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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비밀을 누설하라 (고전 02: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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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밤하늘에 보석을 뿌려놓은 것처럼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마당에 나와서 그 아름다운 별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별이 얼마나 많은지 셀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100까지밖에 셀 줄을 몰라요. 할아버지는 50까지밖에 셀 줄 모릅니다. 별을 쳐다보던 할머니가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영감, 하늘에 별이 저렇게 많네요. 100개도 넘겠어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당치도 않다는 표정으로 대답을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 보기에는 50개도 더 되겠소.”

논리에 의하면 작은 것은 자신보다 큰 것을 담을 수 없습니다. 두 되짜리 그릇에 한 되짜리 그릇을 담을 수는 있지만, 한 되짜리에 두 되짜리를 담을 수는 없단 말이지요. 벼룩이 아무리 날고뛴다 해도 개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겠어요? 벼룩이 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만큼 커지고 지능도 높아져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개가 아무리 영리하고 똑똑해도 사람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개와 사람의 차이는 결코 메울 수 없을 만큼 큽니다. 개가 그 차이를 극복하고 인간만큼 지능이 높아진다면 인간의 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인간이 아무리 지혜롭다 한들 하나님의 지혜를 다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피조물이 창조자를 파악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시계 수리공은 시계의 구조와 기능을 이해하지만, 시계는 시계수리공의 기술과 능력을 알 수 없습니다. 사람과 개의 차이가 크지만, 그 차이는 피조물간의 차이입니다. 그렇게 피조물간의 차이도 극복할 수 없을 만큼 큰데, 하물며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차이는 얼마나 크겠어요?

물론 인간의 지혜가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고대의 문명들을 보면 현대인의 지식과 기술로도 풀 수 없는 불가사의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 과학기술의 발달은 끝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과거에는 상상의 세계에서나 존재하던 일들이 지금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요즘 노벨상 수상자들이 발표되고 있습니다만, 그런 상을 받는 과학자들의 지혜는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정보산업의 급격한 발전은 도무지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게 할 만큼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하나님을 찾았다는 사람 본 적이 있습니까? 우주선이 발달되어 아무리 우주 속을 헤집고 다닌다 한들 거기서 하나님을 찾아낼 수 있겠어요? 우주를 최초로 비행한 사람은 소련의 유리 가가린입니다. 그가 우주비행을 마치고 와서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하늘나라에 하나님이 있다고 하는데 자기가 하늘에 가 보니 하나님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인간의 지혜라는 것이 하나님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 지혜 있다는 사람들의 눈에 어리석게 보이는 하나님의 진리를 알기 위해서 인간의 지혜에 의지하지 않고 그것들을 포기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와서 바울은 다시 지혜를 언급합니다.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여기서 온전한 자들이란 구원받은 성도들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하는 사람들이지요. 이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바울이 지혜를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지혜에 대해 말할 때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지혜를 깨닫고 받아들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지혜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지혜로운 자들보다 더 똑똑하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즉 세상의 지혜를 마스터하면 하나님의 지혜도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지혜는 이 세상의 지혜와 전혀 상관이 없는 다른 차원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지혜가 많을수록 하나님의 지혜에 가까이 접근하게 된다면 노벨상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성인이 되었겠지요. 또 예로부터 도를 찾아 나선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았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그렇게 습득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감취었던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으로 봐도 보지 못해요. 귀로 들어도 들리지 않아요 사람의 마음으로 파악되지도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연구 활동이나 경험에 의해서 하나님의 진리가 파악되거나 습득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 되고 헬라인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감추어진 비밀이기 때문에 사람의 지혜로 보면 그것이 안 보여요. 오히려 어리석게 보일 뿐입니다. 자신의 경험세계의 비추어 그것을 보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돼요.

이처럼 자연인의 눈으로는 볼 수 없고 인간의 지혜로는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주어졌어요. 그 사람들은 그 지혜를 알고 있어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감추어져 있던 비밀을 하나님이 알려주셨다는 거예요. 이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신학의 방법론을 계시의존사색이라고 합니다. 신학이란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학문입니다. 그런데 신학도 학문이라고 해서 다른 학문처럼 깊이 사색하고 연구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물론 계시를 배제한 인간의 학문으로서의 신학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자유주의 신학입니다.

인간의 지혜로 이해한 하나님, 그것은 하나님을 인간의 취향에 맞게 만들어낸 전혀 엉뚱한 것이 되고 말았어요. 인간의 이성에 적합하지 않은 부분은 제거되어야 하고, 인간을 노엽게 하거나 불편하게 하는 부분은 수정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학입니까? 아니면 인간학입니까? 그러니까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학문으로서 사색을 하되 그것이 주어진 계시의 범주를 넘어서거나 계시와 어긋나도록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감추어진 비밀은 알려주셔야만 알 수 있는데, 그 알려주시는 것 이외의 방법으로 그것을 찾으려고 하면 그것이 찾아집니까?

다른 모든 학문은 인간이 주체가 되어 애써서 찾아내고 이룩한 결과입니다. 예를 들어 박테리아를 연구하는 사람에게 박테리아가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서 알려주지 않습니다. 바다를 연구하는 사람은 바다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금을 캐려는 사람은 금이 있는 땅속을 파고 들어가야 하지요. 인간의 학문과 문명은 그러한 인간의 노력과 수고로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능력과 지혜가 빛을 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우리에게 알려집니다. 인간이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해도 하나님의 감추어진 비밀을 캐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비밀의 문을 여시고 그 진리를 알도록 알려주어야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누구에게 그 비밀을 알려 주시나요? 바울이 뭐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셨다고 했지요?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엡 1:4-5).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아니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주실 것인지 결정하셨다는 것은 우리의 사고력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일입니다.

어쨌든 만세 전에 하나님이 그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어요? 모르는 사람은 아직도 모르고 있겠지만, 알고 나서 보니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셨다고 했어요. 그렇게 우리를 택하시고 작정하신 것이야말로 우리의 영광스러운 일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이 발견되는데, 1절에서 바울이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라고 말했었지요? 바울이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증거인데, 이 증거라는 헬라어 단어는 마르튀리온입니다. 그런데 고대 사본들에는 마르튀리온이라는 단어 대신 미스튀리온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어 있습니다. 미스튀리온은 비밀이라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영어성경은 testimony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NRSV 성경은 mystery라고 번역합니다. 그래서 미스튀리온이라는 단어를 쓰게 되면 바울은 하나님의 비밀을 전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지요. 사본에 따라서 이 두 가지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것도 흥미있습니다. 이 두 단어를 같이 사용하면 비밀을 증거한다는 뜻이 되니까요.

사실 비밀을 함부로 전하면 안 되지요. 비밀을 누설하게 되면 아주 곤란한 결과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비밀은 누설하고 널리 알려야 해요.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입니다. 그렇게 누설한다고 해도 이 비밀은 아직 감추어진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그 비밀을 알려 주셔야만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가 됩니다. 비밀을 맡아서 단단한 비밀금고 속에 숨겨두는 것이 우리의 임무가 아니라 그 비밀을 증거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그 비밀을 누구에게는 감추고 누구에게는 알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실 일이지요. 만일 교회가 세상의 지혜로 알 수 없는 비밀을 간직했다고 해서 교만하고 안으로만 똘똘 뭉친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온갖 지혜와 능력으로도 이 비밀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비밀을 증거하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사명입니다.

우리 각자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비밀을 간직한 자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밀을 감추고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담대하게 증거하는 삶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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