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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든 것을 참으며 바라며 견디느니라 (고전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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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현대 사회의 한 특징이 상대적 가치관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근간의 우리는 전에 없이 '종속'이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종속 경제, 종속 정치, 종속 윤리, 혹은 종속 가치관 하는 것들이 그것입니다.

가령 산유국에서 기름 값이 올라가면 우리 경제는 큰 어려움을 겪게 되고 반대로 기름 값이 내려가면 우리 경제가 나아지는 것을 봅니다. 이처럼 다른 나라의 경제 실정에 따라 우리의 경제가 좌우됩니다. 정치적 문제도 마찬가지여서 다른 나라의 정치 향방에 따라 우리도 같이 움직이는 것을 봅니다. 이러한 관계성으로 전체가 흔들리기 때문에 우리도 함께 흔들려야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는 복잡한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스스로 자전하지 않으면 절대로 균형과 안정을 지켜나갈 수 없다는 이론과 철학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이 악하기 때문에 나도 악할 수밖에 없고, 모두가 절망하고 있으니 나 역시 절망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사랑 받으니 사랑하고 미움 받으니 미워하며, 맞았으니 때리는 것이 아니냐 하고,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종속적 가치관이요 종속적 윤리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주체의식은 어디에 있고, 나의 독립된 인격, 나라고 하는 존재의 현주소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뿐만 아니라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는 이 모든 일, 즉 대상에 따라 변하고 형편과 세월에 따라 흔들리는 것에 대하여 나의 책임은 없습니까? 혹은 함께 흔들리지 않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이처럼 상황에 대한 반사작용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과연 자기 존재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깊이 생각해봅시다.

인간은 결코 상황적 존재는 아닙니다. 나아가 환경의 산물도 아닙니다. 다 변하는 것 같아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서 살고, 다 흔들리는 것 같아도 그것은 한 현상일 뿐, 흔들리지 않는 것이 있기에 세상도 나도, 그리고 오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확고한 응답적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하나님 앞에서의 내 신앙을 분명히 하여야 합니다. 이는 곧 내 인격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사랑의 터전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사랑의 절대성을 믿으십니까? 그리고 사랑의 흔들리지 않는 능력을 믿습니까? 만약 이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그는 이 세대를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며 이미 자기의 삶을 포기한 정신적 자살자라 할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가정 문제를 가지고 상담을 청해옵니다. 본인들은 자기만이 특별한 문제를 가진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마는 상담을 하는 제가 볼 때에는 모두가 하나같이 똑같은 내용의 이야깁니다. '나는 사랑하는데 사랑을 받지는 못한다'고 하는 것 밖에 다른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그분들에게 일러주고 싶은 것은 '사랑은 받았는데 사랑한 것이 없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어느 순간에라도 '내가 사랑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문제는 해결을 볼 수 있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사랑이 어디엔가 있고 이미 내가 그 사랑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을 깨닫는 데서부터 자기의 존재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응답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 중에는 '모든 것'이라고 하는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 말의 헬라 원문은 '판타'인데, 우리가 쓰는 말 가운데에도 이 원어가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이 '판타'는 번역된 그대로 '모든 것'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서, 그 의미상으로는 '모든 경우에' '모든 대상에 대하여' '모든 사건, 모든 환경에서'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절대적인 관계가 됩니다. 사랑은 절대적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상대적인 요동이나 변함이 없는 것이 사랑의 원리입니다.

저는 시골에서 자라면서 어머니 등에 업혀 울며 떼를 쓰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머리에 무엇을 이고 가는 어머니 등에 업혀 울고 울다가 마지막에는 목이 쉬어버린 채 어머니의 등을 마구 때리고 발버둥칩니다. 물론 업힌 아이로서도 불만이야 많겠지요. 그러나 저는 그런 광경을 보면서 어린 마음에 저렇게 억지를 쓰며 어머니 등을 때리는 놈을 내동댕이치고 말 것이지 무엇 하러 저렇게 업고 가는가 싶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하기로 들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어린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모두가 한때 어린아이였고, 지금은 어른이 되어 자녀들을 키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이 부모에게 대하듯이 맞서서 같이 대한다면 야 어찌 부모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아무 때나 울며 억지를 부려도 어머니는 변함없이 그를 사랑합니다.

만약 우리네 사람들이 변덕스러운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변덕스럽게 대하신다면 아마도 살아남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맙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철없는 억지와 엄청난 변덕을 그대로 받아주시고 보아주십니다. 그 절대적인 사랑으로 오늘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사랑 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절대적인 사랑이 없다는 말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 사랑 안에서 살아왔고 현재에도 미래에도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 이하의 말씀에 보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합니다.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으니 절대적인 사랑의 응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 고민이 있고, 무엇 때문에 사랑이 있고 없음을 탓하며 스스로 절망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절대적인 사랑의 길에서 떠났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절대적인 사랑을 믿지 못하는 것은 사랑의 본질인 그 절대성 안에서 내가 살아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미 사랑을 거역하며 살아가고 있기에 사랑으로부터 오는 그 풍성한 위로와 놀라운 능력을 외면하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십자가의 사랑을 재확인 받으며, 구원받는 감격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가페의 사랑을 아는 자는 그도 역시 이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으니 은혜에 감격하고 사랑을 알기에 사랑으로 대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절대적인 사랑을 받는 사람은 절대적인 사랑을 하게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다른 말이 있을 수 없음은 그 사랑을 베푸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친구 목사 한 분이 중학교 다닐 때에 겪었던 일입니다. 하루는 이 친구가 들에 나갔다가 자기에게 대들려는 소를 혼내주다 못해 그만 때려죽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놓고 집으로 돌아와 있는데 그 소 임자가 찾아와서는 대단한 행패를 부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친구의 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얘야 이리 오너라'하시더니 '너 정말 저 집 소를 죽였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예, 그 소가 나를 떠받으려고 해서 죽였습니다.' 아버지는 '알았다'하시더니 아무 말 없이 그 소 값을 물어주시더라 는 것입니다.

그 후에 이 아들이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빌면서 '아버지! 제가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는데 왜 말씀이 없으십니까?' 하고 여쭈었더니 '내 아버지가 그렇게 용서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시더라 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받았기에 나 또한 너를 용서한다-이것이 사랑의 본질이요. 진정한 사랑의 응답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는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을 참는다'고 할 때의 이 '참는다'라는 말은 번역상으로 보아 그 의미 전달이 부족하다고 생각되어 헬라 원문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참는다'의 헬라 원어는 '스테게이'로, '덮는다(cover)'라는 뜻입니다. 이는 단순한 인내가 아니라 감싸주고 덮어주며 보호해준다는 뜻입니다. 그 때문에 현대 헬라어에서는 이 '스테게이'라는 말이 지붕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그만큼 크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 앞에서는 어떠한 비판이나 시비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그보다 훨씬 큰 것으로 전체를 덮어주고, 그리고 침묵합니다.

사랑은 '스캔들(scandal)'을 싫어합니다. 그러기에 모든 것을 덮어주고 감싸줍니다. 어떻게 마음에 있는 것이라 하여 하고 싶은 말을 다할 수가 있겠습니까? 내게 할말이 있다면 저쪽에서도 할말이 있는 법입니다. 사랑은 전체를 덮습니다. 이에 사도 베드로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하였습니다(벧전 4:8).

우리 나라의 전래동화 중에 '꼬마신랑' 이야기가 있습니다. 겨우 여덟 살난 꼬마가 부모님의 뜻에 따라 10년 위의 색시를 맞아 장가를 갔습니다. 그런데 원체 어리고 철이 없다보니 신랑노릇은 못하면서 끼니때마다 누룽지 타령에다 업어달라, 말타기다 하면서 색시를 여간 괴롭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던 어느 날 참다못한 이 색시가 때마침 시부모님들도 다 나가고 없는 터이라 이 꼬마신랑을 덜렁 집어들어서는 지붕 위에다 던져버렸습니다. 옛날 오막살이 초가집의 지붕이 그렇게 낮았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하여 지붕 위에 올리워진 꼬마신랑은 내려달라고 떼를 쓰고 아우성치고 야단입니다.

때마침 밖에 나갔던 시부모가 돌아와 그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너, 왜 그렇게 지붕 위에 올라갔느냐?' 아들보고 묻습니다. 이 때 그대로 한마디만 고하면 이 며느리는 그야말로 죽은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꼬마신랑 보십시오. '큰 호박을 딸까, 작은 호박을 딸까?'하고 능청스럽게 둘러댑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아무 것이나 따 가지고 내려오너라'해서 색시에게는 화가 미치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날밤 꼬마신랑은 색시에게 '색시는 오늘 내가 한마디만 뻥긋하였으면 죽을 뻔했다'라고 의젓하게 한마디했습니다. 그날부터 색시는 꼬마신랑을 다시 보고 잘 모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똑똑한 척하지만, 여덟 살이 아니라 열 여덟, 아니 서른 여덟 살이 되어도 이만큼 되기 어려우니 자못 심각하다 하겠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습니다. 그러므로 더는 말을 하거나 비판의 시선으로 상대를 볼 것이 아닙니다.

그저 모든 것을 덮고 침묵하면서 사랑으로 해석하고 사랑으로 소화해나가야 합니다.

또한 사랑은 모든 것을 믿습니다. 사람에게는 그 처세하는 관계성에 있어서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하나가 속기를 잘하는 사람으로 이는 누구의 말이든지 쉬 믿고 따르다가 바보처럼 속아 손해만 보는 사람입니다. 그런가 하면 냉소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그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듣거나 믿지를 아니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똑똑한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사실은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유형은 현명한 사람입니다.

이는 상대의 속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믿어주는 사람입니다. 저를 사랑하기에 믿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말하는 소위 문제아들은 하나같이 어머니를 미워한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너무 똑똑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매력은 자식을 믿어주는 데에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나쁘다 하더라도 어머니는 그 아들에게 속고 속으면서도 끝까지 믿고 기다립니다. 여기에 어머니의 진정한 사랑이 있고 어머니가 어머니 되는 고귀함과 아름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의 어머니들은 너무 똑똑한 나머지 아이들이 무엇이라고 한마디하면 아예 '내가 속을 줄 아니?'하고 나오기 일쑤입니다. 이렇게 하여 아이들을 고아로 만들고 맙니다. 뿐만 아니라 남편들도 이 '아이큐' 높은 아내가 거북하여 마음놓고 출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좀 속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며 피차에 송사 하는 허물을 책망하고 있습니다(고전 6:7). 결코 몰라서 속는 것이 아니며 능력이 없어서 속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따질 수도 있고 비판할 수도 있으며 아예 둘러엎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기에

믿어 줍니다. 오늘을 믿고 내일을 믿으며, 모든 경우에서 끝까지 믿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또한 끝까지 바랍니다. 그리하여 소망 중에 기대를 합니다. 낙관적이요 낙천적이며 결코 실망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미래지향적입니다.

누가복음 13장 말씀에 보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한 과원지기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인은 3년 동안이나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보면서 왜 땅만 버리느냐며 찍어버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과원지기는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라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이는 곧 '다시 한번 믿어주십시오'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또다시 기대를 하는 이것이 과원지기의 소망입니다. 실로 끈질긴 소망을 가졌기에 그는 결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언제 보아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말씀이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베드로는 그 간절한 간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수치감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보았음에도 갈릴리바다로 물고기를 잡으러 갑니다. 그런데 성경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한마디로라도 자복을 하였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보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네가 나를 위하여 고난과 순교까지도 하게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그 쓸모 없는 사람을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바라보시는 것입니까? 하지만 바로 이 절대적인 사랑이 마침내 베드로로 하여금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히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로서는 그렇게 응답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은 끝까지 바랍니다. 그러기에 어떠한 경우에도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끝까지 견딥니다. 이 '견딘다'라고 하는 말의 헬라 원어는 '휴포메네이'입니다. '휴포'라는 것은 '아래' '밑에'라는 뜻이요 '메네이'라는 것은 '남는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휴포메네이는 '아래에 남는다'고 하는 말입니다. 사랑은 끝까지 견디며 남습니다. 모두가 떠나가고 모든 것이 변하여도 사랑은 남습니다. 이 사랑은 어떠한 비난이나 고난도 다 견딜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옛날 고려장에 관한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의 할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내용이리라 생각합니다. 어느 아들이 연로하신 어머님을 지게로 지고는 고려장을 하기 위하여 깊은 산으로 들어가는 중입니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곳이라 길이 제대로 나 있지도 않은 곳을 이렇게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들의 귀에 자꾸만 무슨 소리가 들리기에 이상한 생각이 들어 돌아다보았더니 지게 위의 어머니가 손에 닿는 나무 가지들을 꺾어서는 길에다 던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시느냐고 물었습니다. 어머니가 대답합니다. '네가 돌아올 때에 길을 잃어버릴까봐.'

순간이 아들은 목이 컥 매이면서 걸음을 멈춥니다.

마침내 뉘우치고 어머니를 업은 채 집으로 되돌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아들은 자기를 내어다버리기 위하여 지게에 지고 가건만 어머니는 자기를 버린 후에 집으로 돌아갈 아들의 길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랑은 끝까지 남습니다.

제2차세계대전 말기에 히틀러가 이스라엘사람 6백만 명을 한꺼번에 무참히 죽였다는 사실은 온 세계가 잘 아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갇혀 있던 지하실 감방 벽의 낙서에는 이러한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상징인 다윗의 별을 그려놓고 그 아래에 '비록 태양 빛은 내게 비추어오지 않으나 나는 태양이 있는 것을 믿노라! 나는 비록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으나 진실한 사랑이 있는 것을 믿노라! 비록 하나님은 내게 침묵하고 계시지만 나는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노라!'라고.

여러분! 사랑은 끝까지 남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분을 사랑하며 또한 그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진실로 내 모든 허물을 덮어주는 사람, 나를 끝까지 믿어주는 사람, 내게 소망을 걸고 기대하는 사람, 그리고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견디어주는 사람, 우리는 그러한 사람에게 존경을 바치고 마음을 엽니다.

여러분,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바 십자가의 사랑, 아가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로 이러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랑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다. 이미 그런 사랑을 받으며 살아왔기에 오늘이 있는 것입니다. 지난날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도 그분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또한 내가 주를 잊어버리고 행할 때에도 주님은 나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곁길로 갈 때에도 그분은 나를 붙들어주셨습니다. 이처럼 끝까지 믿어주고, 끝까지 참아주셨기에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이 사랑의 응답자로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살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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