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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장 복되고 성공적인 삶 (빌 01: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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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김사무엘 선교사님이 온누리 교회 선교팀을 이끌고 중국 오지에서 전도하는데, 누군가 미국에서 한 청년이 혼자 와서 길거리에서 한 사람 한 사람 붙잡고 전도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선교사님이 '누군가?' 하고 궁금하던 차에 어느 날 그 청년과 길에서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자기 아들이었습니다. 그 얘기를 하면서 온누리 교회 하용조 목사님이 '정말 못 말리는 부자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못 말리는 삶이지만 얼마나 멋있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입니까? 비록 선교사님은 돌아가셨지만 최후의 순간까지 예수 복음 들고 선교하다가 돌아가셨으니까 선교사님은 가장 성공적인 삶을 사신 것입니다.
지난 주 김사무엘 선교사님 천국 환송예배 때 하용조 목사님이 사회를 보시면서 미국 조지 타운 병원에 갔을 때 선교사님으로부터 들은 최후의 유언을 전해주셨습니다. '하 목사님! 저의 천국 환송 예배 때에는 빌립보서 1장 20-21절 말씀을 가지고 말씀을 전해주세요.' 그 말씀대로 설교를 맡은 홍정길 목사님이 오늘 본문 말씀을 가지고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사무엘 선교사님의 삶을 보면 오늘 본문 말씀대로 살다 가셨는데, 이 본문 말씀 보면 가장 복되고 성공적인 삶이 어떤 삶인지 우리에게 몇 가지 삶을 도전하고 있습니다.

1. 서로 기도해주고 서로 돕는 삶
본문 19절을 보십시오.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여기서 '이것'이란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힌 것을 말합니다. 즉 사도 바울은 '내가 이렇게 갇히게 되었지만 두 가지, 즉 너희 기도와 성령님의 도움으로 나는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너희의 간절한 기도 때문에 내가 힘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처럼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해준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어느 때에는 어려운 문제가 신기하게 풀립니다. 그때 항상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 기도를 생각하면 어느새 시름이 덜어지고 불안이 사라집니다. 나도 모르는 신비한 힘이 생기고 용기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기도해주는 그 누군가가 되어야 합니다.
이번에 김사무엘 목사님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마음이 허전했습니다. 작년 5월에 아버님 돌아가시고 한 동안 머리를 쪼갤 듯이 아팠던 증상이 그때보다는 강도가 덜하지만 이번에도 지난 일주일 간 똑같이 나타났습니다. 목양실 공기가 나빠서 그런가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건 아니었습니다. 그만큼 사무엘 목사님을 많이 의지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선교를 중시하는 미국 C&MA 교단 출신으로서 한국에서 교회를 개척한 1호 목사로 한국에서 외롭게 교회를 개척해 섬길 때, 같은 C&MA 교단 출신의 1200명 선교사 중에서 한국인 1호 선교사로 일본에서 선교하시다가 한국에 오시고 온누리 교회 하용조 목사님과 동역하면서 선교의 지경을 넓히는 목사님이 제게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가끔 힘든 일이 있을 때, 사무엘 목사님을 만나면 '이 목사님! 내가 기도해 줄께!'라고 말해줍니다. 그러면 그 소리가 참 힘이 되었습니다. 그처럼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선교하며 살아야 하고, 사도 바울을 위해 후방에서 기도해주고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빌립보 교인들처럼 살아야 합니다.
이번에 천국 환송예배에 참석하려고 저희 교단 동아시아 담당 책임자인 마이클 솜과 3분의 한국인 선교사님이 일본(김성수 선교사님 내외)과 몽고(임준호 선교사님 내외)와 대만(황수 선교사님)에서 오셨습니다. 저는 선교사님들을 만날 때마다 참 기쁩니다. 그분들 식사 대접하는 것도 기쁘고, 그분들의 애환을 들어주는 것도 기쁘고, 그 중에서도 그분들에게 우리들이 그 동안 모아두었던 후원금을 드릴 때가 제일 기쁩니다.
우리의 기도와 정성과 후원이 그분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될까 하는 생각을 하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릅니다. 역시 이 세상에서 제일 기쁜 일 중의 하나는 누군가의 힘이 되어주고 위로자가 되어주는 일입니다.
이제 김 사무엘 목사님 사모님이 혼자 남게 되었는데, 여러분들 중에 몇 분이라도 매달 일정 금액 생활비 보조를 작정할 수 있기를 바라고, 사무엘 선교사님이 황수 선교사님과 함께 추진하던 중국 후베이성 엔시 지역에 교회당 구입을 위해 필요한 비용 61,000달러도 속히 채워질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후베이성 남서쪽에 위치한 엔시 지역에는 약 4백만 명이 살고 있는데도 교회가 한 군데도 없다고 합니다. 이번에 황수 선교사님의 보고에 의하면 2년 전에 가정 교회로 시작해서 지금 약 120명이 모여 예배 드리고 있기에 교회당이 절실하게 필요한데, 그 교회당 구입하는 일을 추진하다가 사무엘 목사님이 먼저 가셨지만 그 일은 계속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기적은 홍해를 가르는 것이나 물 위를 걷는 것만 기적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놀라운 기적은 욕심 덩어리인 사람이 자기 손을 펴서 누군가를 후원하고 위로해주는 기적입니다. 여러분! 다른 어떤 신기한 기적만 좋아하지 마시고 누군가의 위로자가 되어주는 놀라운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사람은 가장 사랑을 많이 나눠준 사람입니다.

2.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한 삶
본문 20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사도 바울은 어떤 경우에도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처럼 우리 믿는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살면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고, 말씀에 비추어볼 때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 보기에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요새 기독교를 배척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 중에 예수님이 싫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다 교회가 하는 짓이 싫고 교인이 하는 짓이 싫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교회 안의 삶'과 '교회 밖의 삶'이 다른 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그 목사님이 지방으로 부흥회를 가려고 반포 터미날에서 고속버스를 탔는데, 차가 떠날 시간에 떠나지 못하고 소동이 생겼습니다. 알고 보니 우연히 차에 나환자가 타게 되었는데 그 옆에 앉은 젊은 청년이 자리를 바꿔달라고 소동을 피운 것이었습니다.
자리가 만원이어서 결국 목사님과 청년이 바꿔 앉았습니다. 옆에 앉은 나환자는 부끄러운지 서초동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대전을 지날 무렵, 나환자는 자기가 먹던 찹쌀떡을 목사님에게 드렸습니다. 목사님은 내키지 않았지만 받아서 맛있게 먹는 척 했습니다.
드디어 지방에 도착해서 첫날 저녁 부흥회를 인도하는데 설교 전에 특별 찬송하는 청년의 찬양이 너무 은혜로웠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을 보니 어디서 본 것 같았습니다. 잘 생각해보니 고속버스 안에서 소동을 벌였던 바로 그 청년이었습니다. '양지의 무대'는 좋아하고 '음지의 섬김'을 외면하는 그 모습을 보고 목사님이 씁쓸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봐도 존경받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윤리의 종교가 아니지만 그래도 믿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윤리적으로 더 예의를 지키고, 최소한 상식 이상의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끔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믿음과 몰상식을 구분하지 못하고 상식 이하의 행동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예언을 한다는 사람을 조심하십시오. 요새 그 문제가 교회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정이 깨지고, 멀쩡한 사람이 이상하게 변하고, 기독교의 좋은 이미지가 얼마나 훼손되는지 모릅니다.
어느 날 어떤 노처녀가 '어느 청년과 결혼하라.'는 예언을 받고 한 청년을 귀찮을 정도로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니까 그 청년이 진절머리를 치며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목사님이 말해주었습니다.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는 그런 예언을 주시지 않았다고 말하세요.' 그 한 마디 말로 그 노처녀 스토커를 물리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얘기도 들었습니다. 시골의 한 목사님이 서울의 큰 교회 목사님을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40일간 금식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목사님에게 10억 원을 도움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0억 원 주세요.' 서울 목사님이 기가 막혔지만 점잖게 '하나님께서 내게는 아직 그런 계시를 주지 않으셨습니다.'하고 그냥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그처럼 지금 예언을 남발하며 아슬아슬하게 영적 줄타기를 하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충격적인 사실은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3분의 1이 점집에 간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단순히 호기심 때문에 그곳에 갔다고 합니다. 호기심도 그런 호기심은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에 대해 가졌던 호기심만큼 파멸적인 호기심입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 구원은 어디로 갔고, 약속의 말씀은 어디로 갔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그 길로 계속 가면 그 영혼 앞에는 파멸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때로 하나님께서 신비한 음성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런 음성을 따라 진로도 정하고 마음에 깊은 평안을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모든 해답이 다 말씀 안에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예수님의 자취를 따르기 싫고, 예수님의 흔적을 자기 몸에 남기기 싫으니까 점집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3. 항상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삶
오늘 본문 20절 하반부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원한다'고 했고, 21절 말씀을 보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간단히 말하면 '중생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진정 능력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면 다른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생하면 됩니다. 우리 교회가 진정 부흥하기를 원하면 중생을 체험한 교인들이 많아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고민이 무엇입니까? 중생하지 않은 교인이 많은 것이 문제입니다. 즉 아직도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살아 있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따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도행전 8장을 보면 초대교회에도 그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사마리아 성 사람들은 마술사 시몬을 신처럼 떠받들고 있었습니다. 시몬의 마술에 매료된 것입니다. 그때 전도자 빌립 집사가 나타나서 복음을 전하며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자 사람들은 시몬을 버리고 빌립에게 몰려들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에서 조사차 사마리아에 와 보니 빌립에게 빠진 사람들 중에 중생한 사람들은 하나도 없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도 없었고 성령도 없었습니다. 그냥 신기한 일을 보니까 빌립에게 우르르 몰려간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신기한 것을 따라 몰려다닙니까? 그것은 그들 안에 예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성령 받기를 기도하고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고 중생하게 됩니다. 믿는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처럼 기적을 따라다녀도 안되고, 사람을 따라다녀도 안되고, 신령한 산을 찾아서도 안됩니다. 그러면 그 영혼은 반드시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중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적이 따라오게 됩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중생하는 것입니다. 가장 행복한 삶을 사는 비결도 중생하는 것이고, 가장 인간관계 잘하는 비결도 중생하는 것이고, 가장 교회생활 잘하는 비결도 중생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가 자꾸 파토 나고, 교회생활을 잘 못하는 이유는 더러운 성격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중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중생하기만 하면 그 성품, 그 성격대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멋지게 사용하시는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은 방랑적 성품을 가졌지만 중생하니까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모세는 비판적 성품을 가졌지만 중생하니까 출애굽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다혈질적 성품을 가졌지만 중생하니까 우직하고 충성스런 사도가 되었고, 바울은 칼 같은 성품을 가졌지만 중생하니까 기독교의 뼈대를 칼 같이 세우는 기둥이 되었습니다. 각기 성품은 달랐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 모두가 중생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중생해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산다고 할 때 우리는 가장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4. 그리스도를 위해 피를 흘리고 헌신하는 삶
본문 21절 하반부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고백합니다. 그처럼 죽을 각오를 했기에 사도 바울은 수많은 교회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축복은 그냥 오지 않습니다.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십자가를 지고 피를 흘려야 합니다. 그래야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축복의 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19세기에 우간다에 선교사로 있던 어느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그 목사님 교회에 '선물의 날'이 되어 온 성도들이 교회에 선물을 바치는데, 그때 한 가난한 소녀가 큰 금 덩어리를 바쳤습니다. 선교사님이 그 소녀를 붙잡고 말했습니다. '너 이것 어디서 났니?' 혹시 훔친 것이 아닌가 했는데, 알고 보니 그 소녀가 자기를 노예로 팔고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교회는 눈물 바다가 되었고 그 뒤 그 교회가 급속도로 부흥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을 사랑하면 헌신할 줄 알아야 합니다. 헌신이 없으면 신앙도 자라지 않고, 진리로 다가오지 않고, 행복과 보람도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먹고 이제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살고 주님의 영광을 삶의 목적으로 삼아 살겠다고 다짐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가장 큰 축복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며칠 전에 어떤 분이 인터넷에 쓴 '널 위한 102가지의 다짐'이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거기에는 이런 다짐들이 있었습니다.
1. 기다리게 하지 않기 2. 대신 난 끝없이 기다리기. 3. 다른 여자 친구 얘기하지 않기. 6. 핑계 대지 말기. 7. 꿈속에서도 너 만나기. 8. 너 자랑 많이 하기. 10. 너 울리지 않기. 13. 네가 때려도 잘 맞아주기. 19. 슬퍼도 '너 때문에 행복해'라고 말하기. 20. 조금씩 나은 모습 보여 주려 노력하기. 24. 너보다 빨리 걷지 않기. 31. 너를 비하하면 친구라도 쥐어 패기 32. 네 앞에서 힘든 모습 보이지 않기. 34. 바퀴벌레가 문다고 말하면 잔말 말고 믿기. 39. 편해졌다고 소홀해지지 않기. 56. 책임감 있는 행동 보여주기. 62. 네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기. 100. '어디 가자!'고 하면 두말 없이 따라 나서기.
그 글을 보면서 우리가 주님을 이렇게 사랑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우리는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신뢰하고, 주님만 자랑하고, 주님만 생각하고, 주님만 변호해야 합니다. 때로 고통이 있어도 감사하고, 행복해하고, 기쁨을 잃지 않아야 하고, 헌신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핑계 대지 말아야 하고, 주님 말씀이라면 무조건 믿고, 주님 뜻에 무조건 순종하고, 주님을 앞서지 말고, 주님 안의 형제들을 사랑하고,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항상 주님 중심적인 믿음으로 사십시오 >
요즘 세상에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교인들이 조금 잘못하면 '믿는 사람이 그래서 되느냐?'고 합니다. 열심히 믿으려고 하면 가끔 '미쳤다! 어리석다!'는 소리도 듣습니다. 노래방 가서 찬송가 부르면 '분위기 깬다!'고 하고, 심지어는 교인들조차 열심히 믿어보려는 사람을 냉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힘써 믿음을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일제 시대 때 주기철 목사님이 일경에 체포되자 사모님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살아서 돌아올 생각 마세요.' 요즘처럼 말 한 마디에 상처를 잘 받는 시대에서는 굉장히 섭섭한 말로 들릴 것입니다. '이 여편네가 내가 죽기를 바라나!'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말이 목사님에게 얼마나 힘과 용기를 주는 말인지 모릅니다.
믿음 좋은 사람도 가족 때문에 믿음의 길과 헌신의 길에서 후퇴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가족 고생할 것을 생각하면 타협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가끔 밤에 설교 준비하러 교회에 갈 때 아이들이 '아빠! 가지 마세요. 저와 함께 있어주세요.' 하면 마음이 약해집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아이가 대견하게 '아빠! 저는 걱정하지 마세요. 혼자 책 보다가 잘께요.'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말이 그렇게 힘이 됩니다.
우리는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녀의 믿음을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아이가 입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면 말해주십시오. '얘야!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고, 편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라. 그리고 주일에 학원 간다고 예배에 빠지면 안돼. 하나님이 우선이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면 길이 열린단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 가정과 그 자녀를 복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 중심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높이면 반드시 축복을 받지만 자기를 높이면 결코 축복 받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도 자기를 쓰는 사람보다 더 돋보이면 제거 대상이 되지만 자기를 쓰는 사람을 높이면 후계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높인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영원한 후계자로 삼지 않으시겠습니까?
어떤 집사님이 공장을 운영하는데 수년간 해마다 30억 원씩 적자만 내니까 고민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문제를 발견했습니다. 문제는 자기 사업에 그리스도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 문제라는 것을 깨닫고 새롭게 각오했습니다. '우리 사업장 곳곳에 예수님이 나타나게 해보자!'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목사님의 설교를 매주 사원들에게 재탕해서 들려주자'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렇게 재탕을 하려면 열심히 듣고 잘 받아 적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본인이 은혜가 되었고, 그 말씀을 그대로 사원들에게 전하니까 점차 공장 분위기도 변하고 사원들이 열심히 일을 해서 그때부터 해마다 50억 원씩 흑자를 보았다고 합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나타나면 분위기는 달라질 것입니다. 가정이 달라질 것입니다. 사업체가 달라질 것입니다. 인간관계가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영원한 후사, 즉 후계자가 되려면 항상 그리스도를 높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는 고백이 끊이지 않아서 더욱 복된 삶을 사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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