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미래지향적인 교회 (빌 03:12-14)

첨부 1


오늘은 우리 승동 교회가 설립된 지 110년이 되는 날입니다. 교회 설립 110주년을 맞이해서, 승동 교회가 어떻게 설립되었는지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부터 110년 전인 1893년, 미국의 선교사 사무엘 무어 목사님과 16명의 교인들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처음으로 예배를 드렸던 장소는 이 자리가 아니고 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 앞에 실개천이 흘렀고 그 주변에 고운 담장들이 둘러쳐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곳 지명을 곤담골 또는 부르기 좋게 곤당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의 처음 이름은 곤당골 교회였습니다. 그러다가 6년 뒤인 1899년, 우리 교회의 이름은 중앙 교회로 바뀌어졌습니다. 우리 교회가 한국에 있는 모든 교회들 가운데서 중앙적인 역할을 잘 감당해야 되겠다는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가졌던 꿈과 비전이 포함된 이름이었습니다. 과연 그때부터 우리 교회는 모든 면에서 한국 교회의 중앙이 되었습니다. 기도 운동의 중앙이 되었고, 또 영적 부흥운동의 중앙이 되었습니다. 일제 시대 우리가 나라를 빼앗겼을 때는 우리 교회가 독립운동의 중앙이 되기도 했습니다. 3·1운동의 중심이 되었던 것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뒤 우리나라 교계에 자유주의신학의 물결이 거세게 불어닥치기 시작했을 때, 우리 교회는 진리를 지키고 수호하는 일에도 중앙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교회는 한국에 있는 모든 교회들 가운데서 중심이 되는 역할을 지금까지 잘 감당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1905년, 우리 교회는 곤당골에서 지금의 위치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 지역을 인사동이라고 부르지 않고 '승동(承洞)'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을 승(承)자에 마을 동(洞)자였습니다. 현재 조계종이 위치해 있는 지역을 그 당시에는 사동(寺洞), 곧 절골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사동과 연결되어 있다는 뜻에서 이을 승(承)자를 써서 '승동(承洞)'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곳 승동으로 옮겨오면서, 이곳의 명칭을 따서 승동(承洞) 교회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물론 지금처럼 이길 승(勝)자를 쓰지 않고, 마을 이름 그대로 이을 승(承)자를 썼습니다. 그러다가 1907년, 그 당시 유명한 부흥 목사님이었던 길선주 목사님을 강사로 모시고 우리 교회에서 경기도 연합 대사경회를 개최했습니다. 그때 길선주 목사님은 부흥회를 인도하시면서 설교 도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앞으로 승동 교회는 교회 뒤에 있는 사동(寺洞), 곧 절골과의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또한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승동 교회는 앞으로 모든 면에 있어서 한국 교회의 모범이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처럼 이을 승(承)자를 쓰지 말고, 이길 승(勝)자를 쓰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그 제안을 기쁘게 받아 들였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우리 교회는 이길 승(勝)자를 써서 승리하는 교회라는 의미의 승동(勝洞) 교회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뜻깊은 교회설립 110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 지나간 110년 동안 우리 교회를 지키시면서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훌륭하신 믿음의 선조들이 우리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교회를 생각하면 지금도 여러 가지로 감사할 조건이 너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저 지나간 날들의 도취한 채, 과거의 역사와 전통만을 자랑하는 과거지향적인 교회가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창조적인 발전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우리가 현실에만 만족하며, 보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꾸려하지 않는 현재지향적인 교회가 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보다 더 나은 미래를 바라보면서 부단 없이 뛰어가는 미래지향적인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교훈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바울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그는 성숙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서 그는 자기가 이미 얻었다고도, 온전히 이루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그는 뒤에 있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만을 향해서 끝까지 좇아가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미래지향적인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 가졌던 미래지향적인 신앙의 요소를 세 가지로 나누어 함께 살펴보면서 우리도 바울처럼 미래지향적인 신앙, 또 우리 교회도 미래지향적인 교회의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바울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12-13절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사도 바울은 겸손하게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직까지 부족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푯대를 향하여 좇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동안 사도 바울이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열심히 살아왔고, 또 훌륭한 일들을 많이 해 왔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는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바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오직 예수님 한 분만 바라보면서 살아왔습니다. 그의 삶의 표어는 이러했습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을 것이다.'
그는 복음을 전하던 중에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수없이 매를 맞았습니다. 감옥에도 여러 번 갇혔습니다. 또 고생도 많이 겪었습니다. 때로는 타고 가던 배가 파선을 해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는 주리며,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핍박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숨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에게는 값진 체험도 많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고린도후서 12장에 기록된 대로 그는 셋째 하늘, 곧 낙원에도 이끌려 올라간 신비한 체험을 했습니다. 하늘 나라의 영화로운 광경을 자기의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병 고치는 능력도 주어졌습니다. 그는 많은 병자를 고쳤습니다. 그는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도 쫓아내 주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죽은 청년 유두고를 기도해서 다시 살려주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그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서 수많은 사람들이 멸망의 길에서 구원의 길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디모데, 디도, 누가, 빌레몬, 오네시모, 루디아 등 귀한 일군들도 길러내었습니다. 그가 세운 교회들도 여러 곳에 많았습니다. 또한 그는 신약성경의 거의 절반에 이르는 책들을 기술했습니다. 거기다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서 빌립보 서신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순교할 직전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그만하면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만하면 얼마든지 자랑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아직도 자기는 불완전한 존재요, 미완성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의 푯대는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바라보니까, 너무나도 뒤쳐져 있는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도 푯대를 향해서 계속해서 전진해야 할 만큼 자기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만하면 됐지 뭐.' 그러면서 작은 성취에 자만해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더 이상 창조적인 발전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아직도 멀었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만이 노력하게 되고 그 결과 성장과 발전이 기대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분이 계시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만, 다른 교회는 아마도 이런 분이 계실 것입니다. 장로가 되기 전에는, 권사가 되기 전에는 매우 겸손합니다. 봉사도 열심히 합니다. 그러다가 장로가 되고 나면, 권사가 되고 나면 사람이 갑자기 달라집니다. '사람이 달라져도 어떻게 저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의아심이 들 정도입니다. 목에 힘이 들어가서 뻣뻣합니다. 어깨에도 힘이 들어가서 걸음걸이가 달라집니다. 섬기려는 자세가 아니고,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자세를 취합니다. 더더욱 가관인 것은 완전히 안하무인의 행세를 하려고 듭니다. 마치 자기가 교회의 주인이나 되는 것처럼, 그저 아무데나 들쑤시고 아무한테나 야단을 치려고 합니다. 이런 분은 교회 직분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장로가 되었으니까, 권사가 되었으니까, '이만하면 다 된 것이다'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토록 훌륭한 일을 했지만, '나는 아직도 멀었다'라는 겸손한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면서, 자기의 부족을 알아서 날마다 자신을 채찍질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만하면 되었다'라고 자만하지 말고, '나는 아직도 멀었어'라는 겸손한 마음으로 교회를 섬겨야 할 것입니다.
교회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만하면 되었다.'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현실에 안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새로운 꿈과 비전을 품고서 교회의 장막터를 더욱더 넓혀 나가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바울은 과거에 집착하지도 않았습니다.
13절 하반부입니다.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오직 한 일.' One thing, 즉 한 가지 일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앞도 바라보고, 뒤도 바라보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앞만 바라보면서 전진하는 한 가지 일에만 집중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지난 날에 대해서는 깨끗하게 잊어버렸습니다. 경주장에서 푯대를 향하여 좇아가는 사람이, 100m 달리기 시합을 하는 사람이 한 번이라도 뒤를 돌아보면 그만큼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결코 뒤를 돌아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바울의 과거는 매우 화려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화려했던 과거 경력을 빌3:4-6에서 7가지로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이것뿐이겠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바울은 태어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습니다. 그는 당대 제일 가는 가마리엘 문하에서 수학을 했습니다. 그는 히브리 문화, 헬라 문화에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난 뒤에는 자신의 화려한 과거의 경력들을 어떻게 여겼다고 했습니까? 빌3:7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그는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을 모두 해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설정한 푯대를 향해서 좇아가는데 방해가 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빌3:8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바울은 8절에서는 과거의 자신의 화려한 경력들을 더럽고 냄새나는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두 번 다시 쳐다보기도 싫은 것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기의 생각 속에서 완전히 그러한 것들을 지워버리고 말았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 가졌던 세상적인 기질, 또 잘못된 습성 등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씻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 8대 당회장이었던 김익두 목사님은 본시 유명한 깡패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고 새 사람이 되기로 작정하고 난 뒤에 자기를 아는 사람들에게 부고장을 돌렸습니다.
'여러분, 과거의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이제 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김익두입니다. 그동안의 저의 잘못을 진심으로 사죄합니다.'
뒤에 그는 신학교에 들어가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되고 난 뒤에도 이따금씩 과거의 깡패기질이 불쑥불쑥 되살아나려고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자기 자신을 향해서 이렇게 호통쳤습니다.
'죽은 김익두야!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아직 울려 퍼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너는 왜 벌써부터 되살아나려고 하느냐? 아직은 때가 아니다. 더 죽어 있어라.'
그러면서 그는 끓어오르는 혈기를 삭이고는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가운데는 이런 분이 안 계신 줄 압니다만, 과거 세상에서 부리던 혈기, 과거 세상에서 쓰던 거친 말들, 쌍스러운 말들을 아직도 내뱉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직 과거에 머물러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과거를 떨쳐버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9:62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이 시간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도 바울처럼 뒤에 있는 것은 깨끗하게 잊어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잘했던 것도 잊어버리십시다. 잘못했던 것도 잊어버리십시다. 실수했던 것, 부끄러운 기억, 수치스러운 과거 등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잊어버릴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나와 너 사이에 좋지 못한 관계, 나빴던 관계, 이 시간 다 깨끗하게 씻어버리고 새롭게 서로 좋은 관계로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에이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패배한 남군을 관대하게 대했습니다. 그는 연설을 할 때마다 남군들을 사랑하고 용서하자고 힘써 외쳤습니다. 하루는 어떤 할머니가 링컨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나서는 거칠게 항의했습니다. 그 할머니는 사랑하는 아들을 전쟁터에서 잃은 분이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원수를 그냥 놓아준다는 말입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원수는 없애야 합니다!'
그때 링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맞습니다. 원수는 반드시 없애야 합니다. 저도 그 말에 백 번 동감합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원수를 우리의 친구로, 우리의 동지로 만들어서 영원히 없애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눈앞에 있는 원수는 물론 죽여서 없앨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품은 원한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원한은 대대로 계속해서 이어질 것입니다. 링컨 대통령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가르치심대로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함으로서 마음 속에 품은 원한까지도 완전히 없애려고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가 깊은 믿음과 넓은 사랑으로 그동안 나와 너 사이에 불편한 관계가 행여 있으면 다 잊어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다시금 좋은 관계로 새 출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기초했던 토마스 제퍼슨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과거의 역사보다 미래의 꿈을 더 좋아한다.'
태양을 등지고 사는 사람은 늘 눈앞에 그림자만 바라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태양을 향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나 밝은 빛 가운데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 교회도 과거의 역사와 전통에 집착하는 과거지향적인 교회가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바라보면서 새로운 꿈을 펼쳐나가는 미래지향적인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바울은 푯대를 향해서 좇아나갔습니다.
14절입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사도 바울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에도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앞에 있는 푯대를 행해서 계속해서 전진하고 좇아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늘 미래지향적인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목표로 삼은 푯대는 무엇이었습니까? 12절 하반부입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예수님은 바울을 붙들어주셨습니다. 이제 바울은 예수님의 손을 붙들고 예수님께 잡힌바 된 그것을 목표로 삼아서 예수님의 뒤를 부지런히 좇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또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혔습니다. 그때 그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제 바울은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목숨이 다하기까지 죽도록 충성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에 있어서,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올바른 푯대를 정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예컨대 여기에 활 쏘는 사람이 서 있다고 생각을 해봅시다. 그는 앞에 있는 과녁을 바라보면서 화살을 장전했습니다. 그리고는 있는 힘을 다해서 활시위를 당겼습니다. 드디어 화살이 쏜살같이 날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주변에서 보는 사람은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그 화살이 바르게 잘 날아가서 과녁에 명중되기를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보면서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또 이렇게 한 번 가정해 보십시다. 여기에 양궁선수가 서 있습니다. 그는 올림픽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훌륭한 선수입니다. 그의 활솜씨는 대단합니다. 힘도 좋습니다. 이제 그가 활을 장전해서는 힘껏 활시위를 당겼습니다. 그런데 그가 뚜렷한 목표 없이 앞으로 겨냥했다가 뒤로 겨냥했다가 이리저리 활을 휘두르고 있다고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변에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실제로 그 화살에 잘못 맞으면 애꿎은 사람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히기 전에는 바로 그러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스스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처했습니다. 그는 자기 의에 가득 차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생각에 어긋나면 도저히 다른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는 완벽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소신이 너무나도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법에 위배되는 줄 알면서도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그의 열심은 대단했습니다. 그의 열심은 아무도 말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무조건 쓰레기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다 쓸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 다메섹에 숨어 있는 기독교인들을 모조리 박멸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그러다가 도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예수님에게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그제야 바울은 자기가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의 뜻과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꺾어버렸습니다. 이제는 오직 예수 그리스의 종이 되어서, 사나 죽으나 예수 그리스도만을 존귀케 하는 삶으로 바뀐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푯대를 잘못 정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뒤에 그의 푯대는 바르게 바뀌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교회를 핍박하고, 교회는 허는 일에 앞장서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하면서 교회를 바르게 세워 나가는 사람으로 바뀌어졌습니다. 그는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앞장섰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여 우리의 푯대가 잘못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푯대가 잘못되면 자기 열심으로 오히려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허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푯대는 무엇입니까? 세상적인 것, 육신적인 것에만 우리의 마음이 가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적인 수고는 바벨탑을 쌓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상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할 때 우리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실 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0:42입니다.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냉수 한 그릇은 보잘 것 없습니다. 그 보잘 것 없는 것조차도 하나님은 잊지 않고 상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며 헌신하는 우리의 수고를 왜 하나님이 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반드시 귀한 상을 주실 것입니다.
110주년을 맞이하면서 교회를 섬기는 우리의 마음자세가 어떠해야 할지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나간 과거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 잊어버립시다. 또 현실에 안주해 있지도 맙시다. 더 나은 내일을 바라보면서, 좀 더 크고 원대한 꿈과 비전을 가진 미래지향적인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더욱 힘써 섬기고 평안한 가운데 든든히 세워 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나가며 또 교회의 장막터가 크게 넓어지는 귀한 역사가 우리를 통해서 더욱더 있기를 바랍니다.
/박상호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