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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좋은 목사 (딤전 04: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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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목사 (딤전 4:6-11)

저는 처음에 이 본문 말씀을 해석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우선 6절을 보십시오.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는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그러니까 디모데가 형제, 즉 에베소의 교인들을 깨우치면,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꾼이 되어...' 누가 일꾼이 된다는 것입니까? 본문의 문맥상 디모데의 가르침을 받은 형제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꾼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믿음의 말씀과 너, 즉 디모데가 좇는 선한 교훈으로 그들, 형제들도 양육을 받으리라' 이렇게 해석이 되지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의 번역에 의하면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한국말과 영어 사이에서 둘 다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최소한 이 정도는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국문학자라 할지라도 이렇게 해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한국말에는 주어가 생략되는 수가 많습니다. '네가 형제를 깨우치면'이라는 첫문장에는 디모데를 지칭하는 너라는 2인칭 단수 주어와 형제들이라는 3인칭 복수 목적어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어 양육을 받으리라'는 그 다음 문장에는 주어가 생략되어 있지요? 누가 주어인지 나오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언어습관에 의해 우리는 당연히 가르침을 받은 형제들이 뒷문장의 주어라고 짐작해서 문장을 읽고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6절 뒷부분에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라는 부사구가 있기 때문에 양육을 받는 대상이 에베소의 교인들이 되어야 더 부드러운 문장이 되지 않겠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놀라지 마세요. 여기서 그리스도의 선한 일꾼이 되고 믿음의 말씀과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게 되는 것은 에베소의 교인들이 아니라 디모데 자신인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번역본이 빨리 좋은 번역본으로 교체되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아요? 다른 번역본 성경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대가 이런 교훈으로 형제자매를 깨우치면 그대는 믿음의 말씀과 그대가 지금까지 좇아온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아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확인은 하고 싶으시면 영어 성경을 한번 보세요. 영어에서는 주어가 생략될 수가 없으니까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많이 쓰이는 NIV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어요. 'If you point these things out to the brothers, you will be a good minister of Christ Jesus, brought up in the truths of the faith and of the good teaching that you have followed.'

결국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는 말은 좋은 목사가 되는 방법인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목사가 좋은 목사일까요? 우리가 좋은 목사, 성공한 목사라고 평가할 때 사용되는 평가의 범주는 주로 어떤 것입니까? 얼마나 유명한지, 얼마나 참신한 아이디어와 좋은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지 등등...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우리가 생각하는 기준이나 잣대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는 좋은 목사, 훌륭한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는 바울의 말씀에 우리가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 우리 생각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우선 좋은 목사는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꾼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미 1절에서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거짓말을 하고 교회를 잘못 인도하는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한 악한 사람들, 결국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사탄의 도구로 사용되는 사람들과 대비시켜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리스도의 선한 일꾼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꾼이라는 말은 디아코노스입니다. 사역자를 가리키는 다른 단어 하나는 둘로스인데, 둘로스는 종, 노예라는 뜻입니다. 주님께 복종하고 종속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지요. 그에 비해서 디아코노스는 일꾼이에요. 일꾼은 얼마나 쓸모가 있고, 도움이 되는 사람이냐 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쓰시기에 좋은 도구, 믿음직한 일꾼, 이것이 좋은 목사가 지향해야 할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이런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꾼이 될 수 있다고 하는가 하면,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것은 앞에서 말했던 내용이 되겠지요. 교회 안에 잘못된 가르침이 들어오고 사람들이 그것을 따르는 위험한 상황에서, 좋은 목사는 그것을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있나요? 여기 나오는 형제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이 귀한 무리가 미혹케 하는 영의 가르침을 따라가려고 할 때, 그 거짓됨을 폭로하고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깨닫도록 일깨우는 것이 목사의 역할입니다. 목회현장은 사실 전쟁터입니다. 푸른 언덕에서 양떼와 함께 뒹굴며 흰구름과 시원한 바람을 감상하는 목가적인 풍경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악한 짐승이 양떼를 공격해 올지 모르는 긴장 속입니다. 또 그런 공격을 당했을 때 목숨이라도 걸어놓고 싸워야 할 상황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양떼 속에도 양의 가죽을 뒤집어쓴 늑대가 있는데, 이놈을 찾아내서 제거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지요. 목자가 저놈은 양이 아니라 양의 탈을 쓴 늑대다, 하면서 쫓아내려고 하면, 다른 양들이 왜 우리와 똑같은 착한 양을 보고 늑대라고 하느냐면서 집단적으로 반항을 할 수도 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러나 좋은 목사, 훌륭한 목사란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하는 따위의 거짓 가르침,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을 판별해서 제거하고, 형제들이 그것을 깨닫도록 잘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믿음의 말씀과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계속해서 받아야 합니다. 여기서 양육을 받으리라는 동사의 시제는 현재형입니다. 헬라어에서 동사의 시제는 동작의 발생시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작의 형태를 나타냅니다. 현재형이라는 것은 동작이 지금 발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작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의미해요. 그래서 좋은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믿음의 말씀과 선한 교훈으로 끊임없이 쉬지 말고 계속해서 양육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풍부한 지식을 가져야 하는 것은 좋은 목사, 훌륭한 목사에게 가장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자질입니다. 신학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서 다 좋은 목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체계적인 신학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이 목회에 크게 성공한 경우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충분한 연구와 지식이 없이는 강단에서 선포되는 메시지에 힘이 있을 수가 없어요. 강단에서 선포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지, 연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최소한의 공부, 겨우 자격을 얻기 위한 정도의 공부, 신학교 졸업하고 목사가 된 것, 이것으로는 좋은 목사, 훌륭한 목사가 되기 위한 충분한 분량이 될 수 없습니다. 목사가 된 후에도 기를 쓰고 공부를 해야 해요. 제가 한국에 가보니까 저의 동기 목사님들이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정말 깜짝 놀랐어요. 지방에서 목회하는 친구들도 월요일만 되면 다 서울로 학교를 가는 것입니다. 다들 최소한 목회학박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었어요. 제가 아프리카에 가 있는 사이에 다들 그렇게 공부만 하고 있었나 봐요. 물론 박사가 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박사가 될 만큼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공부를 해야 제대로 된 설교도 할 수 있고, 제대로 알고 가르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공부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에요. 세상에 공부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간혹 그런 특별한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저도 공부하는 것 좋아하지 않아요. 어떤 사람이 그러는 것을 제가 들었는데, 학교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가니까 공부를 안해도 되는 것이 그렇게 좋더랍니다. 그야 일하는 데도 공부가 필요하고 일도 배워야 하는 것이지만, 책읽고, 강의듣고, 숙제하고, 시험보고... 하는 일들이 재미있겠어요? 그래서 목사가 이 공부하는 일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물론 설교준비하고 또 가르치는 준비가 다 공부라고 할 수 있겠지만, 좀더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공부가 필요하지 않겠어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저처럼 겨우 신학교나 졸업해서 목사가 된 사람이 하는 설교와, 요한복음을 전공해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하는 설교가 같겠어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 자신도 많은 반성을 하게 되는데, 좀더 많은 시간을 말씀연구하고 공부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 교회를 섬기는 목사로서, 더 좋은 목사, 훌륭한 목사가 되는 길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하여튼 목사가 공부를 한다면 절대로 말리면 안돼요. 공부 안하는 목사는 교회에서 억지로라도 시켜야 됩니다. 그것이 교회를 위한 일이에요. 한국에서 목사님이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공부하러 간다고 하면 좋아하는 교회가 얼마나 됩니까? 그러나 좋은 목사를 원한다면 목사가 싫다고 해도 공부를 시켜야 되지 않겠어요?

좋은 목사는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목사는 그런 편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으려 하지 않습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는 원문에서 저속한 이야기, 늙은 여자들이나 좋아할 꾸며낸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혀 지지받지 못하는 말이지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들, 특히 지식이 없고 의식수준이 낮은 사람들에게 잘 먹힐 수 있는 말들이 목회현장에서도 많이 사용되고 있어요. 그러나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부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능력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다른 것으로 사람의 마음을 붙잡았을 때 교회는 연약한 교회, 휘청거리는 교회가 될 수밖에 없지요.

경건에 이르는 연습, 이것 역시 훌륭한 목사를 만드는 선생입니다. 경건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몸에 배고 습관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운동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운동을 통 안 하다가 한번 하고 나면 온 몸이 쑤시고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요. 며칠 고생하지요? 그러나 날마다 운동을 해 보세요. 우리는 운동을 많이 안하고 살지만 여기 키위들 얼마나 운동을 많이 합니까? 아침에 새벽기도하러 갈 때 사람들은 길에서 뛰어요. 새벽기도 마치고 돌아올 때도 보면 사람들이 길에서 뜁니다. 그렇게 운동을 늘 하면 몸이 건강하고 또 운동하는 것이 힘들지 않습니다. 경건한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통 기도생활 안하다가 어쩌다 한번 기도하려고 하면 잘 되던가요? 습관적으로 성경을 읽는 사람은 성경 읽는 것이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 그러나 습관이 안된 사람은 작심삼일이지요? 하루 달리기했다고 몸이 튼튼해집니까? 날마다 해야 효과가 있지요. 한번 기도했다고 우리 삶이 거룩하게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하고 이것이 몸에 배었을 때 거룩한 형상이 우리 몸에서 나타나게 되고, 그래서 금생과 내생에서 약속된 하나님의 상급을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꼭 목사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다 이와 같이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해야겠지요. 말 한마디를 해도 경건에 합당한지를 먼저 생각하고, 생각을 해도 경건한 생각을 하기 위해 애쓰고, 내가 하는 이 행동이 경건과 어떤 상관이 있는지 생각하면서 행동을 한다면, 이것이 우리의 습관이 되어서 우리의 말과 행실이 늘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경건한 모습이 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이제부터는 키위들 달리기하는 것 볼 때마다, '그래, 너는 약간의 유익이 있는 육체의 연습을 하는구나. 나는 범사에 유익한 경건의 연습을 한다.' 하는 생각을 하면서 경건에 이르는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또 좋은 목사는 열심히 일하는 목사입니다. 수고하고 진력한다고 했지요? 여기서 수고한다는 단어는 녹초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인도의 선교사였던 헨리 마틴은 'Now let me burn out for God!'이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녹초가 되게 해 주십시오.' 좋은 목사에게 요구되는 이런 희생과 열심은 그 하는 일이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영원한 과업을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수고하고 고생했다고 당장 보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한 목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처럼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목사님들처럼 열심히 많은 분들은 찾아보기 어려울 거예요. 그래서 요즘에는 오히려 지치지 않고 장기적인 사역을 하기 위해서 무리하지 않고 쉬어가면서 사역해야 한다는 충고가 필요할 정도입니다만, 어쨌든 대충 때우는 것이 아니라 성심껏 열심히 일하는 목사가 좋은 목사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모든 것을 교인들에게 명하고 가르치라고 말합니다. 좋은 목사란 자기만 잘 믿고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이 모든 것, 즉 좋은 목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일들을 또한 성도들에게 가르쳐서 그들도 역시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해야 좋은 목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여기서 우리가 무슨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목사가 따로 있고 평신도는 달라도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목사는 경건해야 되고, 평신도는 좀 경건하지 못해도 되는 것이 아니에요. 목사든 평신도이든 하나님 앞에서 좋은 그리스도인, 훌륭한 성도가 되는 데는 똑같은 것입니다. 목사와 평신도가 함께 그런 사람들이 되어가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여러분은 좋은 목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저 역시 좋은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좋은 목사와 좋은 교인들로 이루어진 좋은 교회가 되도록 함께 애쓰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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