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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설교 잘하는 목사보다 중요한 것 (고전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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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서는 고대로부터 변증학이 매우 중요한 분야로 여겨졌습니다. 변증학이란 어떤 사실이나 진리에 대하여 변론하고 증명하는 학문입니다. 즉 기독교의 진리를 이교도들에게 전파하고 가르치기 위해서는 변증학이 필수적으로 필요했던 것입니다. 특히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이단에 대처하는 일은 변증학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뛰어난 변증가는 스데반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이집트와 아시아 여러 지역의 회당에서 온 사람들이 스데반과 변론을 했는데 아무도 스데반을 이기지 못했어요. 바울 역시 뛰어난 변증가였습니다. 아테네에서 스토아 철학자들, 에피쿠로스 철학자들과 변론할 때 사람들이 바울을 말장이라고 불렀습니다.

즉 말을 조리있게 잘 해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아주 필요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4세기 경에 활동했던 크리소스톰이라는 설교자가 있었는데, 얼마나 뛰어난 언변을 구사했던지,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가졌습니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스펄전이라는 탁월한 설교자가 있었지요? 미국의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조나단 에드워드가 설교하면 수천 명의 사람들이 회심하고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어디서나 마찬가지로 설교 잘하는 목사님이 인기가 많습니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설교를 못하면 쫓겨날 수도 있어요. 반면에 설교 잘하는 목사님이 있는 교회는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기독교 변증학, 또는 설교를 잘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지요.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인간의 말로 담아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은 설교를 잘해야 된다는 것과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고린도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말을 잘하고 설교를 잘하는 것이 장점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본질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화려한 껍데기는 본질이 되는 알맹이로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아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좋은 말주변이 복음을 전하는 데 장애요소가 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인간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진리를 파악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말로 하나님의 진리를 다 담아서 파악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스데반이 뛰어난 변증가였습니다. 각국에서 온 내로라하는 말장이들이 스데반을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스데반의 말에 설득되어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했던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바울이 아테네에서 스토아 철학자, 에피쿠로스 철학자들과 변론했습니다. 바울이 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 철학자들이 바울에게 설득되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말을 조리있게 잘하고 설득력이 있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를 보세요.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증거를 전하는 사람이에요. 말하자면 증인입니다. 증인은 자기가 본 것을 그대로 말하기만 하면 돼요. 거기다 설명을 첨가하고 아주 세련된 문장으로 그것을 말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오히려 증거를 왜곡하고 말 것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증언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너희는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말합니다. 그의 임무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왜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했는지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3절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그가 고린도에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 합니다. 상당히 의외적인 표현이지요? 바울이 어디 다니면서 두려워 떨었다고 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는 데 있어서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왜 그는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 하는 걸까요? 그가 육체적인 두려움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두려워했고 왜 그랬을까요?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가 고린도에 오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2차 전도여행을 시작하면서 그는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않으셨고, 또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 나서 그리스로 건너와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인데, 그리스에서 가는 도시마다 그는 배척을 당하고 쫓겨나야 했습니다. 빌립보에서는 감옥에 갇혀 매를 맞았고, 데살로니가에서는 대규모 군중집회까지 열릴 정도로 바울에 대한 대적감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베레아로 갔는데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거기까지 쫓아와서 또 도망을 쳤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멀리 아테네로 갔는데, 거기서 바울이 철학자들과 변론을 벌였지만 복음을 전하는 데 실패하고 결국 고린도로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가는 곳마다 발을 붙이지 못하고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괴롭고 힘들겠어요? 그나마 이 고린도가 만만한 곳이 아니거든요. 바울이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복음이 배척당하는 것을 보는 것만큼 두렵고 떨리는 일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바울은 복음 전하는 전략을 바꾸었습니다. 상대방이 철학자이면 나도 철학자가 되어 복음을 변론하던 아테네에서의 방법이 완전히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는 것이 바로 그 말입니다.

거기서 바울이 깨달은 것은 복음이 전파되고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은 그것을 전하는 사람의 유창한 말솜씨에 달린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도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상대방을 설득시킬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도는 상대방을 설득시키는 것이 아니에요. 전도란 말 그대로 진리를 전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설득해서 굴복시키는 것은 우리의 역할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하려고 하니 힘들어서 못하지요.

전도는 하나님의 지혜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지혜인데, 우리 인간의 지혜로 그것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의 지혜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지혜로, 즉 우리의 말솜씨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고 설득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우리가 보고 경험한 것을 증언하는 것뿐입니다. 그 나머지는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말 한 마디만 툭 던져놓고 나머지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십시오 하는 식으로 소극적이고 피동적이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혀 복음을 전하는 것이지요.

물론 말주변이 좋아서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옳지 않다고 바울은 여기서 말합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이 대단히 중요한 말 아닙니까?

만약 바울이 유창한 언변과 해박한 지식으로 전하는 것을 듣고 믿은 사람이 있다면, 그의 믿음은 바울의 지혜에 근거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위 인기있는 설교자들이 가지고 있는 위험이 바로 그것입니다.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를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해야 하는데, 사람들은 자꾸만 능력있는 설교자를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같은 얘기를 해도 다른 설교자가 전하는 말씀은 은혜가 되지 않고, 그 능력있는 설교자가 말하면 은혜가 돼요.

존 스토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의 능력과 지혜가 나타나는 설교는 설교자가 자기가 하는 설교 속에서 스스로 작아지고 어리석은 자가 되려고 하는 설교입니다.”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를 통해 영광을 얻게 되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실 몫이 없습니다. 설교에서 설교자의 능력이 나타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자리가 없지요.

뭐 그렇다고 설교 잘하는 인기있는 목사님들이 잘못되었다거나 설교를 잘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은 했지만, 바울의 설교는 능력있고 많은 사람들의 심장을 녹였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능력과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언어와 행동에서 하나님이 증거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드러나고 내가 존중되고 내가 칭찬을 받는 곳에 하나님이 서 계실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귀하고 복되신 하나님의 모습을 증거하며 살아가도록 주님이 우리 모두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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