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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 안에서 샬롬 (빌 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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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교회에 말썽이 있었나 봅니다. 다름 아닌 두 여자의 갈등입니다. 2 절에 나오는 유오디아와 순두게입니다. 이들은 모두 교회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3 절에 복음에 나와 같이 힘쓰던 저 부녀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여성들의 공로가 큰 교회입니다. 루디아란 여인의 집에서부터 빌립보교회가 생겼습니다. 빌립보교회는 여성 파워가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함께 일하다보면 의견이 갈릴 수도 있습니다. 서로 고집을 부리다보면 갈등이 생깁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사이가 나빠졌습니다. 이 소식이 감옥에 갇힌 바울에게 전해졌습니다. 교회 일에 힘쓰다가 생긴 일입니다. 바울은 이 두 사람이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했습니다.
생각이 다르고 마음이 다르면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 때 그 생각과 마음을 합쳐야 합니다. 한 쪽이 양보해야 합니다. 그러나 쉽지 않습니다.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갈라진 마음을 합치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 안에 서는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자기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생각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 생각은 한 가지입니다. 주님이시라면 이 일을 어떻게 하실까? 기도하고 그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그러면 싸울 일이 없습니다.
바울은 이 편지를 감옥에서 썼습니다. 빌립보서는 그래서 옥중서신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4 장 말씀을 시작하면서 기쁨이 넘칩니다.
<빌 4: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바울은 비록 감옥에 있지만 빌립보교인들을 생각하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의 비결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이것이 감옥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은 비결입니다.
4 절 말씀은 바울이 누리는 기쁨을 빌립보교인들도 누리기를 원했기 때문에 주신 말씀입니다.
<빌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바울은 감옥에서 순교했습니다. 로마에 바울이 순교한 그 자리에 조그만 예배당이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유적을 모아놓았습니다. 당시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 시민권이 있기 때문에 법적으로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목을 쳐서 죽였습니다. 생선 토막 자르듯이 뉘여 놓고 도끼로 찍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순교했습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쓴 시간은 그런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이런 기쁨을 누리는 것일까요. 가장 초조하고 불안한 시간에 거꾸로 샬롬을 누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을 때도 그랬습니다. 심문하는 빌라도를 오히려 제압했습니다. 망치로 못을 치는 로마 병사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어디서 이런 여유가 나온 것입니까?
오늘 설교 제목이 「주 안에 서면 거기 샬롬이」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샬롬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어로 ‘평강’은 ‘샬롬’이란 멋진 단어입니다. 샬롬은 ‘모든 것들이 되어야 할대로 되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모든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모든 것이 있어야 할대로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쁨과 만족이 피조물 가운데 가득했습니다. 이것이 샬롬입니다. 그러나 이 샬롬이 깨졌습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이 샬롬은 세 군데에서 깨졌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둘째는 서로의 관계입니다. 셋째는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서 샬롬이 깨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샬롬을 회복하려면 이 세 가지 관계가 모두 회복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샬롬을 회복하기 위해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4 절, 5 절, 6 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요약하면 4 절은 기뻐하라, 5 절은 관용하라, 6 절은 감사하라 입니다.
7 절의 ‘그리하면’은 4 절부터 6 절을 말씀을 실천하면 입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의 평강을 얻기 위해서, 즉 샬롬을 회복하기 위해서
첫째는 기뻐하는 것입니다.
<빌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두 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뻐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천은 반드시 기뻐해야 합니다.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크리스천 영성의 클라이맥스는 기쁨입니다.
누가 ‘왜 교회를 다니느냐?’고 묻거든 분명하게 대답해 주세요. 누가 ‘왜 예수를 믿느냐?’고 묻거든 똑바로 대답해 주세요.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라고.
세상 사람들은 기뻐할 일이 있어야 웃게 됩니다. 기뻐할 일도 없는데 괜히 히죽 희죽 웃어 보세요. 맛이 갔다고 합니다. 바울이 처형을 앞두고 기쁨을 잃지 않았습니다. 죽음도 바울의 기쁨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바울의 기쁨은 바로 주님의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로 인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그것보다 영광이 없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위해 순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기쁨은 기준이 자기가 아닙니다. 자기가 기준인 기쁨은 그 때 뿐입니다. 그런 기쁨으로 얻은 샬롬은 이내 사라지고 금방 다른 근심거리가 생깁니다.
우리의 기쁨은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사그라지지 않습니다. 항상 있습니다. 샘처럼 솟아납니다. 그래서 마르지 않습니다.
여러분 만약 교회 일을 하다가 기쁨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내가 기쁨의 주인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의 기쁨은 주인공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웃으시면 그 기쁨이 바로 내게로 이어집니다. 나로 인해 하나님께서 웃으시다니요 이런 영광이 어디 있습니까?
따라서 합시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이 기쁨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이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샬롬을 회복하기 위해서 관용하는 것입니다.
<빌 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관용은 어려운 한자말입니다. 관용(寬容)은 너그러울 관, 얼굴 용 입니다. 관용은 일방적인 것입니다. 상대방이 어떻게 하든 말든 상관이 없습니다. 나의 인내와 이해로 저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나의 기쁨으로 저를 덮는 것입니다. 나의 충만함으로 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게 관용입니다.
관용을 실천하는 데는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 주일은 집에 가서 아이들 나무라지 마세요. 꾸중할 만한 일이 생겨도 용서하세요. 왜냐면 교회에 가서 말씀에 은혜 받았으니까. “오늘은 주일이다. 내 마음이 이리 기쁜 고로 너희들을 용서하노라.”
5 절 말씀에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했습니다. 나는 너그러운 사람이라고 자기선전을 하라는 말씀입니까? 자기 덕을 자랑하는 것은 겸손하지 못합니다. 자기 덕을 자랑하는 사람을 푼수라고 합니다. 용량 미달이라는 것입니다.
너그러움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행동하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용납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한결같이 언제나 베풀어야 합니다. 그러면 은혜를 입은 자들이 소문을 내줍니다. 저 사람은 예수를 믿는데 아주 마음씨가 좋다고.
여러분 누구에게는 좋은 소릴 듣지만, 누구에게는 그렇지 못합니까? 누구에게는 후한데, 누구에게는 야박합니까? 그러면 안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라고 했습니다.
자녀에게 축복을 시작했습니까? 자녀를 축복하는 부모는 관대해집니다. 야단을 치려고 하다가도 기다려 줍니다. 믿는다고 격려해 줍니다. 열 번 칭찬하고 한 번 지적하는 부모가 됩니다.
샬롬을 회복하는 세 번째는 감사하는 것입니다.
<빌 4: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누구에게 감사합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간구로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언제 감사합니까? 염려할 일이 생겼을 때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아야 감사가 나옵니다. 어떻게 염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기도하면 됩니다.
사람들은 걱정거리가 터지면 걱정을 시작합니다. 바로 걱정에 들어갑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에 빠집니다. 뾰족한 해결 방법이 없으면 더 고민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방법을 찾으려고 합니다.
기도는 언제 합니까? 고민하다가 하다가, 걱정하다가 하다가, 근심하다가 하다가 맨 나중에 기도합니다. 기도가 최후 수단입니까? 기도는 최초의 수단입니다.
여러분! 염려거리가 터지면 바로 기도에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그런데 기도에 요령이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반드시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리 감사입니다. 앞선 감사입니다. 김칫국을 먼저 마시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해보세요. “아버지 도와주세요. 감사합니다.”
어떤 집사님이 남편 전도한 간증입니다. 남편이 술을 좋아했습니다. 결혼생활 10 년 동안 하루도 맑은 정신으로 돌아오는 날이 없었습니다. 또 가끔 술주정을 했습니다. 살림살이를 부수기도 하고 식구들을 때리기도 했습니다. 이불 위에 토하기 하고, 지도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옷을 벗기고 정리해서 깨끗한 자리에 누이고 났는데 기가 막히더랍니다. 어쩌면 내 신세가 이리 되었나. 옆에서 기도를 시작했는데 눈물이 나면서 푸념만 나오더랍니다.
그러다가 목사님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하라고 한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감사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 감사할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감사를 하라니까 좌우지간 감사합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나니까 갑자기 감동이 오더랍니다.
‘그래도 과부보다야 낫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런 거라도 하나 있는 게 없는 것보단 낫죠. 그러나 언제 사람 구실을 할까요? 저렇게 술을 먹고도 제 집을 찾아오는 게 신통하고, 저렇게 마셔대는데 건강하니 감사하고, 나 예수 믿는 거 방해하지 않으니 정말 감사하고…”
한 가지, 두 가지 감사하다보니 생각보다 감사할 일이 많더랍니다. 기도하다가 얼굴이 펴졌습니다.
남편이 자다가 목이 말라 눈을 떠보니 아내가 히죽히죽 웃고 있었습니다. “술주정뱅이하고 살면서 뭐가 좋아서 웃느냐?”그러더랍니다. 그래서 “아니요. 나는 너무 행복하고 너무 감사해서 웃는다.”고 답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감사한 것들을 말해 주었습니다. 이래서 감사하고 저것도 감사하고 죽 나열하서 설명을 했습니다. 남편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알았어. 예수 믿어줄게.”그러더랍니다. 그 남편이 교회에 나와서 예수 믿고 술 끊고 새 사람 되었습니다.
세상 감사는 조건을 따집니다. 감사할 일이 있어야 감사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조건을 따지지 않습니다. 아무 일이든지, 모든 일에 감사합니다.
6 절에 나오는 ‘아무 것도’란 단어와 ‘모든 일에’란 단어가 나옵니다. 영어로 anything, everything입니다.
지난 추수감사절에 감사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세 가지 감사 방법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복습해 볼까요? 범사에 감사하라. 돌이켜 감사하라. 미리 감사하라.
지극히 당연한 일에서 감사거리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쁜 조건을 돌이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감사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예비 된 은혜의 선물이 있습니다. 먼저 감사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여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란 든든한 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샬롬을 회복하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기쁨, 관용, 감사. 이 세 가지를 실천한 결과는 7 절 말씀입니다.
<빌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분이십니다. 그 지각 안에 모든 해결 방법이 있습니다. 내 생각의 한계를 뛰어 넘습니다. 그 지혜를 빌리면 우리는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줍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우리의 기쁨과 관용과 감사 위에 놓여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평강을 돈을 얻을 수 있습니까? 돈을 벌수는 있어도 돈으로 평안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지난 주에 희안한 사진을 보았습니다.(그림) 어떤 건설업자가 공금을 유용해서 빈집에 현철 75 억을 보관하고 있다가 들켰습니다. 이 사람이 이 만한 돈을 쌓아놓고 평안했을까요?
출세를 해도 평안히 잠을 잘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꿈에서도 경쟁합니다.
평안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발견하기까지는 그 어디서도 참 평안을 얻을 수 없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조그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풍랑이 일어서 배가 요동을 쳤습니다. 하늘에 올라갔다가 땅에 떨어집니다. 제자들이 본래 어부 출신들이라 풍랑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워낙 큰 풍랑에 그만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이고,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이런 소란 속에서 예수님은 고물을 베개 삼아 누워서 평안하게 주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서도 평안하셨습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주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 이것이 절대적인 평안입니다. 풍랑도 죽음도 이 평안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평안입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유명한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람을 둘로 나눕니다. ‘인간의 마음’이라는 책에서 말합니다. 죽음을 향한 인간, 생명을 향한 인간입니다.
우리 모두는 죽음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죽음만 바라보고 살면 평안이 없습니다. 죽음을 잊고 살아도 평안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 너머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을 넘으면 거기 영생이 있습니다. 생명은 죽음을 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의 세계가 바로 샬롬입니다.
우리가 샬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샬롬을 사모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 평안을 원하십니까? 그러면 반드시 주 안에 서야 합니다. 주 안에 서면 샬롬이 보입니다. 하나님께 그 샬롬을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삶의 자리에 이 샬롬이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
/황금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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