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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적 권위 (딤전 04: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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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권위 (딤전 4:12-16)

바울은 지금 디모데에게 좋은 목사, 탁월한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좋은 목사는 여러 가지 자격과 성품을 갖춘 다음, 그것으로 교회를 가르치고 인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목사가 아무리 좋은 내용으로 가르쳐도 교인들이 순종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지 않겠어요? 그래서 목사에게 또 하나 필요한 것이 권위입니다.

권위란 남을 지휘, 감독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권위가 있는 사람이 하는 것과 없는 사람이 하는 것은 매우 다르지요. 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불량학생에게 지나가는 아저씨가 학생들이 그러면 안 된다고 훈계하면 학생들이 말을 안 들어요. 오히려 훈계하던 아저씨가 봉변을 당하는 수도 있습니다. 권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아이들이라도 학교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생활지도 선생님에게 들키면 두려워하고 선생님 말에 복종합니다.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권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권위는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목사는 권위를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목사에게 권위가 없으면 목사로서의 사역을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습니다. 목사는 권위가 있어야 하는 직책입니다. 목사가 하는 일이 가르치는 일이고 명령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권위가 없으면 수업이 진행될 수 있습니까? 군대에서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명령을 내리는데 권위가 없으면 그 명령에 힘이 있겠어요? 명령이 수행될 수 있겠습니까?

어떤 목사님이 그러시더군요. 사랑이 많고 성도들을 늘 아끼는 목사와, 준엄하고 어려운 목사, 둘 중에 어떤 목사가 더 좋은 목사일 수 있느냐? 사랑이 많고 성도들과 친구와 같은 목사가 인기도 얻고 더 좋은 목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지만, 둘 중에 선택할 수 있다면 준엄하고 어려운 목사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햐면 그것이 목사의 직분을 감당하는 데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목사가 사랑이 많은 목사가 되거나 권위를 가진 목사가 되는 것은 개인의 성향과 기호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권위라는 것은 조금만 잘못 이해하거나 잘못 사용하면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권위라는 것이 양쪽의 평등을 이미 넘어선 상태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또 이 권위가 인간의 죄악된 본성과 결탁해서 인간을 파괴하고 불행을 초래하는 데까지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권위를 가진 편, 또는 권위를 가지려고 하는 편과 그 권위에 복종하도록 요청되는 편 사이에는 늘 긴장이 있게 마련이지요. 그리고 그 긴장이 깨뜨려졌을 때, 즉 권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거나 권위에 대한 반발이 정도를 넘었을 때, 양자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게 됩니다.

저 자신은 이 권위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서 목사가 권위를 가져야 된다는 것이 상당히 어렵고 부담스럽게 생각됩니다. 제가 더 젊었을 때 목회의 길로 나서지 않았던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의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고 하지만, 우리 한국의 문화적 상황에서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20대 후반에 신학교를 다니면서 저는 최소한 나이 40은 되어야 목회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이제 40이 돼서 생각해 보니 한 50은 돼야 교회 안에서 성도들을 제대로 지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권위가 꼭 나이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나이 어린 사람이 권위를 갖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새파란 젊은 친구가 소위 계급장을 달고 오면 산전수전 다 겪은 나이먹은 상사가 차렷 자세로 경례를 붙이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권위에 대한 진정한 복종이 포함되어 있지 않아요. 나이의 장벽이 이처럼 큰 것입니다. 디모데가 바울을 만난 것은 20대 초반의 일입니다. 젊은 친구가 믿음이 좋고 장래가 촉망되는 것을 보고 바울은 디모데를 전격적으로 발탁해서 그의 비서를 삼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1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바울과 함께 15년을 같이 동행하고 배우며 사역을 해 온 디모데가 그동안 얼마나 크게 성장했겠어요? 더욱이 바울은 디모데를 아들이라고까지 불렀지 않습니까? 어디에 내놓아도 믿음직하고 안심할 수 있는 거목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몇 안되는 지도자들의 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나이가 아직 30대 후반이었어요. 아무리 뛰어난 지식과 탁월한 지도력을 가지고 있어도 나이의 장벽이 그의 권위를 위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그리스 문화권에서도 나이가 40은 넘어야 어른 취급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맨 처음 사울이 스데반의 죽음 현장에 나타났을 때 그는 청년이라고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가 20대가 아니었어요. 30대까지는 젊은이로 여겨지는 것이 당시 문화였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 디모데가 나이 많은 터주대감들이 쟁쟁하게 버티고 있는 에베소 교회에 와서 교회를 지도한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되고도 남는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권위를 가질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권위를 만들어내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나이도 그 중의 하나일 수 있고, 권력이 권위를 만들어냅니다. 돈도 권위를 만듭니다. 지식도 권위의 원천이 될 수 있지요. 그러나 디모데가 교회 안에서 가져야 할 권위는 권력이나 돈으로 인한 권위가 될 수 없습니다. 권력에서 나오는 권위는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에게 필요합니다. 정치가가 지식으로 인한 권위를 가지고 나라를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또 지식의 권위는 전혀 없는 사람이 돈으로 인한 권위를 갖고 있다고 해서 대학의 교수가 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교회의 지도자인 목사가 가져야 할 권위는 다른 권위가 아니라 영적 권위인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충고하는 권위의 비결은 말고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는 것입니다. 모범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난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또한 모범이 된다는 것은 가르침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바담 풍' 하는 선생은 '바람 풍' 하는 제자를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바람 풍'을 할 줄 안다면 '바담 풍' 하는 선생이 권위를 가질 수 없지요.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11:1). 얼마나 권위가 있는 말입니까? 바울이 그렇게 자신있고 권위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삶 자체가 고린도 교인들이 마땅히 본받아야 할 모범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뿐 아니라 바울은 여러 차례 이렇게 말합니다. 빌립보서에서도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빌 3:17)고 말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 1:5)고 했어요. 말로만 떠든 것이 아니라 실제 삶의 행위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했다'(살후 3:7)고 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권위의 한 가지 원천이었습니다.

바울은 특별히 디모데에게 모범이 되어야 할 다섯 가지 분야를 말하고 있습니다. 말에서 모범을 보여야 하고, 선한 행실로도 모범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목사가 사랑하지 못하면서 교인들에게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힘이 없습니다. 목사가 좋은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교인들이 목사의 믿음을 본받아 좋은 믿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정절이 언급된 것을 보면, 당시 교회 안에서의 성적 문란함이 심각한 상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감독의 자격에서도 이것이 언급되었었지요?

물론 여기 언급된 다섯 가지 분야에서만 모범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여기 나온 것들은 성도의 모든 삶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목사가 모든 면에서 모범을 보일 때 권위를 가지고 교회를 가르치고 섬길 수 있습니다. 이 권위가 건강한 권위이고 교회에서 필요한 권위입니다. 우리가 흔히 권위를 가진 분들을 카리스마를 가졌다고 말합니다. 목사님들도 그런 분들이 많이 계세요. 그러나 그 카리스마가 삶에서의 모범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강한 성품이나 개인적인 능력의 탁월함에 기초한 것이라면 교회 안의 영적 권위로서 합당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 즉 목사가 세상적인 평가의 기준으로 볼 때는 권위를 갖기 어려운 모습을 갖고 있을 수도 많습니다. 디모데의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나이가 어리다는 것은 권위와는 어울리지 않는 상황입니다. 나이뿐이겠어요? 목사가 말을 잘해야 할 터인데 뛰어난 웅변가들에 비하면 형편없이 부족할 수도 있고, 심지어는 보통 사람보다 더 말에 서투를 수도 있습니다. 목사의 외모가 준수하면 나쁠 것은 없겠지만, 모든 목사가 다 잘생겼을 수는 없지요. 목사가 돈이 많아서 풍족하게 살면 남들 보기에도 좋지만, 목사 사는 꼴이 형편없을 때는 권위가 서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랜저 타는 장로 앞에서 쏘나타 타는 목사의 권위가 서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나마 쏘나타는 나을지 몰라요. 만약 목사의 형편이 티코나 타야 하는 것이라면 정말 권위를 갖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단호히 말하는 것을 보세요. '너의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 '너의 티코 타는 것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 이거예요. 영적인 권위는 나이나 타고다니는 자동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가 어릴지라도 교회에서는 목사가 권위를 가져야 하고, 비록 사회적인 위치나 신분은 보잘것없을지라도 교회에서는 목사의 권위가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교회 안의 권위를 하나님의 위임에서 찾습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권위에 근거해서 목사가 권위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대통령의 특사는 대통령의 권위로 말합니다. 어명을 전달하는 사람 앞에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어명을 전달하는 사람의 권위 때문이 아니라 왕의 권위 때문이지요. 목사의 권위도 하나님의 권위에 근거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맡기신 권위를 우리가 어떻게 분별할 수 있겠어요? 목사라는 신분 자체가 하나님의 권위를 보증하는 것입니까? 만약 지금도 하나님이 직접 목사를 임명하시고 안수하셔서 세우신다면 목사 증명서가 곧 하나님의 권위로 받아들여져야 하겠지요. 그러나 인간의 실수와 판단착오가 개입될 수 있는 여러 제도와 절차를 통해서 하나님이 목사를 세우시는 우리의 현실 가운데서는 참으로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목사인지, 아니면 거짓된 권위, 억지스러운 권위를 가진 목사인지, 목사 자신이 스스로 증명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충고하는 것처럼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는 일입니다.

막말로 해서 목사를 우습게 아는 교회, 즉 목사의 권위가 세워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은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 누구 잘못인가의 문제 이전에 모두에게 커다란 불행입니다. 목사가 권위를 가지고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할 때, 목사 자신과 목사에게서 배우고 듣는 사람들의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대는 권위에 대한 도전의 시대,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검증되지 않은 권위는 현대인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검증된 권위라 할지라도 할 수만 있으면 그 권위를 전복시키려는 운동성과 방향성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교회 안의 권위는 분명히 세워져야 하고, 권위가 제대로 작동될 때 교회의 유익과 성도의 구원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권위가 남용되거나 우리의 죄악된 본성과 결탁해서는 안 될 것이고, 또한 그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이 검증되어야 하겠지요. 저는 우리 교회가 교회 안의 지도력에 대한 불신이나 목사의 권위에 대한 반항,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목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누가 목사이든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교회의 자폭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목사의 나이가 어릴지라도, 목사의 모양이 누추할지라도 그것을 업신여기지 않고, 목사의 권위는 하나님이 맡기신 영적 권위임을 인정하고 거기에 순종하는 교회, 이런 교회를 우리 함께 이루어가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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