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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자세 (빌 0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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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대한민국 땅 어디를 가도 교회가 없는 곳을 찾아보기 힘들만큼 날로 넘쳐 나는 붉은 십자가 네온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교회가 없거나 멀어서 다닐 수 없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문밖을 나와 고개만 들면 얼마든지 교회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단히 큰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교회의 숫자가 날로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부패되고 타락된 모습으로 사회가 변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혼율이 30%를 넘어서고 있고 고아원에는 가정의 파괴와 더불어 버려지는 아이가 넘쳐 나고 있고, 각종 범죄 연령은 점점 낮아지고, 젊은이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러한 문제점들을 간파하고 도덕성 회복이라는 이름으로 사회 갱신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지만 오히려 죄악의 깊은 골은 그 깊이를 더해만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왜 이렇게 방황하고 있을까? 그 이유는 한 마디로 교회가 복음의 본질을 점차 퇴색시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교회를 향해 높은 도덕성을 요구합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자연히 성도들에게 율법적인 신앙을 강요하게 되고 성도들을 거듭남의 체험은 경험하지도 못한 채 기형적으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추구하는 것이 결코 높은 도덕성일 수 없습니다. 성경이 단순하게 미국의 대통령이 손을 얹어 선서하고, 결혼하는 남녀가 손을 얹어 언약하고, 일부의 사람들이 법정에서 손을 얹어 서약하는 데 쓰여지라고 있지 않습니다. 교회가 추구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핵심적인 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있습니다. 만일 이 한가지 사실만이라도 바로 인식한다면 오늘날의 교회와 사회는 결코 방향을 잃은 채 헤매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오늘날 이 나라에는 많은 교회, 많은 교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거듭난 의인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는 신앙입니다. 이제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갖기에 힘쓰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성령이 가르치는 삶의 모양들을 되짚어 보고자 합니다.

1.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심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 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종교의 특징은 그들의 신들을 하늘에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들을 부르기 위해 지성을 드리고 설령 그들이 죄를 짓더라도 죽기 전까지만 죄를 덮을 만한 선행을 쌓는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존재는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대하여 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셨습니다. 가난하고 매력도 없는 외모에 평범한 소시민으로서 끝내 죄인의 모습으로 죽으심으로 우리 곁에다가 서셨던 것입니다. 초대 교회로부터 지금까지 일부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이 믿기지가 않는 듯 예수님이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이 문제를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2, 3)

예수님은 우리와 동일한 모습으로 오셨으며, 또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물론 육신의 눈으로 이러한 문제를 바라본다면 자칫 위험한 신앙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예수님을 찾게 된다면 '자칭 예수'라는 자들에 의해 우리의 믿음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예수님은 성령의 모습으로 계십니다. 예수님을 대신해서 성령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삶의 한 가운데 계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양분을 공급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의 관계를 포도나무에 비유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포도나무 가지 된 우리가 포도나무인 예수님께 붙어 있지 않는다면 결단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다시 생각해 본다면 만일 우리가 포도나무인 예수님께 붙어 있다면 자연적으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는 자들에게 열매 없는 삶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의 삶이 오랜 신앙생활에도 불구하고 열매 없는 삶으로 일관하고 있다면 자신의 내면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고 계신지의 여부를 진단해야 합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지 않고 있다면 오랜 신앙생활, 많은 성경 지식, 쌓은 선행에도 불구하고 지옥의 자식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시는지를 바로 이순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믿음의 삶을 지속해 가시기 바랍니다.

2. 믿을 뿐 아니라 고난도 함께 받는 삶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보편적인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찾는 이유는 대부분 복을 받기 위한 데 있습니다. 이는 기독교를 단순히 하나의 종교라고 생각하는 데서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의 역할은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데도 목적이 있지만 세상에서 선행을 쌓으므로 이 땅에서도 잘되게 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복음의 내용은 이러한 기대를 여지없이 깨뜨리고 있습니다. 오히려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복이 아니라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참 믿음을 소유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승승장구하며 형통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힐난과 핍박입니다. 훗날 영광을 얻기 위해 고난은 필수적인 과제임을 성경은 명백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

오히려 예수님은 복이 있는 사람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한결같이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자들이 진정 복 받을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마 5:2-12)
믿음의 선진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당연시했고 피하기 위해서 구차한 방법을 쓰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약속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도 믿음만으로도 희생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11:35-40)

초대교회의 많은 성도들 역시 고난받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극한 상황에서도 복음이 더욱 확산되는 기적을 만들어 갔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두려워한다면 그 믿음이 온전한 것인지를 진단해야 합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고난받는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히려 장차 받을 상을 생각하며 더욱 주님을 의지하는 삶의 모습으로 변해야 합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이제 우리는 이 땅에 대한 미련을 떨쳐 버리고 장차 우리가 가야 할 본향인 천국에서 받을 상을 생각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다 지혜롭게 살아가는 성도가 되도록 최선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부디 그리스도인으로서 후회 없는 삶을 설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본이 되는 삶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4-16)

성경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 믿음은 계승되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믿음의 역사는 그의 후손들에 의해 이어져서 심지어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그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마 1장). 신약의 시대에 이르러서도 사도들에 의해 믿음은 계승되고 오늘날까지 그 믿음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믿음은 결코 독불장군처럼 스스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전해지는 자가 없이 교회는 세워지지 않으며, 누군가에게 들음이 없이 믿음은 세워지지 않습니다. 이디오피아(구스)의 내시도 성경을 읽고 묵상하기도 했지만 빌립을 만나기 전에는 깨달아 알 수 없었습니다. 고넬료의 가정 역시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베드로를 만나기 전에는 구원과 상관없는 집이었습니다. 한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은 그들의 증거가 단순한 복음뿐만이 아니라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열매 없는 복음은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위에 베드로가 말한 예수님의 증거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성품이 온전하시기 까닭에 자녀 된 우리가 온전해져야 하는 것은 매우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게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그리스도인이 술, 담배를 하지 않고, 혐오스런 식품을 먹지 않으며, 불의한 자리에 가지 않는 것은 건강이나 생활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더욱 이유는 본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다소 긴장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만 의식하면 되지 사람을 의식할 필요가 전혀 없노라고 말합니다. 물론 삶의 중심이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보다 효과적인 복음 전도를 위해서는 본이 되는 삶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권면하기를 믿음뿐만이 아니라 착한 양심으로 사역할 것을 권면합니다.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8,19)
온전한 믿음은 결국 우리를 착한 양심을 갖도록 할 것입니다. 복음 전도자가 양심을 저버리고 복음을 무기로 삼는다면 수많은 영혼을 지옥으로 몰아 넣게 될 것입니다.
부디 온전한 복음과 믿음 위에 본이 되는 온전한 삶의 모습을 더함으로 이 시대에 쓰임 받는 일군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위에 언급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세는 삶속에 자리한다면 결코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지어지고 다듬어져 가는 건축물(성전)입니다. 아무리 좋은 건축물도 쓸고 닦고 수리하지 않으면 흉가가 되듯이 우리의 영혼이 언제나 그 아름다움을 지켜 가기 위해서 언제나 근신하며 말씀으로 다듬고 세워 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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