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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가족 (딤전 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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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집이 대가족이 되었습니다. 다섯 식구도 적은 수가 아닌데, 거기에 두 명이 늘었으니 일곱 식구가 된 것입니다. 아이들만 다섯이니 소규모 유치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개학을 해서 아이들이 학교에 가게 되면 좀 낫겠지만, 요즘은 매일 집에 있으니 집안에 조용한 순간이 없어요. 한번 집안이 어질어지면 발딛을 틈도 없을 지경입니다. 잠깐 사이에 사건이 터져서 울어대는 놈이 나옵니다. 옛날 우리 부모님들은 많은 아이들을 어떻게 키우셨는지 새삼 그 노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요.

갑자기 두 아이들을 맡게 되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이 아이들을 어떻게 우리 아이들과 똑같이 사랑하며 키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똑같이 대해야 할 것이고, 또 어떤 면에서는 똑같이 할 수 없는 경우도 있겠지요. 하여튼 이 아이들이 우리 집에 머물면서 나의 보호와 책임 아래 있는 동안은 우리 아이들처럼 키워야 하는 것이 저의 의무입니다. 참 어려운 일이지요.

그런데 오늘 아침에 율리가 저에게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목사님, 우리가 이제 다 같은 식구예요?' '그렇지, 같이 살면 한 식구지.' 사실 식구(食口)라는 말은 함께 먹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같이 먹고 자면 한 식구지요. 그랬더니 율리가 '우리가 같은 패밀리예요?'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가족이나 친척은 또 아니잖아요? 그래서 '글쎄, 가족은 아니지만...' 하면서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어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이 아이가 하는 말이, '아빠가 그러시는대요,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래요.' 하는 것입니다. 이 녀석이 나보다 한 수 위에 있는 거예요. 우리가 어차피 한 집에 살게 되었는데, 같이 살기 위해서는 가족의 개념을 붙잡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나는 같이 먹고 자는 식구의 개념으로 우리의 공동체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했는데, 이 녀석은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확실한 패밀리의 개념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저 같이 먹고 자며 함께 사는 것으로서 되는 식구가 아니라 마땅히 같이 살아야 할 한 가족으로서 함께 산다는 개념이 정립되어야 우리가 함께 사는 것이 편하지 않겠어요? 저도 이 아이들을 우리 아이들과 같이 사랑하고 보살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애들한테 배운다더니 정말 맞는 말입니다.

한 가족이 된다는 것은 이처럼 매우 중요한 변화를 동반합니다. 가족은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개념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말이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이지요. 무엇보다도 가족이 소중한 것입니다. 가족보다 가까운 사람이 없지요. 그래서 율리가 우리의 한 가족으로서 함께 지낸다는 것은 그만큼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율리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됩니다. 특히 하나의 지역교회라는 단일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무리는 최소 단위의 가족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 저 서울의 사랑의교회 교인들이 다 같은 하나님의 가족이지만, 우리 주사랑교회 자체로 최소단위의 한 가족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바울이 교회를 섬기고 다스리는 디모데에게 해 주는 충고에서도 이 개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하는 것은 교회가 가족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충고가 아닙니다. 젊은 목사 디모데에게 교회 안에서 교인들을 책망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인들을 책망하는 것은 목사의 직무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인 것입니다. 물론 책망을 한다는 것은 잘못을 했다는 상황을 전제로 하지요. 그래서 잘못을 했는데도 책망하지 않는 것은 목사의 직무유기가 되는 것입니다. 디모데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 디모데후서에서도 바울은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고 충고를 합니다. 목사의 책망은 교회를 바로 세우고 성도들의 신앙을 올바로 지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책망한다는 것이 참 쉽지 않아요. 여러분 중에서 목사가 책망하면 그대로 순종하고 받아들일 분이 얼마나 계세요? 그거야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목사의 책망이 이치에 맞지도 않고 또 책망이라기보다 인신공격이 된다거나 하는 경우라면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지금 그런 구체적인 케이스를 염두에 두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책망이란 교인이 잘못을 했을 때 교회의 지도자로서 목사가 엄중하게 그 잘못을 지적하고 꾸짖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합당한 책망이라 할지라도 책망을 받는 당사자는 기분이 나쁘거나 그 책망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있다는 말이지요. '제가 뭔데 나한테 이러는 거야? 나이도 젊은것이 목사라고 못하는 소리가 없어.' 이런 식으로 나옵니다. 결국 지난번에 살펴보았던 목사의 권위가 아주 짓밟힘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가 책망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책망을 했다가는 그 책망에 순종하고 잘못을 고치거나 회개하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책망에 반발하고 그래서 교회의 평화와 질서가 파괴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수가 많아요. 뭐 그렇게까지 문제가 커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책망을 받은 사람이 교회를 떠나기 십상입니다. 그러니 어떤 간 큰 목사가 함부로 책망을 하겠어요?

교회 정치에서 보자면 책망도 시벌의 일종인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교인들에 대한 시벌을 함부로 못하고 있습니다.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 아닙니까? 목사보다 나이가 많다고 책망 못하고, 나이가 어려서 쉽게 상처받을까 봐 책망 못하고, 교회의 중직이라서 책망 못하고, 믿음이 없다고 책망 못하고, 반발할까 봐 책망 못하고, 교회 안나올까 봐 책망 못하고, 도대체 그럼 누구를 책망할 수 있습니까? 책망할 일이 없어서 책망할 필요가 없다면 그것보다 좋을 일이 없겠지만, 책망할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책망이 시행되지 않는 교회라면 병이 든 교회입니다. 병이 들어도 중병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죽어가는 사람이 의사에게 아프니까 수술하지 말라고 하는 것과 같은 거지요. 그렇게 죽어가는 사람을 내버려두는 것은 수술을 거부하는 당사자도 잘못이고 그렇다고 수술하기를 포기하는 의사도 잘못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책망할 일이 안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책망할 일이 있을 때 책망이 시행되는 교회, 그런 건강한 교회를 여러분과 제가 함께 만들어가야 합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책망을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책망의 기술이라고 할까요? 책망도 잘해야 하는 것입니다. 괜히 책망 잘못 했다가 안 하느니만 못하는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수해 주는 책망의 기술이 여기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기술,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아비에게 하듯 하라는 것입니다. 젊은 목사가 책망한다고 나이 많은 교인을 마치 아이들 꾸짖듯 책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요. 이러한 책망이야말로 순종보다는 반발을 초래할 수 있는 책망입니다. 어른이라고 해서 잘못하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까? 그러나 책망으로 어른의 위신과 체면을 깎아 내려서는 안됩니다. 책망은 전쟁이 아닌 것입니다. 아주 사람을 매장시켜서 다시는 재기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에요.

평양의 산정현교회에서 조만식 장로님이 예배시간에 조금 늦었습니다. 장로가 예배시간에 늦었으니 염치가 없지요. 그래서 신발을 벗어들고 살금살금 자리로 걸어 들어가는데 주기철 목사님의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장로님, 거기 서 계세요.' 가만히 들어가려다가 사변을 만난 것입니다. 교인들이 다 바라보는 앞에서 늙은 이 장로님이 얼마나 부끄럽겠어요? 이것도 하나의 책망이라면 책망인데, 그렇게 책망을 하시는 주기철 목사님이나, 교인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 책망에 순종하는 조만식 장로님이나 다들 대단한 분들이지요. 그렇지만 책망의 좋은 표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나이 많은 어른들에 대해서는 마치 아버지에게 하듯 하는 것이 책망의 기술입니다. 아버지가 잘못하셨다고 그 아버지 앞에서 안면몰수하고 꾸짖을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지요. 꾸짖지 말고 권하라. 여기서 권한다는 말은 간곡히 타이르거나 애원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권하기만 해도 충분히 알아듣고 잘못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꼭 나이가 많은 사람뿐만 아니라 자기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경우에도 효과적인 방법이겠지요? 느부갓네살 왕의 잘못을 지적하는 다니엘은 '그런즉 왕이여 나의 간하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단 4:27) 이렇게 말합니다. 악한 왕들 앞에서 많은 선지자들이 왕을 책망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 선지자들은 책망의 기술이 부족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연장자를 아버지처럼 대하는 것은 목사가 책망할 때만 필요한 자세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이것은 늙은 여자를 어머니 대하듯 해야 하는 것과 똑같은 원리입니다. 가족 내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지금 교회 안의 질서를 가정의 질서와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가 나이가 많은 분들을 어머니와 아버지처럼 받들고 모시는 관계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 안에 부모가 있다면 또한 형제와 자매가 있습니다. 아랫사람을 책망할 때는 마치 동생을 훈계하듯이 사랑과 보살핌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책망한다고 해서 무섭고 엄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책망에 사랑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 그것은 비난이 되고 맙니다. 동생이 한번 잘못했다고 나와 원수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잘못을 했어도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동생임에 틀림없습니다. 교회에서 교인이 잘못했다고 목사가 교인을 교회에서 쫓아내야 하는 것은 아니지요. 책망은 결코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책망을 당하는 사람도 목사의 책망을 받을 때, '목사가 나에게 싸움을 걸어오는구나' 이렇게 생각을 해서는 안되겠지요?

젊은 여자를 대할 때는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는 것이 또한 책망의 중요한 기술입니다. 이것은 책망의 기술을 떠나서 목회사역 전반에 해당되는 기술입니다. 많은 경우에 이 기술을 터득하지 못해서 실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사가 자신을 지키는 일입니다. 그러나 자매처럼, 가족처럼 깨끗함으로 대한다면 자신도 지킬 수 있고, 교회의 순결도 지킬 수 있습니다. 참으로 한 가족이 되었을 때 항간에 떠도는 스캔들이나 부끄러운 사건들이 교회 안에서 발생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 안에서 모든 사람이 가족관계를 이루는 것이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을 갖게 되는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율리가 우리 집에 와서 살면서 한 가족이라는 개념을 가지려고 했던 것처럼, 우리가 한 가족임을 인식할 때 교회 안의 인간관계가 올바로 정립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친한 사람끼리 같은 교회에 모였다는 것과 한 가족이 되었다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그저 남남끼리 예수 믿는 이유 때문에 같은 교회에 다니면서 만난다는 것과 서로를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고 나누는 가족이 되었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교회 안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가족처럼 친밀하고 사랑하며 같은 정신으로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일이지요. 우리 교회 안에 바로 이런 정신이 우리의 모든 관계를 지배해야 합니다. 목사가 교인들을 책망할 때도 이런 가족의 개념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함께 모여 회의를 할 때도 가족회의를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정같은 교회라는 표어가 있는 것입니다. 정말 가정같은 교회, 비록 책망이 있을지라도 가족의 관계에서 소화가 되고, 비록 의견차이가 있을지라도 가족의 차원에서 하나됨을 이루어가는 교회, 하나님이 보실 때 기뻐 받으실 만한 그런 교회를 우리가 힘을 모아 이루어가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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