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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전성취를 위해 필요한 5자세 (빌 02:12-14)

첨부 1


<구원을 이루십시오 >
우리는 이 땅에 그저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부모님이 우리를 낳으셨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실 때 그냥 보내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고, 기대가 있고, 비전이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구원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재라면 항상 하나님의 비전을 나의 비전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구원은 축복의 시작이지 결코 축복의 완성이 아닙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 구절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우리의 구원이 불완전한 구원이라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구원받은 자로서 현재의 자리에 머물지 말고, 보다 복된 자리로 더 나아가라는 말입니다.

<비전성취를 위해 필요한 5가지 자세 >
믿는 사람은 더 나은 삶에 대한 거룩한 비전을 가지고,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우리가 비전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몇 가지 삶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1. 마음속에 소원을 가지십시오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축복하시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룩한 소원입니다.
우리에게 내일의 꿈과 소원이 없으면 삶은 의미도 없고, 현재가 아무리 만족스러워도 곧 권태와 스트레스가 생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에 붙잡혀 살지 말고 앞을 보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그렇게 할 걸!' 하면서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담기보다는 다시 물을 길러 오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왜 두 눈이 앞에 달려 있고 귀 옆이나 뒤통수 쪽에 달려 있지 않습니까? 뒤를 보고 한을 품지 말고, 옆을 보고 한눈 팔지 말고, 앞을 보고 나아가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뒤에서 주어지지 않고 앞에서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괜히 그 일을 했다! 괜히 결혼했다!'고 뒤를 보지 말고 앞을 봐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예비하신 크고 기이한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경주는 뒤의 것을 잘 잊어버려야 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실수이든, 실패이든, 아픔이든, 고난이든, 나의 결정적인 결함이든, 잘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쌓은 공적도 잊어버려야 합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말고 하나님의 비전을 가지고 앞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인생의 가장 귀한 자산은 비전이고, 비전의 힘은 어떤 힘보다 큽니다.
어느 날 마하트마 간디에게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군사력도 없이 인도를 대영제국에서 해방시킬 수 있었습니까?' 그러자 간디는 '저에게는 조국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비전이 있었습니다. 그 비전이 군사력보다 강한 힘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비전은 정치력보다 더 큰 일을 하고, 경제력보다 더 영향력이 있고, 군사력보다 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항상 뚜렷한 비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전을 가지면 길이 보입니다. 방법도 생각납니다. 지혜도 따라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도 공급해주십니다. 우리가 강렬한 비전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그 비전을 간직할 수만 있다면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 위한 천리 길에서 오백 리 길은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만큼 비전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2. 비전의 성취를 위해 행동하십시오
본문 13절에서 '하나님께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원도 주시지만, 소원성취를 위한 능력도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전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능력에 맞는 비전을 구하는 것은 상식이지만, 비전에 맞는 능력을 구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능력을 구하면서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 행동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거룩한 비전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교회를 오래 다녔는데 믿음이 자라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대개 행동하는 믿음의 헌신이 없고, 거룩한 비전을 위한 대가를 치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다이어트에 실패합니까? 가장 큰 이유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 날씬해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대가를 치르지 않고 거룩한 비전이 이뤄지는 법은 없습니다. 이제는 비전만 가지지 말고, 말만 하지 말고, 생각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는 행동해야 합니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미국 데이튼에 사는 목사님에게 아들 둘이 있었습니다. 이 형제는 함께 자전거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한가할 때에는 가끔 언덕에 올라가 쉬었습니다. 어느 날 두 형제가 언덕의 잔디 위에 누워서 쉬는데 독수리가 날라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날고 싶다.'는 강렬한 비전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 결혼도 포기하고 비행기 개발에 매달렸습니다. 결국 비행기를 개발했는데 그들이 바로 라이트 형제입니다.
그들이 비행 시험에 성공한 후 축하 파티가 열렸습니다. 그 파티에서 사회자가 라이트 형제를 소개하며 '한 말씀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라이트 형제는 얼굴이 빨개지면서 일어나 말했습니다. '여러분! 새 중에서 제일 말이 많은 앵무새는 잘 날지 못하지만 잘 나는 새는 대개 말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저도 비행기로 나는 재주는 있지만 말하는 재주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만 저의 말을 마치겠습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말만 잘하는 앵무새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행동하는 믿음의 헌신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비전을 이루는 일에 싸구려 지름길은 없습니다. 항상 대가를 치르려는 모습을 가질 때 그 비전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3. 비전을 위해 행동할 때 원망이 없이 하십시오
본문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어떤 분은 아주 힘들게 살면서도 하나님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전혀 원망과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일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명해주신 것에 대해서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말이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기억해주셨구나!'하고 생각하며 감사합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 감동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함으로 하나님께 기억된 존재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안톤 시나크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라는 수필이 있습니다. 그는 수필에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죽 열거합니다. 우는 아이의 모습,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고궁, 동물원 우리 안에서 왔다 갔다 하는 범, 성공한 옛 친구의 거만한 모습, 꿈같이 아름다운 여름밤에 열흘 동안 병실에 누워 있는 것, 어렸을 때 단짝 친구의 묘비를 읽는 것, 도시의 시꺼먼 냇물 등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열거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소식이 없는 것, 그리고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고향도 우리를 슬프게 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슬픈 일은 '잊혀진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고, 찾아주지 않는 모습은 불행한 모습입니다. 우리가 사명을 버리면 결국 하나님께서도 나를 찾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행하게 하시면 '하나님께서 나를 기억해주셨구나!'하고 그 일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 일을 통해서 우리를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비전을 가치 있게 만들고, 성취 후에 깊은 감격으로 받을 수 있도록 그 비전을 금방 이루어지게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한번 세운 비전과 가치관을 지켜나가는 지속적인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비전에 금방 열매가 없어도 원망하지 말고 더욱 주님을 바라보고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기다릴 때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다리느냐 하는 그 모습을 보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기다림의 순간을 잘 지내는 것도 필요합니다. 위대한 일은 금방 이루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모세가 한번의 카드를 내밀어서 바로가 항복한 것이 아닙니다. 열 번의 카드를 내놓은 후에야 비로소 출애굽의 대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믿음을 오해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한번의 카드로 끝나는 줄 압니다. 그런 방법만 생각하고, 그런 길로 가다가 결국 이단에 빠집니다. 그러나 위대한 신앙의 열매는 많은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서 단번에 무엇을 이루고, 단칼에 승부를 내려는 모습을 주의해야 합니다. 꼭 필요한 경우에는 기적도 필요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이 설정하신 모든 과정과 원칙을 끝까지 따라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모습을 더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사야 40장 31절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앙망한다는 것은 영어로 'Wait on the Lord(주님 곁에 꼭 붙어서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이 기다림은 망부석처럼 슬픈 모습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가지고 즐겁고 적극적인 모습으로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안톤 시나크는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 중에 '포수의 총부리에 죽어 가는 사슴의 눈초리'도 열거했는데, 그렇게 거센 운명에 자기를 포기하고 가만히 있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기다림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결코 운명론이 아닙니다. 왜 요새 저주라는 말을 자주 쓰는 분들이 이단이라고 오해를 받습니까? 저주라는 운명론적인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약화시켜서, 신약의 은혜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별로 바람직한 어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우리 각본대로 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각본을 따르고, 최선을 다해 행동하면서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아름다운 방법으로 비전이 성취되는 기쁨을 반드시 맛보게 될 것입니다.

4. 비전을 위해 행동할 때 시비가 없이 하십시오
어떤 분은 비전을 이루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비전을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비전을 이루는 과정도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비전을 위해 일할 때 시비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왜 시비가 생깁니까? 자기가 선악을 판단할 수 있다는 죄성을 지닌 생각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성을 유식으로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진짜로 유식한 것이 아닙니다. 진짜 유식한 사람은 '선악을 내가 판단할 수 없다'라고 여기고 관용을 보입니다. 그러므로 조금 알고 교만한 것보다는 차라리 모르고 겸손한 것이 더 낫습니다.
가끔 형제들의 눈에 티가 보이면 그것을 뽑고 싶은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죄가 되지 않게 하려면 예수님 말씀대로 먼저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부터 보려고 해야 합니다. 만약 사람의 내면을 살피는 탐조등이 있다면 그 탐조등을 가지고 남보다 자기를 먼저 비춰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자신의 마음에 회개하는 마음과 용서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 회개와 용서가 모든 시비를 해결하는 비결이 됩니다.
참된 지식이 무엇입니까? '내가 안다!'고 소리치는 것은 '내가 무식하다!'고 선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참된 지식은 자기의 들보를 깨닫고 자기의 무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지식은 사람을 자랑으로 인도하지 않고, 사랑으로 인도합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2절은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지식을 내세우면 사람이 보는 관점과 생각하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항상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내세우면 이미 생긴 갈등도 풀어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비전을 이루려고 할 때 시비가 없도록 하시기를 바랍니다. 목표를 이루고고 관계가 망가지고 영혼이 망가지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온유한 자에게 땅을 기업으로 얻는 축복을 주십니다. 모든 영혼의 생명은 어머니의 품과 같은 따뜻함 속에서 자라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온유함은 영적인 생명의 모태와도 같습니다. 항상 온유한 모습으로 시비가 없이 윈윈 전략을 가지고 나갈 때 하나님은 우리의 비전을 이룰 수 있도록 기꺼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5. 하나님의 영광을 비전으로 삼으십시오
우리가 무엇인가 비전을 가질 때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그 비전이 진정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비전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비전인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비전이 없다면 우리는 어떤 비전을 성취해도 결코 복된 존재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비전은 주님께 있어야 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데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도와 선교에 더욱 관심을 기울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틀 전에 몽고의 임준호 선교사님이 보내온 사진을 보고 마음이 뭉클해졌습니다. 몽고 형제에게 침례를 베푸는 장면인데, 그 사진 한 장에 몽고 영혼을 사랑하는 선교사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나라 확장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생명을 바쳐 헌신하는 선교사님의 모습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선교사님들을 위해 우리가 후방에서 기도와 후원의 손길을 펴서 하나님의 비전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자녀교육을 위해서는 엄청난 사교육비를 쓰고, 여행을 가기 위해서도 엄청난 여행비를 쓰고, 집을 사고 집안 내부를 화려하게 인테리어하기 위해서도 엄청난 비용을 쓰지만 선교에 전혀 관심이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비전에 동참하는 복된 존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일용할 양식과 필수적인 생활 경비 이외에 놀이문화 및 특별한 누림을 위해 특별비용을 지출한다면 그 중의 5분의 1정도는 항상 구별하여 선교와 구제를 위해 지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어서, 태국 여행을 하는데 2백만 원의 경비가 예산으로 소요된다면 태국여행은 남이 누리지 못하는 것을 내가 누리는 것이기에 처음부터 240만원의 예산을 세우고, 40만원 정도는 선교와 구제를 위해 드릴 수 있는 신앙적인 삶의 패턴을 가져보십시오. 자녀 과외 시키는 문제, 자녀 유학 보내는 문제, 집안 인테리어 하는 문제 등, 특별한 누림의 조건이 있는 상황에서 그런 신앙적인 삶의 패턴을 가질 것을 작정하고 실천한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큰 집에 살고, 더 높은 지위를 얻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지만, 그런 것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면 영혼이 망가집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과 주님의 의를 먼저 추구하면 모든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서 더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처럼 내 소원보다 주님의 비전을 먼저 생각한다면 우리는 결코 손해보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김밥을 너무 좋아해서 김밥집 주인 딸과 결혼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 소원을 들어주셨다면 저는 지금 김밥 장사를 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소원하는 많은 것이 아직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김밥집 주인 딸과 결혼하는 것'과 같은 수준의 소원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비전은 우리의 소원보다 항상 거룩하고, 보람되고,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비전을 항상 하나님의 뜻과 영광에 맞출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가장 최상의 작품 인생으로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의 비전 안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축복인지 모릅니다. 사람에게는 소유보다 소속이 더 중요합니다. 요새 로또에 1등 당첨된 사람들이 도곡동 타워 팰리스로 많이 이사간다고 합니다. 군사시설처럼 철통같은 보안으로 안심하고 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곳에 이사는 갔지만 여러 가지 레벨 차이와 자의식 차이 때문에 그곳 주민들과는 어울리지 못한다고 합니다. 소유는 있지만 소속은 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또 다른 차원의 불행을 느낀다고 합니다.
사람이 어디에 소속되어 있느냐 하는 것은 그의 존재의 행복을 결정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주님 안에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편을 아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힘쓰는 삶을 산다면 우리는 이미 행복의 조건을 다 가진 존재입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 중심적으로 살고 있음을 반증하는 예배하는 삶과 기도하는 삶은 행복의 알파와 오메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축복은 주님을 중심으로 사는 삶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주님 안에서 자기 자신을 지워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경우이든지 자기가 죽지 않았음을 나타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에게서는 악취가 나지만 쉼 없이 자기를 지워 가는 사람에게서는 향기가 납니다. 그처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온전히 지울 때 비로소 우리는 타락 이전에 가졌던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대화를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셨을까요? 어떤 분은 그 질문에 '심심해서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 대답이 농담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할수록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와 인격적인 대화를 원하십니다. 그 대화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뜻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우리의 소원성취를 위해 기도할 때 소원만 아뢰지 말고 자기를 지우는 결단의 고백을 아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주님의 비전을 우리의 비전으로 삼고 산다면 가장 절망적인 순간도 놀라운 축복의 기회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소원을 자신의 소원으로 삼아 활기찬 인생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분당 샛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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