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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딤후 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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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전투에 비유하고, 그리스도인을 군인에 비유해서 설명한 적이 많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고 했고,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고후 10:4)고도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군사가 되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는 그리스도를 위해 싸우는 사람이고, 그리스도의 명령에 죽고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령관으로 모신 군사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직 가운데서 가장 효율적인 것이 군대입니다. 일사불란하고 신속하게 움직이는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군대는 민주주의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이 가능합니다. 지휘관의 판단과 명령에 따라 신속하고 정확하게 움직여야 할 군대에서 민주주의를 한다고 하면 뭐가 되겠습니까? 적군 앞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못해 우왕좌왕 하거나, 의견이 맞지 않아 갈라서고 이탈하고 해서는 군대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군대는 기업처럼 이익을 만들어내는 집단이 아닙니다. 또 구성원들의 안녕을 도모하기 위한 집단도 아닙니다. 군대의 목표는 전쟁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만약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면 죽음밖에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무슨 이익이나 안녕 이전에 목숨의 문제를 다루는 집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니 인권이니 하는 가치에 초점을 맞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속과 효율을 위해서 사령관의 명령에 정확하게 움직여져야 할 뿐입니다.

제가 군대를 갔더니 훈련소에서 교관이 우리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는 얘기가 너희는 일회용 소모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국가에서 많은 돈을 들이고 또 젊은이들의 인생 몇 년을 희생해가면서 이 군대라는 것이 존재하는 이유는 어디 가서 돈을 벌어오기 위한 것도 아니고 무슨 체력단련을 하기 위한 것도 아니라 오로지 전쟁에서 한번 써먹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전쟁은 국가의 존립과 우리 모두의 목숨이라는 절체 절명의 문제를 판가름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어떠한 것이라도 희생해서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고, 바로 그것을 위해서 군대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인을 군인에 비유한다는 것은 교회를 군대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조직신학에서도 교회의 속성에 대해서 말할 때 이 지상의 교회를 전투적 교회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방해하는 사탄의 세력과 끊임없이 싸우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천상의 교회는 더 이상 전투적 교회일 필요가 없겠지요. 이미 전투가 끝났고 승리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지상의 교회가 사탄의 왕국과 싸워야 하는 전투적 교회라면 바울이 교회를 군대에 비유한 것은 매우 합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조직도 군대식으로 되어 있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저는 교회가 영적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군대이기 때문에 그 조직도 꼭 군대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군대식의 조직이 효율적이고 힘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한국에서 개신교의 비중이 카톨릭에 비해서 훨씬 큰데도 불구하고 힘의 집중력 면에서 볼 때 카톨릭이 훨씬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그 조직이 군대식이기 때문입니다. 장로교단들이 감리교단보다 훨씬 규모는 크지만 연합활동에서는 감리교가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것도 감리교의 조직이 군대식이기 때문입니다. 군대에서는 일단 방향이 설정되고 명령이 떨어지면 그대로 갑니다. 이의가 있을 수 없고 왈가왈부 논란을 벌일 수도 없습니다. 각 개별체의 독립된 인격과 창의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 불합리한 제도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의 효율과 신속성의 면에서 보면 이상적인 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지금 여러 종류의 교회정치 가운데 어떤 것이 좋고 나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군대라는 조직이 갖는 특성과 교회의 역할 사이의 관계를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어떤 종류의 제도가 아니라 교회의 성격, 즉 군대처럼 전투에서의 승리를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할 필요성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군사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군인이라고 해서 다 같은 군인은 아닐 것입니다. 그저 국방부 시계 돌아가는 것만 바라보며 억지로 시간만 때우고 세월만 보내다가 제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고 국가에 충성하는 군인이 있을 것입니다. 사도는 디모데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라고 합니다. 그저 머릿수나 채우는 허수아비 같은 군인이 아니라 없으면 안될 꼭 필요한 좋은 군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군인인데, 사령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데리고 전쟁에 나가시려 할 때, 정말 믿을 수 있는 좋은 군인인지, 아니면 그저 총알받이밖에 되지 않는 군인인지, 분류가 되지 않겠습니까?

좋은 군사란 누구인가 하면, 바울에 의하면, 고난을 받을 수 있는 군인입니다. 고난을 받을 수 있는 군인이란 자기의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는, 그만큼 충성스러운 군인이라는 것입니다. 좋은 군인은 충성심에 의해 결정됩니다. 능력이 있고 기술이 좋아야 좋은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충성심이 강해야 좋은 군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엊그제 TV에서 에어포스 원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에어포스 원은 미공군 1호기, 즉 대통령 전용기를 말합니다. 대통령 전용기가 공중납치되는 이야기인데, 납치범들을 모두 죽이고 비행기를 되찾아 돌아오는 길에 적 전투기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즉시 미공군 전투기들이 대통령 전용기를 구하기 위해 날아와 적기들을 격추시키지만, 적기 한 대에서 대통령 전용기를 향해 미사일이 발사되었습니다. 미사일이 한번 목표물에 조준되어 발사되면 피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성능이 좋은 전투기와 기술이 좋은 조종사들을 가졌다 하더라도 이미 적기에서 발사된 미사일을 멈추게 할 수는 없고, 이제 대통령 전용기가 격추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시간도 많은 시간이 아니라 불과 몇 초의 짧은 시간입니다. 생각할 시간도, 대피할 여유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전투기 한 대가 대통령 전용기를 향해 돌진합니다. 미사일이 대통령 전용기를 맞추기 직전에 이 전투기가 미사일과 충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충성심입니다. 그리고 그 충성심이 좋은 군인을 만드는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충성심 있는 좋은 군사를 만드는가? 어떻게 그런 충성심을 가질 수 있는가? 바울은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 생활에 얽매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즉 충성심이란 나누어지지 않은 마음입니다. 군인이 전투에 나가면서 집안 일을 걱정하게 되면 좋은 군인이 될 수 없지요. 군사로 모집한 자, 즉 군대의 사령관은 그런 병사를 기뻐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군대 전체의 사기를 위해 나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교회에 속해 있고 영적인 전투를 치르고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에게 각자 자기 생활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기 생활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기 생활에 얽매어서 전투를 제대로 치를 수 없는 형편없는 군인이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을 대신해서 미사일에 충돌해 산화해버린 전투기의 조종사라고 해서 가족과 자기 미래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군인인 것입니다. 만일 그가 자기 생활에 얽매인 사람이었다면 대통령을 대신해서 죽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결국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예수를 사령관으로 모시고 따르는 군인으로서 그러한 자세와 충성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 그러면 그렇게 자기 일을 돌아보지도 않고 충성을 해서 좋은 군사가 되어서 좋을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충성하다가 고난을 받고 사령관 대신 목숨을 잃어버리면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으로 끝나버린다면 좋은 군사가 된다는 것만으로는 충성심을 유발시키는 동기가 되기 어렵습니다. 분명히 그렇게 충성한 대가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면류관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상급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 시대에 면류관을 생각하면 운동선수를 쉽게 연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문화권 내의 대도시마다 큰 경기장이 있었고, 그 경기에서 우승한 사람에게 면류관이 수여되던 광경은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1등을 했다 해도 경기의 규칙을 어겼으면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운동선수가 법대로 경기한다는 것과 군사가 충성스러운 군사, 좋은 군사가 된다는 것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군인에게 있어서 법대로 한다는 것은 자신의 직무를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수행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집안 일 걱정하는 데 가 있고, 전리품에 마음이 가 있어서는 사령관을 기쁘게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군인이 충성스럽고 좋은 군인이 되면 상급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결과가 좋았어도 법대로 경기를 하지 않았으면 면류관을 얻을 수 없다는 사도의 말이 오늘 우리에게 무척 도전이 됩니다. 우리가 그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결과 위주, 성과 지향적인 사회에서 이 원칙이 너무나 지켜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쿠데타를 시도하다가 붙잡히면 최고의 벌을 받습니다. 옛말로는 역적이고, 요즘 표현으로는 국가 전복죄입니다. 쿠데타라는 것이 그렇게 큰 죄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성공해 버리면 현실적으로 누가 처벌할 수 있습니까? 즉 결과가 과정과 수단에게 정당성을 부여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 결과를 얻기 위해 어떠한 수단이라도 사용하는 것을 꺼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앞에 가는 사람 발을 걸어 넘어뜨려서라도 1등만 하면 되고, 약물을 복용해서라도 좋은 기록을 내는 것이 잘하는 것이고, 심판에게 뇌물을 주어서라도 좋은 점수를 얻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통념이 되어 있습니다. 교회라고 해서 다른 것도 아닙니다. 다른 교회 잘 다니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데려와서 교인수가 많아지면 능력 있는 목사가 되고, 있지도 않은 사실을 만들어내서 남을 모함하고 헐뜯어서 자기만 좋은 사람, 좋은 교회라고 인정받으려고 하는 일도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남의 발을 걸어 넘어뜨렸든, 심판을 매수했든, 1등을 했고 인정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행복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도의 말씀에 의하면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합니다. 이 면류관은 사람들의 인정이 아닙니다. 우리가 목표로 하고 얻어야 할 면류관은 거짓 사실에 근거한 사람들의 판단착오가 아닙니다.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하나도 놓침이 없이 다 들여다보시는 하나님이 판단하시고 인정하셔서 주시는 면류관입니다. 우리가 어떤 면류관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행동양식에 커다란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상급을 얻을 것이라는 것을 사도는 농부가 곡식 얻는 것으로 다시 한번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대통령에게는 상급을 줄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대통령이 위기에 처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의 안전을 위해 노심초사하고 조치를 취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대통령이 훈장을 준다면 우선 누구에게 먼저 주겠습니까? 당장 대통령을 위해서 현장에서 싸운 사람들 아니겠어요? 몸으로 대통령을 가로막아 총을 대신 맞은 사람, 대통령 대신 미사일과 충돌해서 불꽃으로 산화한 조종사... 이런 사람들을 제쳐놓고 누구에게 먼저 상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곡식을 가장 먼저 손에 쥐는 사람은 그 곡식을 심고 가꾸고 수확한 농부 자신입니다. 그 곡식을 위해서 눈물로 씨를 뿌리며 땀을 흘렸던 그 수고는 풍성한 수확으로 보상을 받는 것이고, 그 곡식을 수확하는 감격과 기쁨은 다른 누구에게 양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심고 가꾼 사람만이 그 곡식을 수확하는 기쁨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포도원을 만들었는데 아직 수확을 하지 못한 사람은 전쟁이 일어나도 군대에 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신 20:6). 또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내리시는 형벌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간주되는 것 하나는 곡식을 심고 수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욥은 말하기를 '만일 내 걸음이 길에서 떠났거나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라갔거나 내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던 적이 있다면 나의 심은 것을 타인이 먹어도 마땅하다'고 했습니다(욥 31:7-8).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만일 너희가 이 모든 명령을 준행치 않고 나의 언약을 배반하면 내가 너희에게 놀라운 재앙을 내릴 터인데, 그 중의 하나가 너희의 파종이 헛되어 너희의 대적이 그것을 먹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레 26:14-17).

말하자면 곡식을 얻는 것은 수고한 농부의 당연한 권리라는 것인데,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상급을 얻는 것은 마치 농부가 곡식을 얻는 것과 같이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그 정도로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충성한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9-30).

사도가 우리에게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고 사령관이신 그리스도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좋은 군사가 되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희생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좋은 상급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자신도 자신의 일생을 마감하는 때가 가까워 지난 삶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딤후 4:7-8). 우리도 이러한 소망과 확신 속에서 주님을 섬길 수 있을까요? 우리도 우리를 군사로 부르신 주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좋은 군사로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자기 생활에 얽매이다가, 마치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의 경우처럼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한 자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요?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가 있습니까? 우리가 인생 살아가면서 우선권을 어디에 두고 삽니까?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온전히 충성하는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면류관을 예비해 두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면류관에 합당한 좋은 군사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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