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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삼원색 (고전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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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위대한 생애를 살다 간 위인들, 혹은 성인이라 추앙받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많이 듣고 배워서 잘 압니다.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비폭력 무저항으로 영국의 제국주의를 무릎 꿇게 했던 간디는 참으로 위대한 정신이라 칭송받을 만한 사람입니다. 캘커타의 빈민굴에서 헐벗고 굶주려 죽어가는 사람들과 평생을 동고동락했던 테레사 수녀는 성인으로 온 세계의 존경을 받습니다.

성인, 혹은 군자라는 칭호는 그러한 위대한 사람들, 그러니까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두 사람, 혹은 백년에 한 번 나올 만한 특별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을 우리가 목격합니다. 그런데 우리처럼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 성도, 즉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이름이 주어질 때, 우리는 당황하게 되지요. 예를 들어 정부에서 여러분에게 지금 당장 성인, 또는 의인이라는 칭호를 내린다면 무척 당황스럽지 않겠어요?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당혹스러워하는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고 사도 바울은 우리를 성도라고 부릅니다.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을 성도라고 불렀다면, 그 칭호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서 교인들을 성도라고 부릅니다. 사실 성도라는 칭호가 의미 없이 사용되는 수가 많지요. 교회에서 장로가 되면 그것이 최상의 칭호가 됩니다. 또 집사가 되면 그것 역시 적당히 부르기 좋은 칭호가 되지요. 그런데 교회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무런 직분을 받지 않은 사람은 부를 이름이 없잖아요. 그래서 아무개 성도님, 이런 식으로 부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목사나 장로, 집사 같은 계급이 있고, 가장 낮은 계급 또는 계급 없는 사람들은 성도인 것처럼 그 이름이 사용되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이 성도라는 이름은 얼마나 귀하고 영광스러운 말입니다. 무슨 목사니 장로니 하는 그런 이름들이 비교나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성도라는 것,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자들이라고 불러주신다는 것처럼 감사하고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집사든 목사든 모두 성도라고 불리우는 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생각해야 하는 일 아닙니까? 아직 아무런 직분을 받지 않은 사람이 성도가 아니란 말이지요. 물론 직분 없는 사람들을 성도라고 부르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직분을 받고 받지 않고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목사든 집사든, 아무런 직분이 없든 우리가 모두 성도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가졌다는 것이 중요한 일이지요.

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근거에서 성도가 되고, 또 성도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와 특권을 누리는 일인지 살펴봅시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의 성품이나 인격, 공헌에 의해서 성도가 되어야 한다면, 누가 성도가 될 수 있겠습니까? 간디나 테레사 수녀 같은 분들만 성도가 되고 나머지는 모두 한 구석에 찌그러져 있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간디나 테레사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가 성도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얻게 되는 비밀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성도의 삶은 세 가지 차원으로 구성됩니다. 그 첫 번째는 과거의 차원인데, 그것은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은 과거의 사건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모두 구원받은 사람들이라는 말이지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구원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사도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과거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해 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그 은혜란 그들에게 베푸신 구원을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가지고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확신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확신이잖아요? 내가 지금 교회는 다니고 있지만, 진짜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을까? 나 같은 사람도 천국에 갈 수 있을까? 글쎄, 천국이 있기는 있는 걸까? 있다 해도 갈지 못 갈지는 가봐야 아는 것 아닌가? 이런 상태라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나요?

성경 66권, 이 두꺼운 책 가운데 가장 핵심이 되는 구절이 어디입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이에요. 거기서 뭐라고 하셨나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게 하시겠다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어요? 안 믿어요? 믿잖아요. 그래서 믿으면 영생을 주신다고 했단 말이지요. 즉 구원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간다는 거예요. 뭐가 더 필요해요?

이런 확신이 없으니까 구원파가 와가지고 ‘당신 구원 받았소?’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면 헷갈리는 거예요. 처음에는 당당히 구원받았다고 버티다가도 ‘언제 받았소?’ 또 이렇게 당돌하게 물어보면 주눅이 들어가지고 또 헷갈려요. 언제 받기는... 예수를 믿을 때 받았지요. 이단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얼토당토 않는 것을 너무나 확신 있게 물어보니까 우리가 헷갈려서 그만 그 말장난에 넘어가고 말아요.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교회에서 한 여학생과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학생이 아주 당돌하게 행복하고 싶냐고 묻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무척 당황을 했어요. 마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말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단도 마찬가지예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확신있게 하니까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혼동이 되는 거예요. 그럴 필요 없어요. 내가 내 믿음과 구원에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 헷갈릴 필요도 없고 속아 넘어가지도 않아요.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뭐라고 했어요?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 3:14)고 했잖아요. 네가 나한테 배웠지 않느냐? 그렇게 배워서 확신하는 진리 가운데 거하면 흔들리지 않고 넘어지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요한은 또 이렇게 말했지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믿는 자에게 구원을 베푸신다는 약속의 말씀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면 믿고 그대로 확신하면 돼요. 우리가 자녀들에게 뭐 해주기로 약속을 했는데, 이 녀석이 자꾸만 그것을 믿지 못하고, ‘진짜 엄마가 그렇게 해 줄까?’ 하면서 의심을 하면 부모의 마음이 언짢겠지요? 하나님은 안 그러시겠어요? 구원을 베풀어 주셨는데, 자꾸만 의심을 하고 헷갈리면 하나님이 섭섭해 하시지요.

6절 보세요.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었다고 합니다. 바울이 하는 일은 여기저기 다니면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 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입 아프게 말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누군가에게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고 싶으면 ‘눈을 들어 고린도 교인들을 보아라.’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러니까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 또는 증거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새 생명, 새로운 피조물, 즉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이지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구원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구원받을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누리는 두 번째의 특권은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5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예수 안에서 모든 일에 풍족하다고 말합니다. 성도는 과거에 이미 구원받았으니까, 다시 말해서 천국 가는 티켓을 확보했으니까 아무 데나 숨어 있다가 천국 가는 열차가 출발할 때 나타나서 올라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구원 받은 성도는 현재 살아가는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늘 동행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감시하고 속박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풍성한 삶을 위해서지요.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일단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의 구원이지요? 그 다음에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풍성히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상담학에서 추구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약속하셨는데, 어떻게 해서 우리가 그것을 누릴 수 있을까요?

무엇이 풍성한 삶입니까? 풍성한 삶을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이 주신 삶을 기쁨과 감사 속에서 건강하게 사는 것이 풍성한 삶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육체, 정신, 환경, 기타 여러 영역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가령 고통과 불행 속에 파묻힌 인생을 풍성한 삶이라고 할 수 없지요. 카운셀링이라는 것이 그러한 마음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면, 기독교적 시각으로 보면 주님이 약속하신 풍성한 삶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이라고 얘기를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이 예수 안에서 모든 일에 풍족하다고 했어요. 참으로 우리가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와 날마다 동행함으로써 풍성한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성도가 늘 불안과 근심 속에 산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소망 가운데 살아갑니다. 이 미래가 없다면 성도의 삶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비록 온전하지 못하고 넘어지기도 해서 주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견고케 하실 소망 안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것을 성도의 견인이라고 얘기합니다. 한번 구원받은 성도는 중간에 탈락하거나 구원이 취소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까지 주께서 붙잡으시고 온전케 되도록 이끌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성도 아닙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잖아요? 비록 우리가 아씨시의 프란체스코처럼 가난을 자초하면서 우리의 영혼을 맑게 가꾸어나가지 못하지만, 또 테레사 수녀처럼 가난한 자들을 위해 우리의 생애를 다 바치지 못하지만, 우리의 이 모습 이대로 하나님이 성도라고 불러주시며 성도의 축복과 특권을 누리도록 하셨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 성도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구성하고 이 세상에서 빛으로 소금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인 것을 확인하고 그래서 성도로서 살면서 성도에게 약속하신 풍성한 삶이 여러분의 생애에서 아름답게 이루어지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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