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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장로 존경법 (딤전 05: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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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장로라는 단어는 평신도 가운데서 교인들의 투표를 거쳐 일정한 절차를 밟은 후 장립을 받아 교회를 다스리는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교인들의 대표지요. 우리 교회의 경우에는 황장로님이 해당되겠습니다. 그러나 장로라는 단어 자체는 그 외에 여러 가지 의미와 범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장로교 정치제도에 의하면 교회의 장로는 강도와 치리를 겸한 장로와 치리만 하는 장로의 두 종류가 있습니다. 강도와 치리를 겸한 장로는 목사이고, 치리만 하는 장로는 우리가 보통 말하는 장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로교 정치에 의하면 목사 역시 장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장로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다른 형태의 정치제도를 가지고 있는 교회들, 감독정치나 회중정치를 근간으로 하는 교회들은 이 장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제가 다른 교회들의 입장은 잘 모르겠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장로의 개념은 또 우리와 많이 다를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장로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도 우리와 입장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것 가지고 내가 옳고 그들은 틀렸다고 주장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물론 그들의 입장이 옳고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여러 가지 근거와 증거들이 있기는 하지만, 2000년 전에 있었던 교회의 정치제도를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교회의 제도나 직원은 아직 확정된 것이 아니라 발달해 가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같은 표현이나 증거를 이렇게 볼 수도 있고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피 튀기는 싸움을 하는 사람들은 한심한 사림들입니다. 정 그렇게 궁금하면 조금만 기다리면 돼요. 천국에 가서 바울 사도에게 물어보면 되잖아요? 다만 그때까지는 우리에게 주어진 증거들에 근거해서 내 믿음과 상식으로 판단해서 시행하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장로교에 있는 사람은 장로정치에 따라 교회생활을 하면 잘 하는 것입니다. 감리교회에 나가는 사람은 감독정치에 따른 교회의 모든 제도를 수용하고 따르면 아주 잘 하는 것입니다. 또 사람마다 개인적인 기질이나 선호가 다르기 때문에 교회의 정치제도도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이 참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도대체 대표 몇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은 침례교회나 Brethren Church에 나가서 자기에게 맞는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교회를 섬기면 그것도 잘 하는 일입니다. 문제는 제도 자체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제도라는 진리를 보호하고 시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입고 있는 옷과 같은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몸이지 옷이 아니잖아요? 야구 선수한테 태권도 선수의 옷

을 입히면 경기를 제대로 할 수 있겠어요? 또 수영복을 입고 부채춤을 출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제도라는 것은 필요에 맞도록 개발되고 합리적으로 시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제도가 생겨날 수밖에 없지요. 그것을 서로 인정하지 못하고 싸운다면, 부채춤 추는 사람이 수영 선수한테 경망스러운 옷을 입었다고 비난하는 꼴입니다.

자, 그럼 본문으로 돌아가서 장로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장로는 물론 우리 장로교회에서 교인들의 투표로 선출되는 치리장로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약 성경에서 교회의 직원으로 몇 가지가 언급되는데, 장로와 감독, 목사, 이 세 가지는 서로 교차적으로, 또는 혼용되어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20장에서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밀레도에서 사람을 보내어 근처의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불러옵니다(17절). 그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서지요. 그 장로들에게 말하는 중에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이 저들 가운데서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28절). 장로들을 모아놓고 그들을 감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결국 신약성경에 나오는 장로나 감독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또는 그 사역과 임무의 성격에 따라 같은 직책이라도 다르게 표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감독이라는 직책이 따로 있었고 장로가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직책의 구별은 한두 세기가 지난 후에야 교회의 제도가 발달하고 정착되면서 생겨났을 뿐입니다. 목사라는 말은 양떼를 돌본다는 측면이 강조될 때 사용되었고, 지도자로서의 권위와 기능을 말할 때는 감독이라는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장로는 어른이라는 말입니다. 교회 안의 어른은 나이가 많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성숙함으로 교인들의 모범이 되고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목사나 감독이 당연히 장로도 되어야지요.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런 장로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장로는 교회 안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기지요? 장로가 우리가 말하는 당회원 장로들이 아니라 목사나 감독을 의미하는 장로라면, 그럼 디모데는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로서 디모데 역시 장로 아니겠어요? 사도 요한도 자신을 장로라고 불렀고, 베드로 역시 자신을 장로라고 했습니다. 기능적인 면에서 디모데는 에베소 교회의 장로입니다. 그러면 디모데는 지금으로 말하면 담임목사이고, 다른 장로들은 부목사인가요? 우리는 당시의 상황을 오늘 우리의 상황의 눈금으로 측량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굳이 그런 식으로 이해를 하려고 하다 보면 당시의 현장을 올바로 보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디모데가 이 장로들 위에 권위를 행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디모데가 없어도 에베소 교회는 이 장로들에 의해 치리되고 양육될 것입니다. 그들이 모두 목사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디모데는 그를 파송한 바울에 의해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지요. 디모데가 사도는 아니지만 사도인 바울에 의해 파송되었기 때문에 사도에 준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마치 자신이 교회를 돌보는 것처럼 디모데를 대신 보냈던 것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교회를 위해 수고해야 할 장로들은 존중되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하라고 했으니까, 모든 장로들을 존경하되 잘 다스리는 장로는 배나 존경하라는 뜻인가요? 그렇게 해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배나 존경하라는 것은 많이 존경하라는 것이지 꼭 두 배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잘 다스리는 것은 모든 장로에게 기대되는 일이구요. 장로에게 기대되는 일은 잘 다스리는 것이고, 그래서 장로는 배나 존경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 존경하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지금 우리 장로교회 제도에서처럼 다스리는 장로와 가르치는 것을 겸한 장로의 구별이 있었다는 뜻일까요? 당시 정황으로 보아 장로의 구별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장로란 기본적으로 다스리는 임무와 가르치는 임무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장로라고 해도 개인적인 차이는 있을 수 있지 않아요? 저나 윤목사님이나 똑같은 목사지만, 윤목사님은 가르치는 데 소질이 있고, 나는 행정적인 일에 관심이 더 많다, 이런 식으로 차이가 있지 않겠어요? 그리고 같은 장로들 가운데서도 당시 이단에 대처하고 교리를 올바로 가르치는 일에 탁월한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의 역할이 두드러지지 않겠어요? 모든 교회에서 말씀과 가르침, 즉 설교하고 교리를 가르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이제 새로 세워져서 온갖 박해와 이단의 침투에 대처해야 할 교회로서는 잘 가르치는 장로들의 역할이 더 절실하게 요청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들이 매우 존경을 받아야 하는데, 어떤 식으로 존경을 해야 할 것이냐? 물론 여러 가지 얘기를 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그렇게 수고하는 장로들에게 합당한 대우를 하라는 것입니다. 당시 교회에 생계를 전적으로 교회에 의존해야 하는 풀타임 사역자의 개념이 온전히 정립되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바울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이것을 정립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바울은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 6:6)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지요. 권위를 가지고 교회를 다스리고, 또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애써 가르치는 장로들에게 교회에서 충분한 생활비를 주지 않아 그들로 빈궁에 처하게 만들면서 그들을 존경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교회를 위해 수고하는데 합당한 보수를 지급하지 않는다면 매우 악한 일입니다. 성경은 마땅히 주어야 할 품삯을 제대로 주지 않는 행위에 대해서 무척 분노하고 있습니다. 저녁에 일 끝나고 주어야 할 품삯을 아침까지 주지 않았을 때, 그 노동자가 빈궁한 중에 밤새 그 돈을 사모하게 되고, 이것은 여호와께 호소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지요(신 24:15). 하물며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일한 사람에게 품삯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는다면 뭐가 되겠어요? 바울은 장로들에게 마땅히 지불해야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더 많이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배나 존경하라는 말이 곧바로 품삯을 지불하는 주제로 연결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 아닙니까?

목사는 교회에서 주는 품삯을 받는 사람이라는 데 대해 신경질적으로 거부반응을 보이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목자와 삯꾼이라는 대비 때문입니다. 삯이라는 말 자체는 부정적인 의미가 없는데, 특히 우리말에서 삯꾼이라는 말은 비어가 되어가지고 매우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목사 욕할 때 삯꾼 목사라고 많이들 하지 않아요? 또 목사가 그런 말 듣는 것처럼 불쾌한 일도 없을 거예요. 삯이라는 말은 일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의미합니다. 목자가 주인이 아닌 이상, 삯을 받는다는 것은 목자나 삯꾼이나 마찬가지예요. 삯을 받는다는 것이 목자와 삯꾼의 차이를 만드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많은 분들이 목사가 일한 대가로 삯을 받는다는 데 동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일은 돈을 받을 일이 아닌 거룩한 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는 직업이 아니라고 하지요. 제가 한번은 한국의 어느 교회에서 설교하면서 앞자리에 앉아 있는 장로님 한분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목사가 직업입니까? 아닙니까?' '잘 모르겠는데요.' 모르겠다는 것은 직업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제가 또 물었습니다. '장로는 직업입니까? 아닙니까?' '아닙니다.' 분명히 대답을 하시더군요. 그래서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목사는 직업입니까? 아닙니까?'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 '장로님은 속셈학원 원장이 직업이고, 교회에서 장로는 직업이 아닌 것이 분명한데, 목사님은 목사 말고 다른 직업이 없지 않습니까? 목사가 직업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그 장로님 대답이 걸작입니다. '성직자입니다.' 성직자라는 말은 무슨 뜻인데요? 거룩한 직업을 가진 사람 아닌가요?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 '목사가 성직자이면 여러분은 모두 속직자입니까?'

목사는 소명이지 직업이 아니라고 항변하는 사람들 많지요? 그러나 왜 소명과 직업을 분리해야 합니까? 목사라는 직업으로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것이라고 해야 맞는 말 아닌가요? 목사가 직업이 아니라면 왜 교회에서 월급을 줍니까? 여기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말하기를 그것은 월급이 아니라 사례라고 합니다. 삯이 아니다 이거지요. 우리는 성과 속을 너무 구별하는 결벽증에 걸려 있습니다. 아무리 성직자라 하더라도 그야말로 삯을 추구하는 사람이면 성직자라 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청소부 직업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 직업으로 부르셨다는 소명의식으로 그 일을 행한다면 그는 거룩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거리를 깨끗이 청소함으로써 이 사회를 섬기고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어 하나님을 섬기는 귀한 일로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하고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직업윤리입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의 위대한 발견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성직과 속직을 나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더욱이 바울은 여기서 분명히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고전 9:9-10). 목사가 제일 듣기 싫은 말 가운데 하나는 돈 밝히는 목사라는 말일 것입니다. 글쎄, 그런 말에 전혀 개의치 않는 분들도 있기는 있습디다만, 저 같으면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이런 본문의 말씀으로는 설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설교하고 싶지 않아요. 어떤 목사님 말씀처럼 이 본문은 그냥 뛰어 넘어가고 싶은 부분입니다. 바울을 보세요. 얼마나 그런 소리 듣기가 싫었으면 자기 손으로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돌보았을까요? 그랬기 때문에 바울은 조금도 꿀림없이 일꾼이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할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의 모범이 모두에게 적용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꼭 효과적인 것도 아니지요.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 전무해야 제대로 교회를 섬길 수 있고, 그래서 풀타임 사역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다른 일로 생계를 이을 수 없는 목사는 교회에서 돈 얘기를 꺼내지도 말아야 합니까? 돈 얘기를 꺼내면 돈 밝히는 목사가 되나요? 이것은 목사가 자기 몫을 챙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당연히 돈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잖아요? 여기서 우리는 모두 강박관념에서 좀 자유로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돈에 관련된 부정적인 개념과 사고의 결벽증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가운데서 고안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속하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마침내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낸 것이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은혜를 부어주시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을 사탄의 지배에서 구해서 빛 가운데로 인도해 내는 일을 하며, 불의한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이런 일들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많은 부분을 지도자들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지도자, 훌륭하고 능력있는 지도자를 소유하고 만들어내는 일이야말로 온 교회가 총력을 기울여야 할 일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 좋은 지도자를 우연히 만나거나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두 희생하고 노력하며 만들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하나님께서 좋은 지도자를 보내주시기를 위해서 애써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좋은 지도자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노력에 함께 참여하여, 교회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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