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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 안에서의 기쁨 (빌 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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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기쁨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미 기쁨에 대해서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는 이런 제목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이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는 예수 믿는 사람만이 아는 기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음에 두고 설교를 들으면서, 또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묵상하면서 ‘나는 이 기쁨을 알고, 이 기쁨을 누리는 사람인가?’를 자문자답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중 기쁨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어린 아기들을 참 좋아합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하루 400번 이상 방긋 웃는 그 웃음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른들은 하루에 15번 정도 웃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린 아기들을 보면 방긋 웃는 모습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습니다. 그 웃는 모습에 매혹되어 우리는 아기들을 사랑합니다. 이 말은 누구나 기쁨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슬퍼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중 아무도 기쁨 없는 세상을 살지 못합니다. 기쁨이 송두리째 다 쓸려가 버린 인생을 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떤 형편에 있던지 크고 작은 기쁨이 그 속에 담겨 있기에 사는 것입니다. 높은 고층 아파트에 살면서 먼 발치로 내려다보이는 달동네의 판자촌을 보고 있자면, ‘저기에서 어떻게 살까? 도무지 인생을 사는 재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달동네의 그 비탈진 길을 올라가면서 한번 들어보십시오. 다 기울어져가는 판자집 안에서도 간간히 웃음소리가 새어 나옵니다. 어린아이의 웃음소리, 마음 놓고 웃는 부부의 웃음소리도 새어 나옵니다. 만약 삶에서 기쁨이 고갈되어 버리면 자칫 탈선할 위험이 있습니다. 즉 어떤 악한 방향으로 기쁨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무서운 범죄에 빠지기도 합니다. 가령 요즘 젊은이들은 마약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TV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마약중독자의 말 한마디가 아직도 귀에 남아 있습니다. “그것을 피우면 어때요?”라는 질문에 “말 못할 정도에요. 너무 좋아요.”라고 일축하는 것이었습니다. 평소에 건전한 기쁨을 잘 모르거나 그 기쁨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잘못된 곳에서 잠시 느끼는 기쁨마저도 찬양합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있어서 기쁨이란 중요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오늘 본문은 참 흥미진진한 말씀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절) 성경을 읽으면서 이 본문만큼 마음에 가책을 주는 본문도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기뻐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마음에 찔림을 받습니다. 또한 이 본문은 선망의 대상이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항상 기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이 정말로 가능한 일일까? 그렇다면 얼마의 돈을 주고라도 손에 넣고 싶은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24시간, 365일,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다면 우리만큼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날 사람들이 기쁨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지 모릅니다. 일례로 무거운 골프채를 메고 돈을 들이면서 동남아, 하와이로 골프 치러 가는 사람들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불과 몇 시간 동안 골프를 치면서 얻게 되는 즐거움을 위해 그처럼 많은 것을 투자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대로 항상 기뻐할 수만 있다면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우리가 다시 한번 말씀을 보면서 가책과 더불어 ‘내가 이 말씀대로 살았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가지십시오. 그러면 성령께서 이 기대에 부흥하는 은혜를 우리 마음 속에 주실 것입니다.
기독교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만일 기독교에 기쁨이 없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아무런 매력도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세상을 흔들어 놓는 기독교 안에는 분명히 기쁨이 있습니다. 그 중심에 기쁨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울한 그리스도인은 그 자체가 모순이다.” 어떻게 예수를 믿으면서 우울한 삶을 살 수 있냐는 말입니다. 또한 “기독교를 검은 상복과 슬픈 얼굴에 연관시키는 것만큼 해를 끼치는 것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곧 기독교에는 세상이 모르는 독특한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기쁨을 알면 예수를 바로 믿는 사람이고, 이 기쁨을 알면서도 잘 누리지 못한다면 병든 신앙이고, 이 기쁨을 전혀 모른다면 아직도 기독교의 신앙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한 사람으로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주의 깊게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내가 항상 기뻐하고 있는가? 기뻐할 수 있는가?’를 자문해보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명령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마음에 담고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본문의 강조점은 ‘주 안에서’라는 말에 있습니다.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이 말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말의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정확한 대답을 얻기 위해서는 비교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을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바울이 기뻐하는 모습을 면밀히 살펴보면 ‘주 안에서 기뻐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사도이고 특별한 계시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울이나 우리나 똑같습니다. 바울이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었다면 우리도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기뻐하는 모습을 살펴보면 이러한 보편적인 조건을 벗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전문적으로 상담학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의 연구를 보면, 사람들이 언제 기뻐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4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우선 사람이 기뻐하려면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으면 기쁨이 생깁니다. 또 자기가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손에 넣었을 때 기뻐한다고 합니다. 돈을 벌고 싶어하는 사람은 돈을 벌었을 때 기뻐합니다. 명예를 얻고 싶어하는 사람은 명예를 얻었을 때 기뻐합니다. 학문의 깊은 경지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만족스러운 연구 결과를 얻었을 때 기뻐합니다. 어린아이는 자기가 원하는 장난감을 손에 넣었을 때 기뻐합니다.
또한 자기의 형편을 좋게 받아 들일 때 기뻐한다고 합니다. 내가 잘살든 못살든, 내 자신의 형편이 형통하든 형통하지 못하든, 자기의 형편을 좋게 받아 들이면 거기에 기쁨이 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자기가 갖고 있는 소중한 것을 남과 나눌 때 기쁨이 온다고 합니다. 재산이 있는 사람이 재산을 나누어 선한 일에 투자할 때 기쁨이 옵니다. 지식을 가진 사람이 후학들에게 지식을 나눌 때 기쁨이 옵니다. 좋은 소식을 받은 사람이 그 소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때 기쁨이 생깁니다. 보통의 심리학자들은 이런 네 가지로 기쁨의 정도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을 보면 이 네 가지 보편적인 조건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기쁨은 갑자기 하늘에서 쏟아져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뛰는 기쁨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기쁨을 말합니다. 바울 자신처럼 우리도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바울의 경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로마서 5장을 보면 이 사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롬5:3)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환란이나 핍박에 대해서는 북한 성도들을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혹독한 핍박을 받는 중에서도 즐거워하고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5절) 다시 말하면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막 흘러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무한히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난을 당해도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바울만큼 환란과 핍박을 많이 받은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사실 때문에 매를 맞으면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너무나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자신의 외아들을 포기할 정도로 우리를 완전히 사랑하셨습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는 그 사랑을 마음 가득히 담고 있습니다. 내가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하나님의 사랑은 폭포수같이 우리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슬플 때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를 조용히 묵상해 보십시오. 마음이 아플 때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바울처럼 우리도 기뻐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은 기쁨을 자아냅니다. 만유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나 같은 것을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면 틀림없이 그 사랑은 우리에게 기쁨을 안겨줍니다.
헨리 나우웬이라는 유명한 분이 한 말입니다. “기쁨은 행복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기쁨과 행복은 다릅니다. 기쁘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많은 일에 불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쁨은 여전히 그 불행 속에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에 불행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나 상식적으로 알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나에게 기쁨을 자아내지 못합니다. 나에게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눈물을 흘리는 슬픔 속에서도 그 사랑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을 나에게 회복시켜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할 수 있었기에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절을 보면,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안에서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바울 자신이 주안에서 항상 기뻐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7, 8절에 가서 우리는 그 기쁨의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한마디로 요약하면 예수님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기뻐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얻었고, 예수님을 소유하며 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만큼 이 세상에서 소중한 분은 없습니다. 예수님만큼 우리에게 복이 되는 분은 없습니다. 예수님만큼 우리에게 기쁨의 원천이 되는 분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 때문에 하늘에 있는 모든 축복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띠라서 바울은 이 예수님을 발견하자마자, 이 예수님을 소유하자마자 너무나 좋아서 다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취급해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발견하여 그분을 모시고 삽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소유하고 삽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우리가 소유함으로써 받아 누리는 은혜는 얼마나 대단합니까? 나의 모든 죄가 용서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손을 잡고 이 험한 세상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응답 받는다는 확신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또한 누구도 우리를 헤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얻자 그분을 뒤 따라오는 하늘의 모든 영광스러운 축복이 다 내 것이 되었습니다. 이 예수 때문에 바울은 기뻐했습니다.
지난 몇 개월 사이에 우리 교회는 엄청난 슬픔을 맛보았습니다. 너무나 존경스러운 장로님 한 분이 나이에 비해서 일찍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바로 송달 장로님이십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와 함께 10여 년 동안 주님의 영광과 교회를 위해 함께 뛰며 섬기던 양수봉 목사님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것은 저에게 굉장한 고통이자 아픔이었습니다.
사랑의교회 24년 역사를 돌이켜볼 때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서 저와 가까이 일하신 분 중 빨리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연속적으로 이런 일을 당하자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모릅니다. 너무나 존경스러운 분들이었습니다. 너무나 믿음이 좋은 분들이었습니다. 너무나 예수님을 사랑하는 분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싱글벙글 할 정도로 기뻐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좋은 분들을 왜 하나님께서 일찍 데리고 가셨는지 알 순 없지만, 그 분들을 잃어버렸다고 하는 생각에 자주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그럴 때면 제 눈 앞에 스쳐 지나가는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10번, 20번, 100번이고 고통과 슬픔이 올 때마다 제 눈 앞에 나타나는 말씀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현재의 고난, 즉 지금 사랑하는 자를 잃어버리고, 눈물에 젖어 있고, 가슴이 아프게 되는 이런 고난이 아무리 커도 송 장로님과 양 목사님이 하늘나라에서 누리는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만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들이 지금부터 누리고 있는 영광입니다. 그 영광에 비하면 지금 슬퍼하는 것이나 고통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비교할 수조차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얻자마자 함께 덩달아서 얻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늘의 축복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내가 갖고 있는 것이 별로 없어도 예수님을 얻으면서 함께 얻게 된 하늘의 축복들을 생각하면 기쁨이 솟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항상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로 바울은 자기 형편을 좋은 것으로 받아 들였기에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가 당하는 모든 형편을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것으로 받아 들이면서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4:10-11) 비천하거나 풍부할 때도, 배고프거나 배부를 때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비결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바울은 자신에게 능력 주시는 예수 안에서, 성령 안에서 자신이 당하는 모든 형편에 자족할 수 있는 능력을 체득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의 형편을 살펴보면 솔직히 기뻐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바울에겐 처자도, 혈육 한 점도 없었습니다. 사람이 늙어가면서 결국 남는 것은 가족 밖에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마음이 답답하거나 슬플 때, 그래도 아내와 자식이 있어서 서로 주고받고 위로하는 가운데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게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주로 낙천적이고, 남보다 많이 웃고, 기뻐하는 사람들은 건강한 사람들입니다. 건강하면 힘이 솟구치므로 남보다 밝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몸이 약하면 나오던 웃음도 기어들어가 버립니다. 바울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자기만이 아는 혹독한 육체의 고통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평생 그 고통에서 벗어나질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기뻐한 이유는 모든 고통까지도 좋게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한번 보십시오. 그가 성공한 사람입니까? 물론 긴 역사적인 안목을 갖고 볼 때는 바울처럼 위대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상황에서 그는 세상의 구경거리였습니다. 만물의 찌끼같이 낮은 자리에 처하더라도 그는 복음을 위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 기뻐한다고 소리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런 처지에서도 그는 기뻐했습니다. 이 감옥도 하나님이 주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울에게 소망이 있습니까? 빌립보서를 한번 읽어보십시오. 그는 스스로 고백하기를 자신은 생과 사, 삶과 죽음 사이에 끼여 있다고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죽음조차도 주를 위한 것이라면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각자가 처한 형편이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만족스러워 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불만족스러워 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행복해 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하루하루 사는 것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형편에 놓여 있든지 우리는 바울처럼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나의 형편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받아들일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다고 판단되기에 나에게 허락하신 것으로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좋게 받아들이고 감사하면 모든 조건에서 행복하게 됩니다. 모든 형편을 하나님이 주신 선한 것으로 받는 사람에게는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은혜가 있습니다. 바울이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바울은 자기가 갖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 곧 예수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므로 기뻐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1:18)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바울의 형편을 살펴봐야 합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그곳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 결과 간수와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또한 네로의 궁전에까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렇듯 예수를 전하는 것이 바울에겐 굉장한 기쁨이었지만, 감옥에 갇혀 부자유스러운 몸이기에 전하는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자 밖에 있는 사람들이 열심히 복음을 전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갇혀 있어도 복음이 증거 되고, 오히려 갇혀 있음으로 다른 사람이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너무나 기뻐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가장 소중한 존재로 생각한다면, 그분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나누는 것은 우리에게 기쁨을 안겨다 주는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전하면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전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전도해 보십시오. 답답할 때 차라리 길에 나가서 전도하십시오. 울화통이 터질 때 다 접어두고 아는 사람을 찾아가서 예수 믿으라고 해보십시오. 아무것도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없어 우울할 때 누군가를 붙들고 예수를 왜 믿어야 되는지를 설명해 보십시오. 자기도 모르게 마음 속에 기쁨이 솟구쳐 오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좋아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을 남에게 나눠주면 거기에는 분명히 기쁨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경우를 검토해보면 그가 어떻게 기뻐할 수 있었는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여기에서 ‘주 안에서’의 뜻이 무엇인지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앞서 네 가지로 말씀 드렸습니다. 먼저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에 항상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가장 소중한 예수님을 얻었기에 항상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모든 여건, 처지, 형편을 선하게 여기기에 항상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있는 가장 소중한 예수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으므로 항상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기뻐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저의 길지 않은 인생 중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한 사람을 찾으라면, 저는 두말없이 저의 주일학교 선생님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분은 몇 년 동안 저를 가르치셨습니다. 그 때는 철이 없었으므로 아무것도 몰랐지만, 이제 돌아보면 제 신앙생활에 있어서 결정적인 영향을 주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은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여 선생님입니다. 그리고 지난 수십 년 동안 저는 그분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항상 서로 지켜볼 수 있는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분은 너무나 가난했습니다. 조그만 초가집 외에는 가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무능한 남편을 만나 평생 그를 십자가로 짊어지고 살아야 했습니다. 게다가 자녀들도 많아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부산으로 옮겨 용두산 밑 피난민들의 판자촌에 끼여 살 때입니다. 용두다리 옆에 조그만 장소를 하나 얻어 낡아빠진 재봉틀을 갔다 놓고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가지를 기워주면서 한푼 두푼 벌면서 살아갔습니다. 가난해서 교회를 가도 사람 대우를 잘 못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그분을 만날 때마다, 또 그분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에 기억되는 것이 있다면 그 얼굴에 항상 기쁨이 충만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고된 삶을 살면서 많이 울기도 하고, 어떤 때는 답답해서 잠을 이루지 못할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기쁨이 그분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만 생각하면 그리스도안에서 기뻐하는 사람의 모습을 항상 생각하게 됩니다.
그분은 예수 한 분 때문에 어떤 환경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비결을 배우며 살았습니다. 나이가 좀 드셨을 때 어느날 입니다. 그날 따라 새벽에 교회에 나가 열심히 기도하고, 모든 사람이 다 간 후에도,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하고 찬송을 수없이 부르다가 집에 돌아가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지금쯤 하나님 나라에서 얼마나 춤을 추며 사실까요? 그런 분을 생각할 때면 제 자신이 가책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왜 목사이면서 그런 기쁨을 항상 소유하고 살지 못할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다고 해서 우리에게 기쁨이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바울처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기 위해서는 선택을 해야 됩니다. ‘기뻐하라’는 명령에 해당되는 헬라어 ‘카이레테’(chairete)에는 습관적으로, 계속적으로 기뻐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기쁨을 선택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원망하고 분개할 이유를 갖고 살 수도 있고, 기뻐할 수 있는 이유를 갖고 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선택하면 반드시 그 선택한 것이 내 손에 들어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야. 그러므로 항상 기뻐할 수 있어.” 하고 기쁨을 선택하기로 결단하면 그 기쁨은 내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선택도 안하고 자연적으로 기쁨이 굴러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절대로 그 기쁨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기뻐하라’고 명령했으므로 “주여, 알겠습니다” 하고 기쁨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마음에 기쁨이 솟구치는 것입니다. “내 형편이 아무리 어려워도 이 형편을 하나님이 알아서 주신 것이니까 선한 거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자족하는 마음으로 기쁨을 선택하면, 그 기쁨은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이웃을 찾아가 한번 전도해보기로 결단하면, 그 기쁨은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가만히 있지 마십시오. 선택하십시오. 명령에 복종하십시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기쁨의 조건을 갖고 있습니다. 설령 이 세상이 다 무너져 없어진다 할지라도, 내가 소중하게 여기던 모든 것을 다 빼앗긴다 할지라도, 우리는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의 조건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주 안에서의 조건입니다. 이 주 안에서의 조건을 믿음으로 받아 들이고, 그 다음 기쁨을 선택하십시오. 그러면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축복이 날마다 우리에게 찾아 올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주 안에서의 양지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주 밖에서의 음지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양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기독교에는 독특한 기쁨이 있습니다. 이 기쁨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아름다운 은혜가 성령 안에서 우리 모두에게 넘치기를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진정한 기쁨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세상에서 우리로 하여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영광과 특권을 안겨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여, 오늘 예배 드린 모든 성도들, 나는 왜 항상 기뻐하지 못하는가를 깊이 반성하고 돌아가게 하시고, 주 안에서 기뻐하기로 선택하는 아름다운 삶을 날마다 이어갈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무엇 때문에 그렇게 기뻐하냐고 물어올 수 있도록 우리 삶을 기쁨으로 충만케 해주시옵소서. 특별히 생활고와 연약한 몸으로 고통하는 자녀들에게, 세상에서 실패하여 좌절하고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이 신비스러운 기쁨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옥한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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