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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교회 (고전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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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모레면 2004 아테네 올림픽이 개막됩니다. 아테네는 올림픽의 발상지로 유명한 곳이지요. 고대 그리스에는 두 개의 커다란 육상경기 축제가 있었는데, 하나는 올림피아드이고 또 하나는 이스미안 게임입니다. 이 이스미안 게임이 열렸던 곳이 바로 고린도입니다. 고린도는 그리스의 본토와 펠레폰네수스를 잇는 지협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육상 교통과 해상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상업 중심으로 도시가 발달했습니다. 아테네로부터는 약 70km쯤 떨어진 곳입니다.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이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관련된 이야기는 사도행전 16장에서부터 19장까지에 나오기 때문에 고린도전서를 공부하면서 이 사도행전의 이야기를 병행해서 읽어야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두 번째 전도여행 중에 세운 교회인데, 고린도는 바울의 두 번째 전도여행의 중심지였습니다. 거기 1년 6개월이나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거든요. 사실 바울이 두 번째 전도여행에서 정말로 복음을 전하고 싶었던 곳은 아시아지요. 여기서 아시아란 지금의 터키 지역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복음 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대목에서 많은 분들이 오해를 하고 섭섭하게 생각하는 수가 많은데, 성령께서 아시아를 소홀히 생각하신 게 아니에요. 세 번째 전도여행에서 바울은 결국 아시아에서 집중적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그곳이 소아시아의 수도였던 에베소인데, 무려 3년이나 머물렀습니다. 바로 이 에베소에 머무는 동안에 바울은 이 고린도전서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바울에게 아시아에서 복음 전하지 못하게 하시는 바람에, 유럽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발전한 데 반해 아시아는 우상종교 아래 있어서 오랫동안 복음을 접할 기회가 없었고 근대화도 뒤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엉뚱한 소설 같은 얘기입니다. 저도 전에 목사님들, 특히 부흥사들의 설교에서 그런 얘기 많이 들었는데, 혹시 누가 그런 얘기 하면 그냥 속으로만 조용히 웃으세요. 하긴 지금은 그런 얘기 하시는 분들은 없을 거예요.

어쨌든 그렇게 성령께서 복음 전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셔서 답답해하고 있는 차에 바울이 밤에 환상을 봅니다.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나타나서 자기들에게 와서 도와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즉시 마음을 정하고 바다를 건너서 그리스로 갑니다. 로마의 행정관할 구역에 따라 그리스 남부 지역은 아가야라고 했고, 북부 지역은 마게도냐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들어간 바울 일행이 첫 번째로 도착해서 복음을 전한 곳이 빌립보입니다. 거기서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혀 매를 맞았는데, 밤중에 찬송을 부를 때 지진이 일어나고 감옥 문이 열리는 사건이 발생하지요. 그래서 거기 간수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빌립보에서 핍박을 피해 간 곳이 데살로니가인데,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더 지독하게 핍박을 했습니다. 그래서 또 데살로니가를 떠나 가까운 베뢰아로 갔는데, 거기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훨씬 신사적이어서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정말 그러한가 하고 날마다 말씀을 공부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유별난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거기까지 쫓아와서 바울을 방해하니까 아예 바울이 멀리 도망을 갔는데, 그렇게 해서 간 곳이 저 남쪽에 있는 아테네입니다. 아무리 지독한 데살로니가 사람들이라도 거기까지 쫓아오지는 못하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아테네는 그리스 철학의 중심지입니다. 당시 유행하던 스토아 학파, 또 에피큐레스 학파의 철학자들과 바울이 맞대결을 벌였습니다. 바울도 공부깨나 한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그 철학자들에게 복음의 내용이 먹혀들어가지 않는 거예요. 바울이 철저하게 실패한 것입니다. 나중에 바울은 자신의 지식과 학문을 동원한 그런 전도방법에 대해 깊이 반성을 합니다. 어쨌든 그렇게 실패를 경험한 다음에 간 곳이 바로 고린도였습니다.

바울은 이 편지를 쓰면서 소스데네라는 사람과 함께 이 편지를 쓴다고 말합니다. 소스데네에 관한 기록은 사도행전 18장 17절에 나옵니다. 고린도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붙잡아가지고 로마의 총독에게 데려가 고발합니다. 율법을 어기도록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총독 갈리오는 그런 종교적 문제에 관여하지 않겠다면서 법정에서 모두 쫓아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재판하는 자리에서 때렸다는 내용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회당을 짓고 그 회당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아갑니다. 유대인의 삶의 중심은 성전이지만, 성전은 예루살렘에만 존재합니다. 가는 곳마다 성전을 세울 수가 없단 말이지요. 그래서 회당을 세우고 거기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예수님도 갈릴리의 회당에서 가르치셨고 또 거기서 병자를 고치시기도 했지요. 이처럼 회당은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의 삶의 중심인데, 유대인들이 회당장을 붙잡아 때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겠어요?

처음 바울이 고린도에 왔을 때 유대인과 헬라인 모두에게 열심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는데, 워낙 유대인들의 반대와 방해가 심해지자 바울이 유대인들을 포기하고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회당장이던 그리스보가 예수를 믿었어요. 회당장이 예수를 믿었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상당한 충격이었겠지요? 그래서 아마도 그리스보가 해고를 당한 것 같아요. 그리고 그 후임으로 소스데네가 회당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스데네도 하는 짓이 바울과 어울리고 예수를 믿는 것 같아요. 그러니 유대인들이 화가 많이 났겠지요. 그래서 총독의 재판하는 자리로 소스데네를 끌고와서는 막 두들겨 팬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스데네는 골수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었고, 고린도교회의 멤버였습니다. 고린도의 회당장이면 대단한 위치인데 총독 앞에서 매를 맞았으니 큰 사건 아닙니까? 그만큼 소스데네는 고린도교회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스데네가 바울과 함께 에베소에 머물고 있습니다. 바울이 편지에서 그 이름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바울과 함께 복음 전하는 일에 수종들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고린도 교회 출신의 소스데네를 언급한 것은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지요? 또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 보낸다는데 옆에 있던 소스데네가 가만히 있겠어요? 소스데네 역시 바울 못지않게 자신의 모교회가 걱정되고 또 하고 싶은 말도 많았겠지요.

이렇게 해서 바울과 소스데네 두 사람의 이름으로 고린도 교회에게 편지를 써서 보냅니다. 우선 바울은 자신을 소개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지요. 소스데네가 회당장이었다가 예수를 믿고 이제는 전도자가 되었다면, 바울 역시 골수 유대인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니다가 예수를 믿고 사도가 된 사람입니다. 그만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매우 급진적인 변화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서 세계관과 가치관, 그리고 인생의 목표와 의미가 모조리 뒤바뀌기 때문입니다.

회당장이면 존경 받는 위치이고 사회적 신분과 지위가 남부럽지 않은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군중 앞에서 몰매를 맞았어요. 요즘의 사회 분위기 같으면 분하고 창피해서라도 한강에 투신할 만한 사건이지요? 그러나 회당장 자리를 포기하고 매맞는 수모도 거리끼지 않게 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 안에 있는 예수가 더 소중하고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로 인해서 새로운 인생,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대 최고의 학문을 전수받았고 출세가도를 달리던 바울은 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배설물처럼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것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발견한 진리와 상충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만 또 소스데네만 그런 경험을 가지고 변화된 인생을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편지를 받게 될 고린도 교회의 모든 교인들에게 해당되는 얘기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고린도에 있는 교회만 하나님의 교회입니까? 에베소에 있는 교회도 하나님의 교회이고, 서울에 있는 교회도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타우랑가에 있는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이 교회는 누구에게 속합니까? 이 교회는 목사의 교회입니까? 아니면 교인들의 교회입니까?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할 사실은, 비록 제도적으로는 어떠하고 현실적으로 어떻게 운영이 되고 있든, 중요한 것은 이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 안에서 혹은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 잊어버리면 교회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고, 그것은 방향 없이 아무렇게나 떠내려가는 배처럼 되는 일입니다.

그 하나님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또 누구입니까?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보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로 말미암아 새로운 인생을 찾은 사람들입니다. 그 새로운 인생이란 로토에 당첨이 돼서 하루아침에 팔자가 바뀌거나 또는 백마의 왕자를 만난 신데렐라의 변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변한 삶을 사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사람들을 성도라고 부르지요.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누가 우리를 성도라고 부른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거룩한 무리라 부르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거룩한 무리 가운데 일어나는 일들은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무리로 부르셨습니다. 물론 오늘 우리의 살아가는 꼴을 가지고는 성도라, 거룩한 무리라고 불리기가 심히 부끄럽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서 거룩해진 것입니다. 우리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옷입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분은 의인, 성도가 된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신분에 맞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하나님의 교회,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을 우리가 세워나가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교회의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를 성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명령 앞에서 이 교회를 아름답게 가꾸어나가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요 또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은혜입니다. 겸손으로 우리의 허리를 동이고 늘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으로 우리가 함께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세워나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우리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교회답게 거룩한 모습들로 채워지고, 또 우리 사이에 오가는 모든 일들이 성도의 본분에 합당한 아름다운 것들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그런 아름다운 교회를 우리가 함께 세워갈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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