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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과 죄의 달리기 시합 (딤전 05: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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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갑자기 디모데의 건강문제를 언급하면서 포도주를 마시라고 말합니다. 지금 바울은 장로, 즉 교회의 지도자 세우는 문제를 말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다가 왜 느닷없이 포도주 이야기가 나오는 것일까요? 장로와 포도주가 무슨 상관입니까? 바울의 서신들에서 술은 상당히 부정적인 용법으로 사용됩니다. 특별히 술과 성령이 대응적인 입장으로 여러 번 묘사되지요. 술에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라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술 취하는 것은 방탕한 것이며, 규모있는 성령의 열매맺는 삶과 아주 대조적입니다. 즉 술 취하는 것과 성령충만함을 입는 것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는 당연히 술을 멀리하는 것이 요청된다는 것입니다. 술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고, 술을 마시는 행위 자체가 금지되는 것은 아니지만, 술로 인해서 유발되는 2차적인 현상들이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삶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술이 그 원인 제공자로서 규제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독을 세울 때도 그 자격요건으로 술을 즐기지 않는 사람, 집사도 술에 인박이지 않은 사람일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에게는 술을 마시지 말도록 하면서, 여기서 갑자기 디모데에게는 술을 마셔도 된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잘못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 가르침이 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지금이야 술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요.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소주, 또 독일 하면 떠올리게 되는 맥주, 또 스카치 위스키, 러시아의 독한 보드카 등등... 지역과 사람들의 기호에 따라 술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칵테일 가게에 가보면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희한한 이름들이 많더군요. 그러나 고대사회에서 술이라고 하면 포도주를 의미했습니다. 다른 술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처럼 다양한 술이 개발되지는 않았을 것이고, 품질의 차이는 있었을지언정 포도주가 술을 대변하는 단어였을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포도주의 용도는 술을 즐기기 위한 것만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많은 경우에 포도주는 일상적인 음료수로 사용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 포도주의 중요한 기능은 의료적인 것이었습니다. 탈무드나 히포크라테스, 플리니, 플루타르크 등, 고대의 저작에서 위장병에 대한 포도주의 효능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 의학에서도 인정하는 포도주의 효능이기도 합니다.

디모데는 상당히 심각한 위장병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모든 병이 괴롭고 힘든 것이지만, 이 위장병은 먹는 일과 관련이 되기 때문에 또 특별한 병입니다. 저도 위장이 썩 좋은 편이 아니어서 종종 약을 먹기도 합니다만,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병이 바로 이 위장병입니다. 음식 자체가 자극적이기도 하고, 불규칙한 식사습관이라든가, 폭탄주 같은 것이 위장병을 유발하지요. 그런데 디모데는 왜 위장병에 걸렸을까요? 고대 사회에서는 수질이 좋지 않아서 또 위장병을 많이 유발시켰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아프리카에 있을 때 보니까 사람들이 아무 물이나 막 마셔요. 수돗물도 정수시설과 약품처리를 거쳐 공급되는 것이 아니라 강물을 끌어다가 그대로 보내줍니다. 그러니까 우기철에는 수도꼭지에서 흙탕물이 나와요. 처음에 수도꼭지에서 흙탕물이 나오는 것을 보고 기겁을 했는데, 나중에 더 놀란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그냥 마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물을 마셨다가는 당장 배탈이 나고 난리가 날 거예요. 그래도 그 사람들은 면역이 되었는지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러나 속으로는 얼마나 병이 많겠어요? 아프리카에서는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45세 가량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고대 사회에서도 사정이 비슷했을 것입니다. 특별히 바울이나 디모데와 같이 복음 전파 사역을 위해 여러 지역을 오랫동안 여행해야 했던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이 위장병이 필수과목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바울에게도 위장병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디모데의 위장병에 대해 유용한 조언을 해주는 것을 볼 때, 바울 역시 위장병을 앓아본 경험이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갑자기 디모데의 위장병 이야기를 하면서 포도주를 마시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울로서는 디모데의 사역 못지 않게 그의 건강이 염려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가르침과 조언을 잘 받아들여서 훌륭한 사역자가 되려고 하는 디모데가 위장병으로 몸져 눕게 되거나 사역을 할 수 없게 되면 아무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아무리 유능하고 신실한 복음의 일꾼이라 할지라도 건강을 잃으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사역을 위한 지침과 충고 못지 않게 위장병에 대한 충고도 중요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지금 이 얘기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그 앞에 22절에서 바울은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고 충고했습니다. 자신을 순결하게 지킨다는 것이 지도자로서 매우 필수적인 요건인 것입니다. 미국에서 부시가 대통령에 취임하면 대대적인 반대시위를 벌이겠다고 하던 흑인 인권운동가 재시 잭슨 목사가 지금은 아무 소리도 못하고 힘없이 주저앉았습니다. 한때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치열하게 경합하기도 했었고, 지금도 민주당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정치적 거물입니다. 그가 갑자기 그렇게 몰락한 이유는 부도덕한 사생활이 폭로되었기 때문입니다. 전직 비서와의 관계에서 낳은 아이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자기들은 이런 짓을 밥먹듯이 하면서도 지도자들에게는 이런 일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회에서는 대개 권력이나 지도력이 부패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회일수록 도덕적인 뒷받침이 되지 않은 지도력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도 같습니다. 더욱이 교회 안에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지요.

전후 문맥으로 보아서 디모데는 매우 엄격한 금욕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지도자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됨과 동시에,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이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않고 자신을 정결케 하기 위해 아주 좋은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금욕적인 생활로 디모데의 건강이 매우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심한 위장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필요한 일인데, 이것은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단 말이죠. 반대자들로부터 다른 사람들에게는 술 마시지 못하게 하면서 자기는 마신다는 비난이나 공격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디모데의 지도력이나 사역에도 큰 차질이 생길 수 있겠지요. 포도주가 약도 됨과 동시에 그리스도인이 멀리해야 할 악의 원인 제공자가 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디모데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당시에 잔탁이나 겔포스같은 좋은 위장약이 있었다면 이 문제로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포도주를 쓰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사람들에게 받는 오해받지 않는 것보다 건강을 해치지 않고 힘있게 일할 수 있도록 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미 바울은 4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서 말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고 할 것이지만,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다 선하기 때문에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디모데가 방탕하게 되기 위해서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악화되어 고통을 가져다주는 위장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라면 누구에게나 비난받을 이유가 없고 떳떳하지 못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치료약으로 사용하여 낫게 되는 축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마다 찾아다니면서 나는 위장병 때문에 포도주를 약으로 마신다고 설명할 수도 없을 것이고, 그래서 때로는 술을 마신다고 오해를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진실입니다. 그리고 진실은 떳떳합니다. 그러니 염려하지 말고 포도주를 약으로 쓰라는 것이지요. 자신의 정결을 지킨다고 하면서 포도주를 입에 대지도 않다가 건강을 해치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은 일입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결과일 뿐이지요.

자신이 진실하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해 크게 얽매이지 않습니다. 반대로 진실하지 못할 때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촉각을 세우게 되지요. 많은 범죄를 행하고도 그것이 드러나지 않아 떳떳하게 행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모두가 이런 면에서 범죄자입니다. 다만 드러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어떤 때는 자신도 모르는 범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범죄는 우리가 성공적으로 은폐한다고 해서 그대로 영원히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서 그 범죄가 소멸되는 것도 아니지요. 어떤 사람들은 범죄한 것이 금방 들통나서 합당한 벌을 받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드러나지 않은 채 위선의 가면을 쓰고 잘 살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형편을 뭐라고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좇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장 드러나지 않은 범죄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충청도 어느 곳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밤에 자동차를 운전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술에 취해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걸 보고는 이 사람이 술 취한 사람을 자기 차에 태우고 언덕 아래로 차를 굴렸습니다. 그리고 차에 불을 질러 죽은 사람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죽은 것으로 만든 것입니다. 진짜로 죽은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지요. 그래서 이 사람의 부인은 남편이 죽었다는 이유로 보험금을 탔습니다. 이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 사람의 살인죄는 드러나지 않아 처벌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아무도 몰랐지요. 그러던 어느 날, 이 사람이 불신검문에 걸렸습니다. 경찰이 주민등록번호를 말하라고 하니 말할 수가 있습니까? 아마 자기가 죽인 사람의 주민등록번호까지는 챙기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또 챙겨봐야 소용도 없지요. 그 사람은 이미 실종자로 처리되었을 테니까요. 그렇다고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 자기 주민등록번호를 댈 수도 없지요. 우물쭈물하는 것을 수상히 여긴 경찰의 수사에 의해 5년 전의 범죄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참 운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어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들통나지 않고 잘 사는 경우도 있을 텐데 말입니다. 가령 죽을 때까지 드러나지 않았다고 합시다. 그것으로 끝납니까? 일본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아주 유능하고 인기있는 여기자가 동료 기자와 결혼해서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아기를 낳고 보니 눈이 파란 백인이 태어난 것입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이 여자가 외국의 기자들을 비롯해서 외국인들을 많이 만날 기회가 있고, 그래서 어쩌다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기자는 한사코 그런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이렇게 증거가 확실한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요? 그런데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이 여기자의 어머니가 갑자기 통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자기 딸의 부정이 아니라 자신의 부정의 증거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어머니가 전쟁 후 주둔해 있던 어떤 미군 병사와 정을 통해서 딸을 낳았는데, 다행히 아버지의 모습이 섞이지 않고 어머니의 모습만 이어받은 일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그 부정이 수십년 동안 드러나지 않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딸이 장성해서 아이를 낳고 보니 자신의 그 숨겨왔던 부정의 씨앗이 여기서 드러난 것입니다. 만약 그 여기자가 아이를 낳기 전에 어머니가 죽었더라면, 자기 생전에 그 부정이 드러나지 않았겠지요. 그렇다면 딸이 그 부정의 누명을 쓰게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면 현대의학에 의해 딸이 아니라 어머니의 부정이라는 것이 밝혀질 수도 있지요.

설령 죽을 때까지 드러나지 않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괜찮습니까? 이 세상에서는 그럴지도 모르지요. 죽은 후에 밝혀져 봐야 이미 죽은 사람을 어찌하겠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죄를 범하고도 숨기고, 또 그것을 숨기기 위해 또 범죄를 저지릅니다. 죽을 때까지만 드러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지요. 죽은 사람은 어쩔 수가 없으니까. 그러나 그 죽은 사람을 어찌할 수 있는 분이 계시잖아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의 죄는 사람 앞에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의 죄는 사람 뒤에 따라갑니다. 마치 사람과 죄가 경주라도 하듯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심판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가 앞서거나 뒤서거나 하는 것은 아무런 차이도 의미도 없습니다. 죄가 밝히 드러나거나 죽을 때까지 잘 숨겨가거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죄가 그 사람을 심판으로 끌고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벗어버려야 할 가장 큰 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아직 갚지 못한 빚입니까? 집 살 때 얻은 은행 융자인가요? 우리가 벗어버려야 할 가장 큰 짐은 바로 숨겨놓은 죄악입니다. 사람들 앞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 하나님 앞에서 밝히 드러나 있는 죄악입니다. 그런데 마치 잘 숨겨놓았으니까 안심해도 된다는 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을 속이고 세상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일이지요. 우리에게는 누구나 크고 작은 숨겨진 죄악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들이 우리 뒤를 따라다니고 있지 않습니까? 이놈이 언제 우리를 앞질러 세상에 들통이 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혹은 우리가 더 빨리 달려서 이놈이 끝내 우리를 앞지르지 못해서 우리가 죽을 때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하나님 앞에서 이놈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놈을 영원히 따돌릴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놈 앞에서 달리기를 잘해서 잘 은폐하고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범죄 은닉죄가 추가될 뿐입니다.

재시 잭슨 목사는 자신이 지은 범죄에 의해 추월을 당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지만, 오히려 더 행복할지 모릅니다. 비록 지도자로서의 위신과 명망은 잃고 추락했지만, 뒤에서 쫓아오는 그 범죄의 위협과 압박으로부터는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범죄 앞에서 달음질하는 것은 그래서 오히려 어리석은 일이고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내놓고 회개하여 용서받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디모데가 범죄하는 것이 아니라면 위장병을 위해서 얼마든지 포도주를 마셔도 좋을 것입니다. 그의 진실 역시 밝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의 눈이 무서워서 이렇게 저렇게 행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진실하게 그리고 떳떳하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워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도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숨겨둔 죄를 해결하고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게 될 때, 사람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우리의 자유를 선언하고 그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실함으로 자유를 얻으십시오. 그래서 그 자유를 누리는 당당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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