업상 늘 만나는 사람에게 내가 주사랑교회 집사라는 것을 끝까지 감출 수는 없단 말이죠. 결국 우리가 이 세상과 아주 단절된 생활을 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집사의 신분을 가지고 세상을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집사들의 모습을 보고 교회의 모습을 추측하고 판단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집사의 행동은 교회의 행동을 대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 이번에 새로 입사한 사원이 교회 집사라더니, 확실히 다르더구만. 책임감도 강하고 성실한 게 역시 교인들이 달라.' 어떤 집사가 이런 말을 듣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 집사의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교회가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가진 공동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어떤 집사는 이런 말을 듣는다고 합시다. '우리 과장님은 그 유명한 교회 집사라는데, 어쩌면 그렇게 인간성이 못됐냐? 직원들을 못잡아먹어서 안달이야.' 그럴 때 교회는 무엇이 됩니까?

사도 바울은 젊은 목사 디모데에게 집사는 어떤 사람들이어야 하는지를 상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8절의 '이와 같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앞에서 목사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했었지요? 그러니까 집사들도 목사와 같이 단정해야 한다는 거예요. 단정하다는 말은 '진지하다, 고상하다, 존경받을 만하다'는 뜻이에요. 교회의 모습을 대변하며 살아가는 집사의 행동이 천박하거나 사려깊지 못하면 안되겠지요. 일구이언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하고,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말하고, 이 상황에서는 이랬다가 상황이 바뀌면 쉽게 변신하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 집사의 거룩한 직분을 맡길 수 없습니다. 술에 인박이지 않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했지요? 술은 인간을 지배해요. 한번 중독이 되면 우리의 의지나 노력으로도 극복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좋지 않은 습관, 과거에 우리 삶을 지배하던 것에서 아직 탈출하지 못했다는 것, 이것은 교회의 얼굴인 집사의 자격에 미치지 못한 상태입니다. 또한 더러운 잇속을 챙기는 사람이어서도 안됩니다. 교회의 집사는 베풀고 희생하는 자리입니다. 거기에다 탐욕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을 앉혀놓으면 뭐가 되겠어요?

탐욕으로 집사의 일을 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여행 팀의 회계집사, 가룟 유다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어요. 겉으로는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는 척하면서 모금하고 헌금을 독려했는데, 알고 보니,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요 12:6)고 했어요. 이처럼 집사에게는 높은 도덕성이 요구됩니다.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도덕성이 요구되는 것이지만, 특별히 교회에서 집사의 직분을 감당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지요.

더 나아가 집사는 영적 삶에 있어서도 일정한 분량에 이르러야 합니다. 도덕적으로 완벽하다고 해서 누구나 집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9절에서는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비밀이란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하는 신분증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는 이 믿음은 정말이지 비밀이에요. 물론 여기서 비밀이라는 말의 뜻은 과거에 감취었다가 이제 나타난 계시라는 뜻이지만,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감취어져 있는 상태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그로 인하여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몰라서 안믿는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아무리 교회를 반대하는 사람이라도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은 믿어지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그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이것이 믿어지는 사람, 그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이해한 사람이 바로 믿음의 비밀을 가진 사람입니다.

교회의 일꾼인 집사를 뽑는데, 믿음을 갖지 못한 사람을 뽑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실은 믿음이 없으면서도 집사가 되는 경우가 허다해요. 회사에 평사원으로 입사해서 어느 정도 경력을 쌓고 능력을 인정받으면 과장이 되고 부장도 되지요? 많은 사람들이 교회다니는 것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집사 안시켜준다고 다른 교회로 나가요. 그래도 집사 되려고 하는 것은 큰 문제 아닙니다. 진짜 큰 문제는 장로를 목표로 뛰는 사람들이에요. 침례교회에 다니는 분들의 고민이 그거예요. 나이로도 어른대접을 받을 만하고, 사회적 지위도 어느 정도에 이르게 되면 다른 교회에 다니는 친구들은 다 장로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갖게 되는데, 침례교회에 다니면 백날 집사예요. 그러니 격이 맞지 않고 같이 어울리기가 곤란한 거예요. 한국에서 침례교회가 크게 성장하지 못한 이유 중에 하나가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어떤 침례교회에서는 장로제도를 만들었어요. 침례교회는 원래 회중정치를 바탕으로 하는 교회인데, 자기 정체성을 스스로 깨뜨려야 할 만큼 이것이 큰 골칫거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원리에 충실한 교회들은 장로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총회를 모이면 장로 찬성파와 반대파가 장로제도 도입을 두고 싸워요.

어떤 경우는 믿음이 없어서 집사가 될만하지 않는데도 교회나 목사가 억지로 집사를 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로 개척교회에서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봉사를 하면 믿음도 생긴다면서 말이죠. 물론 그런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먼저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여야 집사로 합당하다는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믿음 없는 사람에게 억지로 집사의 직분을 맡기는 것도 올바른 일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무엇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했습니까? 깨끗한 양심이지요? 양심은 우리 속에 상주하는 경찰입니다. 잘못을 하면 즉시 싸이렌을 울리며 쫓아옵니다. 믿음의 비밀을 가진 사람의 마음 속에서 늘 양심의 싸이렌이 울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그 믿음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대부분의 집사들이 믿음의 비밀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왜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교회의 거룩한 모습을 증거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믿음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양심의 싸이렌이 늘 울리는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을 편안하게 하지 못하는 믿음, 이것을 가리켜 야고보 사도는 죽은 믿음이라고 했지요(약 2:17).

이렇게 집사의 직분에 합당한 사람을 찾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시험해 본 다음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감당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사실 오늘날의 교회에서 집사가 너무 남발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안수 집사이건 서리 집사이건, 남자 집사이건 여자 집사이건, 이러한 자격기준에 합당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요.

이렇게 집사의 직분을 잘 감당한 사람들은 아름다운 지위를 얻습니다. 뛰어난 지위를 얻는다는 뜻입니다. 뛰어난 지위란 결국 높은 지위 아닙니까? 집사들이 하나님 앞에서 얻게 될 상급은 높은 지위라는 거예요. 이것은 이미 주님께서 약속하신 상급이기도 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3-44)고 하셨지 않아요? 집사란 내세우고 행세하는 직분이 아닙니다. 묵묵히 희생하고 섬기는 직분이지요. 이러한 집사의 직분을 잘 감당하여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었으니, 주님 앞에 으뜸이 되는 상급을 받을 것이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집사에게 약속된 또 하나의 상급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는다는 거예요. 이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대제사장과 공회 앞에서 기탄없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는 모습입니다. 섬김의 직분을 충실하게 감당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능력을 체험하게 되고, 그래서 그들의 증거가 힘있고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그만큼 큰 일꾼이 되는 것이지요. 결국 교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집사들이 꾸려가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우리 집사님들, 여러분은 세상에 나가서 우리 교회의 모습을 어떻게 내보이고 있습니까? 우리 집사님들은 지금 바울이 말하고 있는 집사의 모습에 비추어 몇점이나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몇 점 이상 받니 못한 집사들은 모두 그만 두시오 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두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영광스러운 일에 부르심을 받았으니, 거기에 합당한 모양을 갖도록 애써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이것이 또한 연약한 우리를 부르시고 귀한 직분을 맡겨주신 주님의 뜻일 것입니다. 저는 우리 집사님들이 모두 귀한 믿음으로 충성스럽게 교회를 섬기고, 또한 높은 도덕성과 성숙한 믿음의 생활로 세상 앞에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내보이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