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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쓰임받는 그릇 (딤후 02: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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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다 보면 이사를 해야 할 때가 종종 있지요? 평소에는 잘 모르고 살았는데 이삿짐을 싸려고 보면 무슨 살림살이가 그렇게 많은지 몰라요. 여자분들 가운데 자기 부엌살림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분은 그리 많지 않을 거예요. 아직도 필요한 게 많아요. 그렇지요? 그렇지만 이삿짐 싸면서 보면 그릇 싸는 일이 작은 일이 아니에요. 사실은 쓰는 그릇보다 안 쓰는 그릇이 더 많을 거예요. 저는 학교 다닐 때 자취를 하면서 살았는데, 자취생 살림이 얼마나 됩니까? 냄비 한두 개에다가 그릇 서너 개, 수저 비상시를 대비해서 두어 개면 다 되잖아요? 그렇게 살다가 결혼을 했는데 신부가 가져온 그릇이 왜 그렇게 많은지 갑자기 제가 분에 넘치는 생활을 하게 되는 기분이었어요. 어쨌든 그릇이 많다는 것은 살림살이의 규모가 그만큼 크다는 것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큰 집, 그러니까 부잣집이나 고관대작의 집에는 그릇이 얼마나 많겠어요?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큰 집은 로마 시대 귀족의 집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우리가 영화 같은 데서 보면 로마의 귀족들은 사치와 쾌락의 극을 달리지 않던가요? 그런 집에서 잔치를 한 번 열면 그 규모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자, 그런 집에 있는 수많은 그릇을 염두에 두고 지금 바울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큰 집에는 금그릇이나 은그릇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나 흙으로 만든 그릇도 있습니다. 금그릇이나 은그릇은 가장 귀한 일에 쓰이겠지요. 반면에 나무그릇이나 흙그릇은 무슨 쓰레기통이나 걸레 빠는 통 같은 천한 용도로나 쓰일 것입니다. 황제나 귀한 손님을 위한 잔치에 나무그릇을 내온다거나 또는 은쟁반에다가 걸레를 담아놓는 일은 있을 수가 없겠지요. 이처럼 그릇의 종류에 따라서 귀하게 쓰이는 것도 있고 천한 용도에 쓰이는 그릇도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그릇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큰 집은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금그릇처럼 귀한 일에 쓰임을 받고, 어떤 사람은 걸레통 정도로밖에 쓰임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손에 의해 쓰임받기를 소원합니다. 그릇이 용도에 따라 주인의 손에 쓰임을 받아야 그 가치가 있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의 손에 들리어 어떤 형태로든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우리가 어떤 용도로, 얼마나 귀한 일에 쓰임을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쓰임받지 못하고 버려진 그릇이야말로 비참한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바울은 우리가 주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 비결이 뭔가 하면 자기를 깨끗이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얼핏 보기에 논리의 괴리가 약간 있는 것 같지요? 앞에서는 금그릇과 은그릇이 귀히 쓰이고 나무나 흙그릇은 천히 쓰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뒤에 와서 귀하게 쓰임을 받는 비결이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과 금그릇이 되는 것은 다르거든요. 금그릇은 자신을 깨끗하게 했기 때문에 귀하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고, 나무그릇은 자신을 깨끗하게 하지 못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재료 자체가 좋은 것이 아니라서 천한 용도에 쓰였습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이것은 논리의 괴리가 아닙니다. 앞에서는 귀하게 쓰이는 그릇과 천하게 쓰이는 그릇이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금그릇이나 나무그릇의 차이를 예로 들었을 뿐입니다. 여기서 바울의 진짜 의도는 뒷부분에 나와 있습니다. 귀하게 쓰이거나 천하게 쓰이는 것은 자신을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달렸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특히 이것은 교회 안에서 지도자나 혹은 그리스도인 각자가 하나님께 어떤 모습으로 자신을 준비하고 드려야 할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울의 논점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자, 이 편지의 수신인은 디모데이기 때문에 디모데에게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 봅시다. 디모데는 에베소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입니다. 그런 디모데가 주님 앞에 신실한 일꾼으로 귀하게 쓰임을 받아야 하지 않겠어요? 뿐만 아니라 에베소 교회에는 주님께 도무지 쓰임을 받을 수 없는 이단과 거짓교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단에 속한 이 거짓교사들이 사실은 얼마나 유능하고 똑똑했겠어요? 굳이 금그릇, 나무그릇의 범주로 따진다면 이 사람들은 최상의 능력과 자질을 갖춘 그릇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들은 거짓과 술수와 탐욕으로 자신을 더럽히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이 자신의 교회를 위해서 도무지 쓰실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것과 대비해서 디모데는 자기를 깨끗하게 해서 귀히 쓰는 그릇이 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도록 예비함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라고 했는데, 이런 것은 앞에서 언급된 불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나야 한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또 귀하게 쓰임받는 그릇이 되기 위해서 디모데가 힘써야 할 일들이 몇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것은 청년의 정욕을 피하는 일입니다. 아마도 디모데는 당시 30대 후반쯤 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젊다고 해서 디모데가 방탕하고 그랬던 사람이 아닙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두 번째 전도여행을 하던 중에 루스드라에서 만난 청년인데,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행 16:2)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바울의 마음에 쏙 들었는지 그의 전도여행에 디모데를 데려가기로 했고, 결국 바울의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디모데에게 바울이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청년의 정욕이 위험하고 누구나 빠지기 쉬운 유혹이기 때문입니다. 이 청년의 정욕에 빠지게 되면 자신을 깨끗하게 하지 못하고 그래서 결국 귀한 일에 쓰임을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청년의 정욕이라고 해서 꼭 청년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청년의 정욕은 대체로 성적인 욕망과 타락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근래에 유명한 목사님들이 이런 성적 스캔들에 연루되어 곤욕을 치루는 일들이 가끔 있었습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 대개 60이 넘으신 분들인데, 그때까지 청년의 힘과 기백을 간직하고 있어서 청년의 정욕에 빠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이것은 하나님께 쓰임받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꼭 피해야 할 더러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다음으로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포인트는 화평을 좇으라는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은 기본적으로 당연히 있어야 할 성품이고, 그 위에 화평을 이룰 줄 알아야 교회에서 귀한 일에 쓰임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교회는 가장 화평할 것 같은 곳인데 가장 화평하지 못한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 잘 믿는 사람 만나면 얼마나 반가워요? 같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공동체의식이 우리를 더 가깝게 하고 더 사랑할 수 있게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렇게 가깝고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정말로 화평하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지요? 그런데 왜 교회마다 그렇게 분란이 있고 다툼이 있는 걸까요? 뭐 이 에베소 교회처럼 이단과 거짓교사들이 설치는 곳이라면 분쟁이 있어야 마땅하겠지만, 그것이 아니고 목사파와 장로파가 나뉘어 싸우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왜 교회마다 패가 나뉘어서 서로 불신하고 갈등을 겪어야 하는 걸까요?

이런 곳에서 정말 별처럼 빛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화평을 가져오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귀하게 쓰임받을 수 있는 사람은 전투에 능한 싸움꾼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게 하고 화평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많지는 않겠지만 가는 곳마다 분쟁을 일으키는 사람도 있지 않아요? 멀쩡하게 잘 지내는 곳에 그 사람만 들어갔다 하면 분란이 생기고 문제가 일어나요. 그것도 무슨 재주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교회에서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 반대로 분쟁이 있고 다툼이 있는 곳에 가서 상처를 싸매고 서로를 화해시키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가 주님 손에 귀하게 쓰임받는 사람입니까?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고 했는데 거기서는 싸움만 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자기주장이 옳아도 서로 목소리를 높이고 다투는 것은 결코 잘하는 일이 아닙니다.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수록 자기주장도 강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수가 많더군요. 말을 아주 잘해서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상대방이 굴복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말발이 딸려서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지 마음속으로는 결코 동의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살 수 있는 방법은 지식과 말발이 아니라 행동과 감동입니다.

그래서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해야 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쉬운 일이 아니지요. 온유한 사람을 만나서 온유하게 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거역하고 반항하는 사람에게 온유하게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교회의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가르치기를 잘하고 잘 참고,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 줄 아는 것입니다. 온유함으로 징계한다는 것이 뭘까요? 우리 성경에서는 징계라는 강한 의미의 단어로 번역이 되었는데, 원문에는 가르친다는 뜻의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선생이 어린아이를 가르치고 훈계하는 일에 주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아이들 키우다 보면 부모에게 거역하고 반항하는 일들이 많지 않던가요? 그럴 때 부모가 따끔하게 벌을 줘서 버릇을 잡을 수도 있고, 사랑이 지나친 나머지 오냐 오냐 하면서 응석받이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잡는 것과 사랑을 모두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온유함으로 징계하는 것이 되겠군요. 이렇게 솜씨 좋은 일꾼이 있다면 그 일꾼의 주인이 얼마나 흡족해할까요?

우리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는 비결은 우선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좋은 재료로 만든 그릇이라도, 아무리 유능하고 재주가 많아도 더러우면 귀한 용도로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주님께 쓰임을 받는다는 것은 그 사람들을 섬기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잘났다고 다른 사람들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분쟁과 다툼을 일으키는 사람은 절대로 쓰임을 받을 수가 없지요. 그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이해하면서 잘 가르치고 선한 길로 인도하는 것이 교회에서 쓰임받는 사람의 역할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이 교회를 위하여 주님의 손에 들리어 쓰임받는 종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래서 쓰임받기에 합당하도록 주께서 나를 다듬어주시기를 원하고 저 역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필요한 능력과 자질을 가꾸기 위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 역시 하나님의 집에서 귀하고 아름다운 곳에 쓰임받는 그릇이 다 되셔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드리고 늘 승리하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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