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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빌 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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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년 뉴욕의 어느 가정에서 한 아기가 탄생했습니다. 그는 어려서 소아마비로 다리를 절었습니다. 시력도 아주 나빴습니다. 그의 부모는 그의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네가 가진 장애는 장애가 아니란다. 네가 만약 전능하신 하나님을 참으로 신뢰하고 믿을 수 있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다면 오히려 네 장애 때문에 너는 역사에 길이 남을 놀라운 기적 같은 삶을 살 수 있단다”
그는 23세에 뉴욕의회 의원, 28세에 뉴욕시장, 44세에 대통령이 되고 1906년에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시어도어 루스벨트입니다.
그는 비록 장애가 있었으나 항상 기뻐하며 살았습니다.
마음이 유쾌하면 혈액순환이 잘 되어 건강 처방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마음이 불유쾌하면 몸 속에 독이 생겨서 피가 탁해지고 잘 돌지 않기 때문에 건강을 심하게 해치게 됩니다.
미국의 벨버 케이츠 박사가 흥미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즉 인간이 토해내는 숨으로 가라앉는 물질이 생기는데 이 침전물의 빛깔이 호흡을 할 때의 감정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화를 내고 있을 때의 침전물은 밤색, 슬픔과 고통의 때에는 회색, 후회로 괴로워 할 때에는 분홍색, 기뻐할 때에는 청색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케이츠 박사는 이상과 같이 각 침전물의 성분을 분석했는데 그 결과 화가 났을 때에 생기는 밤색 침전물에는 무서운 독소가 들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밤색 침전물을 쥐에게 주사했는데, 그 쥐는 불과 수분만에 죽어버린 것이었습니다. 만일 한 사람이 한 시간동안 계속해서 화를 낸다면 80명을 죽일 정도의 독소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화를 내는 사람의 몸 속을 한번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온몸이 그 무서운 독소로 가득 차 있어서 그 무서운 독이 온몸에 전파되니 건강에 얼마나 무서운 해를 끼치겠는가. 또 무서운 독기를 품은 사람에게 욕을 먹는 상대방의 정신과 육체의 변화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화를 내는 사람으로 인하여 곱절 이상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그 싸움을 구경하는 제3자의 정신과 육체에 미치는 영향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실로 분노는 본인, 상대방, 제3자의 건강을 막심하게 해칠 것입니다.
기독교를 가리켜 소위 ‘기뻐하는 종교’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우리의 소원이 성취되었을 때뿐만 아니라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에도 기뻐할 수 있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라는 의미입니다. 더 나아가 이 말은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에 상관없이 항상 기뻐해야 하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주안에 있을 때’‘성령 안에 있을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님께 사로잡혀 있을 때에 비로소 환경을 초월해서 ‘오직 주님’을 바라보게 되고 ‘천국’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 충만을 받아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을 운명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그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늘 기뻐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처음 주님을 만난 그 때의 모습 그대로, 이기적인 계산 없이, 쉽게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릴 줄도 모르고, 열심히 주님의 일을 행하는 그리스도인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일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향한 '첫 사랑'을 잃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기뻐할 줄 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에 따르면, 기쁨은 '인간의 영혼에 뿌리내린 성령의 열매가 성장하는데 필요한 영양분'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과 23절을 보십시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많은 인생 선배들이 우리에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사물의 밝은 면을 바라보라', 또 '최선을 다하라'고 충고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만일 성령의 도우심이 없다면 우리 힘으로는 그 가운데 어느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그리스도인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길 원하십니다. 구원의 기쁨이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현실에서 아무 문제도 겪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문제가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주님이 함께 하시는 동행의 삶을 경험하는 기쁨이 충만하다는 뜻입니다.
본문 살전 5장 16절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의 자녀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계십니다. 그것은 오늘 주신 말씀대로 항상 기뻐하는 것이고,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범사에 감사하는 일입니다. 오늘 아침 항상 기쁘게 살아가라 는 말씀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뻐할 수 있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이 세상은 말하자면 눈물의 세상입니다. 한숨의 세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텔레비전에 마주앉아 코미디언의 연기를 보면서 잠시라도 웃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지난 다음에 오는 허전함과 공허함은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대개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예수를 믿는 것은 웃음과는 먼 거리에 있는 것으로 압니다. 사실 일반 종교는 침울한 얼굴을 하고 심각한 마음으로 도를 명상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무슨 기쁨이나 웃음 같은 것을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생활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종교와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 믿는 생활은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요, 눈물이 아니라 웃음이 가득한 생활입니다. 사실 기쁨은 그 자체가 큰 축복입니다. 성령의 열매 중에 하나도 기쁨이 있습니다. 이 기쁨은 우리 마음속의 여러 가지 병을 고칠 수가 있습니다. 구약 잠언 17장 2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고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했습니다 잠언 15장 13절에도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흔히 젊은이들이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그 얼굴을 보면 안다고 합니다. 그 얼굴에 윤기가 난다고 합니다. 사실 마음에 기쁨이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면 화장을 하지 아니 해도 그 얼굴에 빛이 납니다. 환합니다. 그러나 마음에 근심이 있는 사람은 그 얼굴 에 빛이 없습니다. 얼굴이 컴컴합니다. 얼굴뿐만 아닙니다. 우리의 몸 전체에도 얼마나 큰 영향이 미치는지 모릅니다. 가령, 우리의 마음이 기쁘면 소화액이 잘 분비되기 때문에 소화가 잘 됩니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면 소화도 잘 되지 않습니다. 아기 엄마들이 마음에 기쁨이 있으면 어린애가 젖을 먹어도 몸에서 좋은 영양소가 나오기 때문에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기 엄마가 기분이 나쁘고 화가 나던지 슬플 때 아기에게 젖을 먹이면 젖 속에 독소가 섞여 나와서 그 젖을 먹는 어린애는 설사를 하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몸에 해롭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젊은 부부들은 애들의 건강을 위해서도 서로 조심해서 화가 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특별히 남편 되신 분들은 아내가 마음 상하는 일이 없도록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 육신적인 건강뿐만이 아닙니다. 마음에 기쁨이 있으면 정신적으로도 건전합니다. 마음이 담대해집니다. 확신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이 생겨도 잘 참고 극복할 수 있는 인내심이 생깁니다. 그러나 마음에 기쁨이 없으면 정신적으로 매우 쇠약해집니다. 그래서 조금한 일에도 신경질을 부리고, 짜증을 내고, 인내심이 없어지고, 우울해지고, 낙심하기 쉽고 소위 노이로제에 걸리게 됩니다. 우리 마음속에 기쁨이 있으면 무슨 일을 해도 잘 됩니다. 기쁜 마음으로 학생이 공부를 하면 공부가 잘 되고 실력이 향상됩니다. 기쁜 마음으로 일을 하면 일의 능률이 오릅니다. 힘도 별로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쁨이 없이 무슨 일이던지 하게 되면 일도 제대로 안 되고 능률은 떨어지고 공연히 짜증만 나고 한숨만 나옵니다. 여기 어느 부인이 집에서 밥을 짓고 빨래를 합니다. 마음에 기쁨이 있으면 밥을 짓고 찬을 만들 때도 집안 식구들의 영양을 생각해 가며 정성껏 하기 때문에 밥도 꼭 물 맞게 하고 찬을 만들어도 맛있게 합니다. 이 식사를 하고 내 남편이 건강해서 맡은 일을 잘 감당하고, 애들이 맛있게 먹고 무럭무럭 자라서 공부도 잘하고 훌륭한 사람이 될 터인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 입 속에서는 저절로 노래가 나오고 행복해 합니다. 빨래를 해도 우리 식구가 어디 가도 깨끗하고 단정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정성을 다해 빨래하고 다림질을 할 때도 성의껏 매끈하게 다려서 애들이 깨끗한 옷 입고 나서는 것 보면 그렇게 대견할 수가 없고, 남편이 자기가 빨아서 대린 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척 묶고 나서는 것 보면 그렇게 흐뭇하고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부인은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귀찮고, 힘이 들고 속이 상합니다. 짜증스럽기만 합니다. 이거 나는 무엇 때문에 여자로 태어나서 밖에 훨훨 나다니지도 못하고 집에 틀어박혀서 이렇게 빨래나 해야 되나? 그러니 빨래가 제대로 깨끗이 되겠어요. 밥을 지으니 밥이 제대로 됩니까? 생각은 딴 데 있으니 물을 많이 콱 부으니까 밥한다는 것이 죽이 되기 일쑤입니다. 찬을 만들다가도 칼로 손가락 베기가 쉽습니다. 쩍하며 그릇이 깨집니다. 그러니 속은 더 상합니다. 그 얼굴은 사흘 굶은 시어머니 얼굴 같고 말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런 부인들은 찬거리 산다고 시장에 바구니 들고 나갔다가 바구니는 가게에 맡겨 놓고 댄스홀이나 디스코 클럽에 들어가서 춤이라도 한판 추고 나와야 숨통이 열리는 것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에 기쁨이 없어서 그럽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가 사회 생활을 하는데도 마음의 기쁨이 얼마나 필요한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마음에 기쁨이 있는 사람은 범사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입니다. 그 얼굴에는 언제나 웃음이 떠나지 아니합니다. 생기가 넘칩니다. 힘이 있어 보입니다. 누구를 대하나 웃는 낯으로 대하니까 상대방에게도 호감을 가지게 합니다. 혹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가도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대로 서로 좋게 대해 줄 수밖에 없습니다. 헤어진 후에도 그 인상이 오래 남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기쁨이 있는 사람은 사회적으로도 진출이 빠르고 범사에 좋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몇 달 전에 포항에서 신앙 생활하시던 장로님 댁이 저희 교회로 이사오셨습니다. 그 장로님의 인상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그 얼굴에 웃음이 있습니다. 평안해 보입니다. 그러니까 지방에서 서울로 병원을 옮겼는데 손님들도 많이 찾아오고 모두 만족해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한번은 저더러 목사님, 무엇이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고 말씀하셔요, 목사의 마음은 얼마나 만족합니까? 서로가 기쁩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기쁨이 없는 사람은 범사에 소극적이고 부정적이고 비판적입니다. 무슨 일을 부탁하면 글쎄요. 그것은 어려울 텐데요 하면서 물러섭니다. 한번 힘들어도 해 봅시다 하고 나서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부탁하는 사람도 한 두 번 해 보아도 못한다고만 하니까 다시 부탁하고 싶지도 않아집니다. 그 얼굴을 항상 찡그리고 있으니까 상대하는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합니다. 헤어진 후에도 그 얼굴을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아집니다. 그러니까 어디 가나 그렇게 환영을 받지 못 합니다. 자연히 오늘과 같이 경쟁 사회에서 뒤지고 맙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이 기쁨이 어디서 옵니까? 이 기쁨은 하나님께로 옵니다. 주안에 있을 때 오는 축복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면서 '주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리라”(빌3:1)고 했습니다.
아메리카의 백화점 왕으로 불리운 바 있는 워너메이커는 '미소는 길가에 핀 장미꽃'이라고 말한바가 있습니다. 길가에 핀 장미꽃은 은연중에 오고가는 이를 기쁘게 하는 것으로, 미소의 힘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찡그린 얼굴을 하고, 웃지 않는 이들이 명심하여 할 좋은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원천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세상의 것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것은 잠깐 있다가 없어지고 변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 때문에 기뻐하는 사람은 있을 때는 기뻐하고 없어지면 슬퍼합니다. 누릴 때는 기뻐하고 떨어지면 슬퍼합니다. 해가 나면 기뻐하고 흐려지면 슬퍼합니다. 잘 되어 가면 기뻐하고 잘 되지 않으면 슬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쁨의 근원을 둔 사람은 언제나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 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평안이란 말 대신에 기쁨이란 말로 바꿔 읽어보세요. 기쁨을 너희에게 주노니 곧 나의 기쁨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우리에게 이와 같은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임해서 우리 마음속에 기쁨이 언제나 샘솟듯이 솟아나기를 바랍니다. 폴 라더라는 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택하실 때 그의 삶 속에 웃음을 넣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영은 그의 마음속에서 움직여 뒤집어 놓습니다. 옛것은 지나고 새것이 됩니다. 그래서 그는 심령 속 깊은 곳에 기쁨을 누리며 얼굴에는 웃음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참으로 의미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참 기쁨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구약 창세기 17장에 보면 재미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99세 때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서 언약을 하면서 네가 심히 번성해서 열국의 아비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말고 아브라함이라고 하면서 그 뜻은 많은 무리의 아비가 된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대손손 번영하는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심중에 이르되 내 나이 100살이 다 되었는데 어떻게 자식을 낳지? 사라는 90인데 어떻게 생산하지?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과 함께 걷고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사람의 생각대로 해서 사라의 몸종 하갈을 통해서 아들을 낳았을 때 그 집에는 웃음이 사라졌습니다. 결국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사람의 생각대로 하는 것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회개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약속대로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 이름은 이삭이라 했습니다. 그 뜻은 웃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때 기쁨이 있고 웃음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첫째,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면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계속 교제하는 사람에게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과의 교제가 끊어지면 기쁨이 사라집니다. 신명기 28장 47-48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핍절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대적을 섬기게 될 것이다 했습니다.
둘째, 죄 사함을 받아야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죄를 품고 있는 동안 마음속에 기쁨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 잠언에도 악인은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한다고 했습니다. 왜 도망합니까? 무서워서 그럽니다. 무서워하는 사람에게 기쁨이 있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한 후에 그들의 마음이 평안하고 기뻤습니까? 아닙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기쁨은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죄를 마음에 품고 있을 때 마음에 기쁨이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허물과 죄를 주님 앞에 회개하여 주님께로부터 오는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3장 19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 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귀한 말씀만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 십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놀라운 기적만 보여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훌륭한 생활의 본만 보여 주시시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 신 것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여 기쁨을 잃어버리고 불안과 초조에 허덕이고 있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셋째, 주안에 거할 때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4절에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 하리라. 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우리가 주안에 살고 주님과 매일매일 교통할 때 우리가 그의 생명력을 얻어 힘있게, 생기 있게, 기쁘게 살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의 후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무슨 복잡한 수속을 거쳐서 된 것이 아닙니다. 많은 돈을 지불하고 산 것이 아닙니다. 혈통에 의해서 된 것도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왼 것입니다. 너무 쉽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너무 쉽기 때문에 믿지 않으려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정말 믿는다면 기뻐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에겐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와 같이 있는 기쁨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몇 해 전에 추운 겨울 어느 날입니다. 시내에 갔다가 차에서 내리니 얼마나 추운지요. 그런데 제 앞에 우리 권사님 따님이 지나가요. 그래서 너무 반가워서 인사를 하려 하는데 보니 어느 남자하고 같이 걷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서로 교제하는 중인 것 같아 소개하자니 거북스러울 것이고 해서 못 본체하고 지나갔습니다. 우리 권사님 따님은 자그마한 키인데 그 남자 청년은 185cm는 될 것 같아요. 그런데 팔을 끼고 가는지 매달려 가는지 서로 쳐다보고 내려다보며 이야기하는데 도무지 추워하는 기색이 없어요. 마냥 서로 웃으며 기뻐해요. 그렇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동행하면 기쁩니다. 하나님과 365년을 동행한 에녹의 기쁨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 발 앞에서 말씀 듣던 마리아의 기쁨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품에 안기어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던 사도 요한의 기쁨을 맛봅니다. 여러분에게도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넷째, 사랑하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11절에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사실을 내가 알고 나 역시 주님을 사랑할 때 주님의 기쁨 이 우리 마음속에 충만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주변의 사람을 사랑할 때 기쁨이 됩니다.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있을 때 기쁠 수가 있어요? 사랑은 우리를 기쁘게 행복하게 합니다. 행복과 기쁨의 범위는 사랑의 범위와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참된 기쁨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세요. 죄 사함을 받으세요.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주님과 동행하며 누리는 기쁨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면서 기쁘게 사십시다.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기쁨이 없으면 비극입니다. 이 세상을 얼마나 살겠기에 한숨과 걱정 가운데서 살겠습니까? 슬픔 많은 세상에서 넘치는 기쁨을 얻어 항상 기뻐하며 천국 생활 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신 주님, 우리에게도 이 기쁨, 주님 안에 있는 참 기쁨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승리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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