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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들이 패싸움을 할 때 (고전 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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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고린도의 교인들을 성도라고 불렀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거룩한 사람들이 되었다는 뜻 아닙니까? 순수하게 이론적으로 따지자면, 예수를 믿으면서 우리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거듭난 새사람이 됩니다. 물론 한 순간에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고 교제가 깊어지면서, 그리고 신령한 지식과 믿음이 점점 자라면서 조금씩 거룩한 성품을 발달시켜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은 지 오래될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더 많이 갖게 되고 결국은 성도라는 이름에 걸맞은 인격과 신앙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론입니까? 아니면 실제로 우리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입니까? 물론 우리가 획일적으로 그렇다 혹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관찰하고 목격한 바에 의하면 예수 믿은 지 오래되었다고 더 도덕적이거나 인격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말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처음 믿었을 때 품었던 뜨거운 감격과 순수한 믿음이 훨씬 더 주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에 가까운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주님과의 교제가 깊어갈수록 더 아름다운 성품으로 변화되는 것이 마땅한 이치인데, 그것이 안 되고 있는 우리의 이 현실을 어찌할 것입니까? 정말 큰 고민거리 아닙니까? 물론 이것은 우리만의 고민이 아닙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하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처음 와서 복음을 전할 때 새로 얻은 회심자들을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하는 것처럼 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신령한 자들은 2장에서 말했던 신령한 자들과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2장에서 신령한 자와 육신에 속한 자를 구분했을 때는 하나님의 비밀을 받은 사람과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으로 나눈 것이었습니다. 비록 그 수준이 낮다고 할 수는 있지만 고린도 교인들 역시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신령한 자들의 범주에 들어가야 하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3장에 들어와서 그들을 신령한 자들처럼 대할 수 없었다고 할 때, 그 신령한 자들은 보다 성숙한 신자들이라고 해야 됩니다. 육신에 속한 자라는 표현 역시 동일한 차원에서 이해하면 되겠지요?

처음에는 그들을 신령한 자들처럼 대하지 못하고 육신에 속한 자들처럼 대했던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영적으로 아직 어리니까요. 아무리 불고기가 맛있고 삼겹살이 맛있다지만 어린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삼겹살을 먹일 수 있습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젖을 먹이고 이유식을 먹이다가 차츰 어른들이 먹는 음식을 먹여야 합니다. 아이가 자랐는데도 계속해서 젖만 먹는다면 영양실조에 걸리고 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해야 합니다.

그런데 3절에서 바울이 뭐라고 말하는지 보세요. 그들이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이제 나이로 치면 제법 컸고 삼겹살도 맛있게 먹어야 할 때인데, 아직도 젖이나 먹어야 할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지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지가 꽤 되었는데, 아직 그 인격이나 윤리적인 생활은 옛날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라는 책망은 예수 믿고 점점 없어졌어야 할 육신적인 성품들이 남아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그들의 삶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들이라고 말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하면 그들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게 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교회 안에서 서로 시기하고 다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육신에 속한 자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는 신령한 자들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다면 무엇이 되는 것입니까?

이것은 그들의 고민과 의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고민과 의문으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야말로 곤고한 자들, 사망의 몸에 갇혀 있는 자들이라는 바울의 탄식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 비논리적인 딜레마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그래도 고린도 교인들의 분쟁은 오늘 우리 시대에 일어나는 교회 안의 분쟁에 비하면 매우 양반입니다. 그들은 나는 바울파다, 나는 아볼로파다, 하면서 나뉘어 싸웠습니다. 그래도 자기들에게 복음을 전해주고 가르쳐준 스승들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랬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의 스타일이 다르고 아볼로의 능력이 또 다르기 때문에 각자 사람들이 자기 취향에 맞는 지도자를 선택해서 추종할 수 있습니다. 돈 때문에 교회가 깨지고 무슨 비리나 추행으로 교회가 박살나는 것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지요.

그러나 바울은 이것을 매우 단호하게 책망하고 있습니다. 특히 자신이 연루된 문제이기 때문에 더 내버려둘 수가 없는 일이지요. 참으로 그들이 바울의 정신과 아볼로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존중한다면 그렇게 나뉘어 싸울 수가 없는 일입니다. 바울이나 아볼로가 언제 자기 세력을 구축하려고 한 적도 없고, 자기 사람을 중요한 자리에 심으려고 한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들의 이름을 빙자해서 그렇게 나뉘어 다툰다는 것에 대해서 심지어는 분노와 모욕까지 느낄 일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바울이라면 어떤 생각이 들 것 같습니까? 또 아볼로의 입장이라면 무슨 생각이 들겠어요? 만약 바울이나 아볼로가 미숙한 지도자라면 이러한 상황을 개인적인 감정과 연결시킬 수 있겠지요. 바울의 입장에서는 아볼로와 비교된다는 것 자체가 모욕적일 수 있습니다. 아볼로는 바울에게서 배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로부터 예수의 도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아볼로는 바울의 제자의 제자인 셈입니다. 또 바울은 사도 아닙니까?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파, 아볼로파가 생겼다는 것은 두 사람이 동등하게 취급되고 있다는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볼로가 바울보다 낫게 생각된다는 뜻입니다. 바울로서는 대단해 섭섭한 일이지요.

아볼로의 입장에서는 어떻습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한 건 물었습니다. 잘 하면 바울의 위상을 넘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이 고린도 교인들을 잘 구슬리면 초기 기독교 세계에서 흔들리지 않는 지도자의 위치를 확보할 수도 있습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무엇이 더 교회를 나누고 싸우게 만듭니까? 교인들의 성숙하지 못함입니까? 아니면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욕망입니까?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교회 안의 분쟁들을 보세요. 모두가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 중심에 있지 않던가요? 만일 바울이나 아볼로가 그런 생각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고린도 교회는 그야말로 우스운 꼴이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나 아볼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일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아볼로는 고린도에 발을 딛지 않았어요. 바울이 아볼로에게 고린도에 가서 일을 좀 해결해보라고 권했어도 아볼로는 아예 발을 끊어버렸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생긴 자기 계보를 발판으로 해서 출세를 해보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뜻으로 간다 해도, 일단 아볼로가 고린도에 나타나면 또 다른 오해와 불필요한 사건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볼로는 모든 문제를 바울에게 위임하고 완전히 손을 뗀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아볼로보다 우월한 권위를 주장하면서 반란세력을 평정하지도 않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누가 더 큰 일을 했거나 더 중요하거나 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밭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에 따라 신실하게 일한 일꾼들입니다. 동역자들이지요. 그래서 바울과 아볼로는 동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한 마음으로 일 잘하고 있는 동지들을 자칫하면 서로 경쟁해서 싸우게 만드는 것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일꾼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의 비밀을 증거하는 본업보다도 자기들의 출세와 명성을 추구하도록 부추기는 것이 누구이겠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사탄인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사탄의 음모가 자행될 수 있습니다. 오늘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특히 교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는 분들이 명심하고 또 본받아야 할 것은 바울과 아볼로가 이 위기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같은 위기라도 그것이 개인과 교회를 무너뜨릴 수 있고, 그 위기를 극복함으로써 더 든든한 교제와 신뢰 위에 아름다운 교회를 세울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심고 물주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이 중요하다고 강조함으로써, 바울과 아볼로를 추종함으로 생겨나는 분쟁의 근거 자체를 무력화시켜버립니다. 중요한 것은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중요하지 않은 심는 일이나 물주는 일을 하는 사람을 추종하고 그것 때문에 갈라져 싸운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공동체, 하나님의 교회에서 매우 가치 없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집에서 종들이 패싸움하는 꼴이 될 것이니 하나님이 그것을 어떻게 보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고 물주는 일을 함으로써 보상을 받는다면, 그것은 일을 맡기신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을 받아야 하는 것이지, 자기 세력을 구축하고 권력을 차지함으로써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보상을 추구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얼마나 육신에 속한 사람을 벗어나서 신령한 자의 단계에 이르렀는가 하는 척도가 될 수 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저 자신부터 돌아보면 아직 육신에 속한 상태에서 많이 벗어나지 못한 것을 봅니다.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비밀을 받은 신령한 자들, 성도가 되었는데, 아직 욕망과 이기심을 따라 행할 때가 많다는 것이 심히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이것을 우리가 인정하고 또한 벗어버리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다면, 우리는 희망을 이야기해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 몸부림치는 것을 보시고 믿음과 능력을 더하여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할 때나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육신의 소욕보다 성령의 소욕을 따라 행하기 위해 애쓰고 실천함으로 날마다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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