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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이 믿지 못하는 이유 (고전 01: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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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은 외부의 조건과 상태에 따라 삶의 방향이 좌우되는 수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행복한 가정에 태어나 사는 사람과 결손가정에 태어나 살고 있는 사람의 삶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왜 세상이 나에게 이렇게 불공평하고 심지어는 잔인한지 모르겠다고 불평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삶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관점에서는 궁극적으로 한 인간의 삶을 좌우하는 요인은 주변환경이 아니라 자신의 결정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슬픈 일이 나에게 발생해서 내가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이나 조건에 대해서 내가 슬퍼하기로 결정을 했기 때문에 슬프다는 것입니다. 외부의 환경과 내면의 의지가 모두 중요한 요인인 것은 틀림없지만, 외부의 환경보다는 내면의 의지가 훨씬 더 큰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똑같은 상황에 처했어도 사람에 따라서 전혀 다른 반응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의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우리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는 존재가 됩니다. 그런데 이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 인간의 의지로 하나님을 믿거나 믿지 않기로 작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의 근간이 되는 사상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저항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한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그 은혜를 베푸시면 인간이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인 결정권과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 신학적 써클에서는 이것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느낍니다. 인간은 누구의 간섭이나 통제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 인간의 삶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일들은 보면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거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전체적인 틀 속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실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구원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결정하셨는데 그렇게 선택된 인간이 구원을 거부하기로 결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결정과 뜻이 인간의 결정과 의지보다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을 믿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머뭇거리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의지로 그런 결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여기 보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살아오면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에는 표적이 나타납니다. 표적이란 sign입니다. 기적과 같은 초자연적인 사건이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증명하는 표시가 된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그 표적이 없으면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인정할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못하겠다고 버티는 이유는 표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명백하게 말씀해 주시면 믿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헬라인들이 예수를 믿지 못하겠다고 버티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그것이 자기들의 철학적 사고의 틀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잘 정돈된 논리와 체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지혜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이성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나 부활은 전혀 이성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을 수 없다는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그럴 듯하고 타당한 이유들이 많아요.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다 썩었다고 비난합니다. 목사도 나쁜 짓을 많이 하고, 교회의 여러 비리들이 적발된 것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그런 썩은 교회 못나가겠다는 것입니다. 맞는 얘기예요.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전혀 윤리적이지 않고 사랑도 없기 때문에 예수를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예배당은 으리으리하게 지으면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는 교회에 정이 떨어졌다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처럼 얼마든지 많은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만약 그 이유들이 아니라면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게 될까요? 네, 많은 사람들이 믿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하나의 이유가 없어지면 그들은 또 다른 이유를 찾아내서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유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자신의 의지의 결정을 감추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을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말로 설득하고 증거를 제시해도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을 보고 제자들은 그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지, 그 부모의 죄 때문인지 아니면 본인의 죄 때문에 그렇게 태어났는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 준비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는 메시야 되심의 증거였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놀라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어도 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야라는 것을 믿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소경이 눈을 뜬 것을 보고 다른 사람이라고 억지를 부렸습니다. 눈을 뜬 본인이 예수께서 눈을 뜨게 하셨다고 하면서 그 분이 하나님께로서 오지 않았으면 이런 일이 불가능하다고 하자, 바리새인들은 그 사람을 쫓아내버렸습니다. 그 사람의 증거는 바리새인들의 믿음을 변화시키는 데 사용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을 화나게 했을 뿐이었습니다.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이 표적을 보면서도 믿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표적을 구한다는 것도 거짓일 뿐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거절하셨습니다. 한번은 서기관과 바리새인 몇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표적을 보여 주시오.” 표적을 보여주면 믿겠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했던 것과 다를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렇다면 이 돌들을 명하여 떡이 되게 해라.”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는구나. 그러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 즉 그들에게 직접 표적 보여주시는 것을 거절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예수님께서 죽으셔서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지혜를 구하던 헬라인들은 그것이 지혜에 합당하다고 생각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고린도에 오기 전 아테네에서 뼈저리게 당했던 실패의 경험이었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과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을 상대로 바울이 나름대로 논리와 체계를 가지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들은 자기들보다 더 지혜롭고 발달된 학문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지 못합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입은 자,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할 것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전도할 때 듣는 사람의 갖가지 믿지 못하는 이유를 다 해소시켜야 전도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할 수 있을 만큼 설명하고 설득을 해야지요.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부패하고 교인들이 도덕적이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 논쟁을 하면 끝이 날 수도 없고 이길 수도 없습니다. 예수 믿지 못하는 이유를 확인해 주는 결과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때,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된 사람들,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명확하게 믿어지고 이해가 되어서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먼저 믿으려는 마음을 가질 때 전에 안 믿어지던 것도 믿어지고, 이해되지 않던 것도 수긍이 되는 것이지요. 또 온갖 이유를 대며 믿지 못하겠다던 사람도 어느 순간 마음 문이 열리면 백 가지도 넘는 믿지 못하겠다던 이유들이 봄눈 녹듯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슬픈 일이 일어나서 내가 슬픈 것이 아니라, 일어난 일을 가지고 내가 슬퍼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슬픈 것처럼, 믿어지지 않아서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기로 작정하고 마음을 닫고 있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마음이 열리도록 설득하는 일입니다. 더불어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이 예수 못 믿겠다는 구실로 이용되지 않도록, 오히려 그 반대로 우리 사는 모습을 보니 예수 믿고 싶은 생각이 든다는 말을 듣도록 살아야겠지요. 그렇게 해서 우리의 전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나타나고 증거되는 역사를 우리 모두가 체험하며 목격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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