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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기 돼지 삼형제 (고전 03: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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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외딴 산 속에 엄마 돼지와 아기 돼지 삼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첫째 돼지는 아주 게으르고 잠이 많았습니다. 둘째 돼지는 일은 하지 않고 먹기만 하는 먹보였습니다. 셋째 돼지는 매우 부지런해서 늘 집안일을 도와주는 착한 돼지였습니다.

엄마 돼지가 아기 돼지들에게 각자 살 집을 지으라고 했습니다. 첫째 돼지는 짚으로 집을 지었습니다. 대충 짓고는 집에 들어가 낮잠을 잤습니다. 둘째 돼지는 나무로 집을 지었습니다. 뚝딱뚝딱 집을 짓고 나니까 배가 고팠습니다. 그래서 얼른 일을 마치고 밥을 먹었습니다.

셋째 돼지는 벽돌로 집을 짓기로 했습니다. 벽돌로 집을 짓는 일은 너무나 힘들고 시간도 많이 걸렸습니다. 첫째 돼지와 둘째 돼지는 셋째 돼지가 땀을 흘리며 일하는 것을 보며 놀려댔습니다. 한참 후에야 셋째 돼지의 벽돌집은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는 날 늑대가 나타났습니다. 첫째 돼지는 자기가 지은 집으로 들어가 숨었습니다. 늑대가 숨을 크게 내뿜자 첫째 돼지의 집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첫째 돼지는 둘째 돼지의 나무 집으로 도망쳐 숨었습니다. 늑대가 주먹으로 집을 쾅 내리치자 둘째 돼지의 나무집이 부서졌습니다. 첫째 돼지와 둘째 돼지는 셋째 돼지의 집으로 도망쳐 함께 숨었습니다. 거기까지 쫓아온 늑대는 셋째 돼지의 벽돌집에 쾅 부딪쳤습니다. 그러나 벽돌집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좋아하는 아기돼지 삼형제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을 위한 단순한 동화이지만, 사실 매우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내용도 이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바울은 바울파 아볼로파 등으로 나뉘어 싸우는 고린도 교인들의 분쟁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바울이나 아볼로는 심고 물을 주는 일꾼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고린도 교회를 향해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의 밭이라면 바울이나 아볼로는 그 밭에서 일하는 일꾼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밭이라고 하면서 또 집이라는 말을 붙여 넣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라면 바울과 아볼로는 그 집을 짓는 목수들이 되겠지요. 집을 짓든 밭을 일구든, 어차피 하나님의 일꾼인 것은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린도 교회를 하나님의 집에 비유를 하면서, 곧바로 바울은 성도의 삶을 집짓기에 비유합니다. 출발은 일단 앞에서 설명하던 심고 물주는 일꾼의 역할과 동일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는 자신의 역할로 시작합니다. 자신은 매우 뛰어난 건축자인데, 특히 집을 지어야 할 기초를 닦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누구나 바울이 닦아놓은 터 위에 집을 세워야 합니다. 어떤 누구도 바울이 닦아놓은 터 외에 다른 터를 놓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가짜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놓는 터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실하고 정확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도 하는 말이, 다른 복음은 없나니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초대교회에서는 여러 가지 이단이나 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서로 다른 주장들이 어지럽게 대두되고 있었습니다.

집을 짓는 데 있어서 기초를 올바로 닦는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훌륭한 건물을 지었다 하더라도 기초가 잘못되어 있으면 그 건물 전체가 헛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첫 단추를 꿰는 것과 같습니다. 첫 단추를 잘못 꿰면 그 다음에 하는 모든 일은 헛수고가 될 것입니다.

전도서 기자가 말하는 것처럼 인간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즉 인간은 자신이 유한하며 절대자의 도움과 구원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구상에는 수많은 종교들이 존재합니다. 종교는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절대자에게 의지하는 행위입니다. 원시적인 형태의 종교도 있고, 매우 발달된 사상체계를 가진 종교도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적 열정은 무엇보다도 강한 신념이 됩니다. 또 종교는 인간의 모든 삶을 지배할 만큼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인간의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절실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정이 과연 그들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 거대한 고층건물 같은 그 사상체계가 과연 그들을 인간의 운명으로부터 구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분명히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외에 다른 터가 있을 수 없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터 아닌 다른 터 위에 세워진 집은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도 바울은 말하기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다른 방법으로 인간은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터를 세우고 아볼로가 벽돌을 쌓아올렸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바울이 심고 아볼로가 물을 주었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의 논점은 이제 그 터 위에 집을 세우는 각자의 삶으로 옮겨갑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나서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베드로의 대답에 매우 만족해하셨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시면서 그 반석 위에 자신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위에 세워진 것이 교회입니다.

자, 이제 각자가 자신의 교회, 자신의 집을 세워야 할 차례입니다. 기초공사는 되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든든한 기초공사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어떤 사람은 금으로 집을 짓기도 하고 보석처럼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갑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자기 목숨을 내어주고 교회와 신앙을 지켰습니다. 금보다 귀한 믿음 아닙니까?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아들로 삼고 평생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감옥에 갇혀서는 자기 먹을 것을 먹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까지 해서 옥중성자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과연 보석처럼 빛나는 믿음이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같은 터 위에 나무로 집은 짓기도 하고 풀이나 짚으로 짓기도 합니다. 예수는 잘 믿는 것 같은데 사는 것은 말씀과 거리가 멀어요. 새벽기도 마치고 돌아오다가 남의 집 호박 따온다는 말 들어보셨나요?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를 드리면서 얼마나 회개기도도 많이 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도 많이 하겠어요? 얼마나 믿음이 좋아요? 그런데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아직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길에서 남의 집 담장에 열린 호박을 따가지고 간다는 거예요.

바울은 말하기를 각자가 살면서 세운 그 공력이 최후의 날에 밝혀질 터인데 불이 그것을 밝힐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불을 꼭 문자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것이 무엇이든 그 믿음을 정확히 테스트해서 밝혀내는 것을 의미할 테니까요. 어쨌든 그렇게 살면서 지은 집이 불속을 통과한다고 해 봅시다. 나무나 풀로 지은 집은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말겠지요?

여기서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를 결코 포기할 수 없는데, 가톨릭에서는 믿음과 행위 모두가 구원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선행이 강조되고 과거에는 고행이 요구되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있어도 행위가 없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가톨릭의 주장입니다.

오늘이 바로 종교개혁 기념주일인데, 그러한 가톨릭의 주장에 반발해서 발생한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종교개혁의 모토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만이 구원을 얻는 데 있어서 필요충분조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신교에서는 믿음이 강조되고 그에 수반되는 윤리적인 삶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루어졌습니다. 사실 이것은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하기를 행함이 없는 믿음은 가짜라고 했거든요. 믿음은 행위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과 행함이 일치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구원을 얻는 데 필요한 믿음이라고 인정받기 곤란하다는 말이지요.

바울은 믿음을 강조하는데, 바울이 행함을 소홀히 하면서 믿음만 강조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바울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강조하게 된 것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유대주의 전통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바울이 말하는 집을 짓는 비유에 의하면 재미있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믿기는 하지만 형편없이 믿는 사람들의 삶은 불에 타 없어져버립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은 아니에요. 구원을 얻기는 보석으로 집을 지은 사람이나 지푸라기로 지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을 결정하는 것은 지은 집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완벽한 터 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두 번 살 수 없습니다. 다시 집을 지을 기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집을 지으면서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지은 집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보석으로 지은 집도 있고 판자집이나 지푸라기로 지은 집도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하기를 그 터 위에 세운 공력에 따라 상을 받는다고 했어요. 불에 타버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사람은 구원을 얻기는 하지만 아무런 상이 없습니다. 물론 구원을 얻었다는 것 자체가 무엇보다 큰 일입니다. 그리고 상급의 차이가 어떻게 천국에서의 삶에 영향을 줄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은 지푸라기 집 들고 갔다가 홀라당 터버리고 불 가운데서 구원을 얻는 것 같은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하루 하루 살아가는 모습은 벽돌 하나 하나를 놓는 일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게을러서 짚으로 대충 얼기 설키 엮은 집, 일하기 싫어서 나무로 얼렁뚱땅 세워 놓은 집은 늑대의 콧바람에 날아가 버렸습니다. 우리가 그런 꼴을 당할 수는 없잖아요?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에 어울리는 튼튼하고 아름다운 집을 지읍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우리의 신앙고백에 어울리는 귀하고 아름다운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또한 상급을 약속받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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