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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사함으로 받으면 (딤전 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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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함으로 받으면 (딤전 4:1-5)

사람이 변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천하의 망나니 같던 사람이 개과천선해서 모범 시민이 된다거나, 공부하고는 담을 쌓은 것처럼 보이던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공부에 푹 빠져 우등생이 되는 수도 있지요. 이처럼 긍정적인 변화는 우리가 모두 추구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늘 요구되는 것이 이러한 변화입니다. 예수 믿고 변했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변화는 그와 같이 긍정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착한 아이들이 친구를 잘못 사귀어 가지고 물들었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지요? 그런데 무엇보다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정적인 변화는 믿음을 저버리는 행위입니다. 여기서 믿음을 저버린다는 것은 교회 조금 다니다가 그만두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지요.

제가 학생시절에 참 신실하고 믿음 좋은 후배가 있었어요. 어머니만 계셔서 가정형편이 어려웠지만, 성품도 좋았고 좋은 꿈도 가지고 있는 청년이었지요. 교회 일에도 열심이었어요. 그러다가 제가 군대를 갔고, 얼마 후에 그 후배도 군대를 갔겠지요. 제가 제대를 하고 한 1,2년 후에 그 친구가 제대를 해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4,5년 만에 다시 만난 것이지요. 그런데 이 친구가 너무나 변한 거예요. 군대에서는 기독교 신자를 기독교 환자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어요. 어떤 때는 일요일에도 작업을 하는 수가 있는데, 종교활동 보장이라 해서 기독교 신자들은 교회를 간단 말이죠. 그걸 아니꼽게 생각하는 고참들이 기독교를 비하해서 교회다니는 졸병들을 그렇게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군대에서 막 제대해 나와서 하는 말이 그래요. '형은 아직도 환자야? 나는 이제 나았어.' 정말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렇다고 붙잡아놓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다시 이해시켜야 되겠습니까? 그걸 모르던 사람이 아니잖아요? 저는 그게 참 궁금했어요.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변할 수 있을까? 변하는 것이야 가능하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과거에 가지고 있던 믿음과 그 행위들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히브리서에 보면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히 6:4-6)고 했어요. 비췸을 얻었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다, 성령에 참예한 바 되었다,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 하는 것은 모두 같은 얘기라고 할 수 있겠지요? 기독교의 진리를 깨닫고 그 속에 깊이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수양이나 발견을 통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에 참예함으로써, 즉 하나님과 함께 상호활동에 의해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데까지 이른 사람이 타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바울은 말하기를 성령께서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밝히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될 줄을 미리 다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후배가 정말 자랑스럽고 믿음직한 믿음의 동지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 친구가 자기는 더 이상 기독교 환자가 아니라고 말하게 될 줄이야 꿈에나 생각했겠습니까? 오직 각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만이 장차 일어날 일을 아시지요. 그 후배가 그렇게 될 줄도 모르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말씀 공부하고 함께 교회를 섬기던 일들이 얼마나 허무하게 느껴지겠습니까? 그렇다고 그 친구가 마음에 없으면서 거짓으로 믿음이 있는 것처럼 연극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야말로 비취심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기 때문에 그 믿음이 귀한 것인 줄 알고 구원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변할 수 있을까요? 전에 맛보았던 하나님의 말씀과 내세의 능력이 아무것도 아닌 헛것이라고, 그저 속았을 뿐이라고 그렇게 부인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것을 다른 방법으로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처럼 미혹케 하는 영의 가르침을 좇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미혹케 하는 영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도록 생각과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도 할 수만 있으면 그 진리가 가짜인 것처럼 보이도록 그래서 그 진리를 거부하고 떠나도록 마음을 조종합니다. 이것이 미혹의 영이 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미혹의 영의 희생이 된 사람들이 있는 것이지요.

이디 아민의 폭정과 광기로 폐허가 되다시피 했던 우간다가 다시 아프리카의 진주라는 별명을 다시 회복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가베 대통령의 탁월한 지도력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무가베 대통령이 쓴 책에 이런 말이 있었어요. 'I was a born-again Christian.' 나는 과거에 중생한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지금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중생했다가 그 중생이 취소돼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갔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한번 더 새로 태어나 이제 중생이 아니라 삼생을 한 것입니까? 그의 중생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경험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가베 역시 미혹케 하는 영에 의한 희생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미혹케 하는 영을 따르게 된 사람들은 교회를 완전히 떠난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사람들은 교회 밖으로 나간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하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일을 했습니다. 소위 이단이 발생한 것입니다. 디모데가 섬기고 있던 이 에베소 교회는 우리가 많이 살펴보았던 것처럼 이단의 본고장이라고 할 만큼 이단의 활동이 강했던 곳이었습니다. 나이 어린 목회자 디모데는 교회 안에 일어난 이 이단 때문에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많이 놀랐을지도 모릅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신실하고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이상한 주장을 하면서 교회를 어지럽히게 되었단 말입니다.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이해도 되지 않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라 매우 난처했을 거예요.

여기에 대해 바울은 말하기를 놀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성령께서 밝히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기 시작한 이래 지금 이 순간까지 수많은 이단들이 발생해서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진리를 위협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성령께서도 미리 알고 계셨고, 교회도 마땅히 대비해야 할 일입니다.

디모데를 난처하게 했던 이단들의 주장은 혼인을 금하고 특정한 음식을 먹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것이었습니다. 혼인을 금했다는 것은 고대 그리스 철학의 이원론, 즉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사상에 근거한 거짓 가르침이고, 음식을 폐하라고 했다는 것은 구약의 정결법에 근거한 유대주의, 혹은 율법주의에서 비롯된 이단입니다. 그러니까 에베소에는 당시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이단들이 생겨났다고 할 수 있겠군요.

바울은 여기서 음식에 관해서 좀더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음식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 옛날에 수준 낮은 사람들이 하던 것처럼 어떤 것은 먹어도 되고 어떤 것은 안 된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한 것이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만드셨던 것 중에 선하지 않은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것들 아닙니까? 사람이 먹는 음식도 마찬가지지요. 처음에는 채소와 과일, 곡식, 이런 것들만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애초에는 초식동물이었던 셈입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이 초식동물이었을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창 1:30)고 하셨거든요. 이사야 선지자가 그린 메시야 왕국의 모습은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다 풀을 먹는다면 폭력과 생존경쟁도 없겠지요. 사람이 동물의 고기를 먹게 된 것은 노아의 홍수 이후입니다. 대홍수로 인해 생태계에도 큰 변화가 생겼고, 자연환경도 크게 달라졌으리라고 추측이 됩니다. 사람이 고기를 먹게 된 때부터 사자 역시 사냥을 하게 되었겠지요.

어쨌든 사람이 먹는 음식은 가치중립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분석해서 소고기는 단백질이 많고 돼지고기는 지방이 많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소고기에는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요소가 들어있고 돼지고기에는 사람을 악하게 하는 성분이 있다고 분석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율법은 마치 그런 것처럼 사람들에게 인식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구약시대에 시행되던 먹어도 되는 음식,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의 구별이 완전히 폐지되었습니다. 구약의 율법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도덕법, 또 하나는 시민법, 나머지 하나는 의식법입니다. 도덕법은 그야말로 우리 인간이 시대와 문화를 초원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덕적인 법입니다. 가령 살인하지 말라거나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계명들은 시대나 상황에 따라 변하거나 다르게 적용될 수 없습니다. 만약 이러한 도덕법과 상충하는 문화가 있다면 우리는 그 문화를 악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그것을 폐지하거나 개선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종의 문화에서 살인은 죄가 아니라 사냥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용납되거나 이해될 수 없는 것이지요. 시민법은 당시 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사회적인 규범입니다. 그야말로 문화적인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적합하지 않는 것도 있고,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형이 아들 없이 죽으면 형수와 결혼해야 하는 법은 오늘 우리 상황에 적용될 수 없는 법이지요. 그러나 그 법의 정신과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는 반드시 우리 생활에서 지켜져야 하는 부분입니다. 마지막 의식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완전히 폐지된 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더 이상 번제를 드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몸을 드리신 제사에서 완전하게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성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종종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수가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언어습관이에요. 성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가리키는 그림자였습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다시 일으키리라'하신 것은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키심이었다고 요한은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음식은 깨끗하니 먹어도 되고 어떤 것은 부정하니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 역시 의식법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해야 할 것을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초보적인 방법으로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께서는 이제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다'(마 15:11)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도 환상 가운데 전에는 만질 수도 없었던 부정한 것들을 잡아먹으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천년이 넘게 목숨을 걸고 지켜온 관습을 하루아침에 바꾸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주의자들, 율법주의자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돼지고기 먹으면 안 돼, 오징어도 안 돼, 이렇게 주장하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일견 하나님의 명령에 충실한 것 같아서 많은 사람들이 추종하도록 하기 쉬웠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진리를 크게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의 완성이시며 구약의 성취이신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장애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단에 대해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다시 한번 선포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이 선하게 지으신 모든 음식을 감사함으로 받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함유하고 있는 성분으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고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그 음식은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면에 어떤 음식이든지 감사하지 않고 그것을 지으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음식은 부정한 음식이 될 것입니다.

꼭 음식뿐만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감사함으로 받을 때 버릴 것이 없고 섭섭한 것이 없습니다. 오늘 윤목사님네 이사를 하셨는데, 바닥이 마루로 되어 있더군요. '이거 왜 바닥이 마루야? 애들 넘어지면 다치겠네. 겨울에는 발 시려워서 어떻게 사나?' 이것은 감사가 아니라 불평이지요. 그러면 모든 것이 버릴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카펫 먼지 때문에 아스마에 감기에 애로사항이 많은데, 마루로 되어 있으니 얼마나 깨끗하고 청소하기도 편한지, 아이들이 우유를 엎질러도 no problem! 껌이 붙어도 no problem!'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것을 인정하고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지 않아요?

오늘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의 생활을 한번 돌아보세요. 왜 우리 남편은 한국에 있어서 우리는 이렇게 이산가족이 되어야 하는지, 몇 달만에 겨우 얼굴이나 한번 보고 살아야 하나? 이런 식으로 불평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원망스럽고, 그래서 남편도 싫고 얼마나 인생이 힘들어지겠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보고 싶던 남편이 몇 달만에 오니 얼마나 감사한지, 하나님, 남편 다시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불리한 상황도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잖아요?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과 기쁨을 위해서 주셨습니다. 그것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고, 그래서 여러분의 삶이 은혜 가운데 더 풍성해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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