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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삶과 염려, 근심, 걱정 (빌 0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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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러분과 함께 “삶과 염려, 근심, 걱정”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집이나 빌딩에 화재가 났을 때 그 불자체보다도 무서운 것이 연기입니다 .대게 연기 때문에 질식하여 많은 희생자가 생겨납니다. 인간삶에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괴로운 일 자체보다도 그 짐이나 일로 인하여 생기는 근심, 걱정, 불안, 초조 절망 등이 마음에 파탄을 가져옵니다. 생활고와 사업의 문제로 염려와 근심을 견디지 못하고 정신적인 파탄을 당하여 자살하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러면 이와 같이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근심, 걱정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근심, 걱정은 백해무익하다
우리가 염려, 근심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해야 됩니다. 근심을 걱정은 우리 인생에 백해무익합니다. 염려와 근심이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염려, 근심을 할 가치가 있지요. 그러나 백해무익합니다.
염려와 근심은 담배와도 같습니다. 아무 도움도 우리에게 주지 못합니다. 근심걱정한다고 환경이 변화됩니까? 가정이 변화되고 직장이 변화되고 생활이 변화될 수 있습니까? 염려, 근심한다고 살 사람이 못살게 되는 것도 아니고, 늙은 사람이 젊어지지도 않고, 병든 사람이 걱정한다고 낫지 아니하고, 죽는 사람이 안 죽을수도 없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염려와 근심은 아무런 도움을 줄 수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염려하므로 키를 한자나 키울 수가 없고 머리카락 한가닥도 희고 검게 못합니다. 마태복음 6장 27절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마태복음 5장 36절에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염려와 근심은 백해무익이요, 무용지물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삶 속에서 염려와 근심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염려하든 않하든 우리 인생 생활속에 일어날 일들은 다 일어나고 있습니다. 노만 빈센트 필 박사는 ‘사람이 걱정하는 일 중에서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이 40%,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걱정이 30%,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이 26%, 우리 힘으로 어찌할수 없는 일에 대한 걱정이 4%’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염려, 근심하는 96%는 실제로 안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불과 4%밖에 안되는데 그것은 염려, 근심한다고 조금도 변화시킬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대게 우리가 염려, 근심하는 것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잠언서 15장 13절에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근심있는 사람 얼굴 보십시오. 얼굴에 광채가 사라집니다. 생기가 없습니다. 염려와 근심이 있는 사람은 그 얼굴에 나타납니다. 그만큼 우리의 육체적인 건강에 염려, 근심이 충격을 가져온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 수 있습니다.
영국의 아더 랭크라는 실업가는 항상 사업에 대한 고민과 걱정으로 불안했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염려, 근심에서 벗어나서 살 수가 없을까 생각을 하다가 좋은 묘안이 떠올랐습니다. 월요일부터 주일까지 내내 염려, 근심하지 말고 중간인 수요일 하루 한꺼번에 모아서 하루종일 염려, 근심을 하자. 그래서 월요일부터 생겨난 염려, 근심은 전부 적어가지고서 <염려, 근심함>에 집어 넣었습니다. 또 목, 금, 토, 일요일날까지의 근심, 걱정도 적어서 근심함에 넣고 수요일에 함을 열어서 하나하나 읽으면서 근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염려, 근심하던 것이 며칠이 지나고 난 다음에는 대게 해결되었든지 별로 중요치 않든지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결국에 아더 랭크는 ‘염려, 근심하는 것이 실제로 세월이 지나고 보면 무서운 것도 아니고, 중대한 것도 아니고, 해결할 수 없는 것도 아니구나’라는 것을 알고 염려, 근심을 그쳤다는 간증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으로 약 20만명의 미국군인이 전사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약 200만명의 사람이 자식들을 군대에 보내고 염려, 근심, 불안, 초조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전쟁에 죽은 사람은 20만명인데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은 200만명입니다. 10배나 많은 사람이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으로 죽었습니다. 이처럼 질병이나 전쟁보다 더 무서운 것이 염려입니다.
실제로 당뇨병 환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마음속에 근심이 있으면 당 수치가 급격히 올라간다고 합니다. 고혈압 환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사들은 용서하지 못하고 관용하지 못하는 미움 때문에 고혈압이 악화된다고 말했습니다.
며칠 전 제가 중요 인사하고 식사를 같이하는데 김장환 목사님이 함께 식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나는 어떠한 사람이 미워서 원한에 사무쳤다고 눈을 감을 때까지 그 미움이 사라지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김장환 목사님이 깜짝 놀라며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당신 암에 걸려요. 염려와 근심을 마음에 품고 미워하면 암에 걸려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저렇게 가혹한 말을 면전에 대고 할 수 있느냐?’고 생각을 했는데 가만히 두고 생각하니까 정말 올바른 말을 했어요. 사람이 미움이나 염려와 근심을 하게 되면 결국 암을 발생시키거나 굉장한 병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염려는 또한 충지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노스 웨스턴대의 레오나르도 포스트 박사에 의하면 사람이 근심, 걱정을 하게 되면 침분비가 억제된다고 합니다. 근심하고 염려하거나 화가 나면 입술이 바싹바싹 타잖아요. 입에 침이 마릅니다. 그래서 입속의 타액이 중성화되지 못해서 충치 등 입병이 생겨납니다. 그뿐 아닙니다. 미국 위스콘신주 먼로병원장인 쉰들러 박사는 류마티스의 30%가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으로 생겨나고 피부병의 33%와 담낭병의 50%는 마음에 혼란과 고통으로 생겨난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대다수의 질병이 외부의 육체적 자극 때문이 아니라 무기력감, 좌절감, 불안, 염려, 공포, 패배감, 절망등의 정서적 이유로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라토 박사는 의사들의 가장 큰 잘못은 환자의 정신을 그냥두고 육체만을 치료하는 것이라고 있습니다. 정신과 육체는 하나이므로 분리할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염려와 근심이 왜 그렇게 무섭습니까? 그것은 마음에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요사이 의학적으로 말한다면 우리 몸의 자율신경계가 있는데 우리가 염려, 근심을 하면 그 자율신경 중 일부분이 우리의 심장을 파괴하고 위장을 파괴하고 대장, 소장과 각 신체 기관을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염려와 근심은 우리의 속에 있는 신경을 자극하고 활성화해서 우리 스스로의 기관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감신경이라는것입니다. 우리가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을 하면 우리속에 있는 교감신경을 활성화해서 우리를 파괴합니다. 때문에 화를 내면 심장이 뛰고 마음이 상하면 먹은 것이 소화가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 소망, 사랑과 평강, 희락을 가지고 편안하면 부교감 신경을 자극해서 몸을 고치고 치료하고 건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은 벌써 수천년전에 오늘날 과학이 발견한 사실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다’ 마음이 즐거우면 부교감신경을 자극하므로 모든 우리의 속에 있는 기관을 살아나게 하고 건강하게 만듭니다. ‘마음에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한다.’ 마음에 근심, 불안, 초조, 절망, 미워하면 교감신경을 활성화시켜서 뼈까지 마르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집에서 생활할 때나 부부간에 서로 의견충돌이 오거나 자녀들과 속상할때도 조심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화를 내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염려하고 화를 내면 내 속에 있는 교감신경을 자극해서 심장이 파괴되고 간이 파괴하고 신장을 파괴되고 췌장이 파괴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나면 손해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평안을 가지고 사랑하고 인내하고 용서하고 자비심을 가지면 부교감 신경을 활성화시켜서 몸이 건강해지고 치료해지고 좋아지는 것입니다.
연세대학교 교수님이 말씀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한사람이 화를 낼 때 입에 비닐을 대고서 화를 낸 공기를 탁 가둬 가지고서 그것을 냉동해서 물로 만들어 가지고서 주사기에 넣어가지고서 쥐에다 주사를 해보니까 2분내로 쥐가 죽어 버리더랍니다. 이러므로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은 우리가 영적으로 암울하게 만들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가져오고 그 스트레스가 우리 육체적으로 교감신경에 작용해서 어마어마한 파괴를 심장, 위장, 대소장, 간장, 신장 온갖 곳에 가지고와서 형언할 수 없는 병을 앓게 됩니다.
그러므로 염려하고 불안하고 근심하고 초조하고 절망하고 미워하거든 ‘아∼ 내 속에 교감신경이 활성화 되었다. 이제 그 신경이 모든 기관을 파괴한다.’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용서, 사랑, 평안을 가지면 ‘아∼ 부교감 신경을 활성화 시켜서 내 몸이 젊어지고 치료해 주고 좋아진다.’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렇게 스스로를 알고 마음을 다스려야 되는 것입니다.
공해가 다가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합니까? 공해를 없앨 수가 있습니까? 바람이 불어오거나 비가 와서 공해를 없애주기 전에는 우리 힘으로 공해를 없앨 수가 없습니다. 공해속에 숨쉬고 살며 그 안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염려, 근심이 오는데 이것을 극복하려니 우리 힘으로 안되잖아요. 자기 힘으로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 미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좀처럼 안되는 일입니다.

2. 염려를 극복하기 위하여
염려와 근심을 하면 이것을 내가 하지 말고 맡길 분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염려 보따리를 맡겨 버려요. 완전히 맡겨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쉽지는 않지만 많은 사람이 염려 보따리를 맡긴다고 아침에 와서 열심히 기도하고 난 다음 갈 때 도로 다 주워 가지고서 도로 짊어지고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염려, 근심을 맡길 때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이 없으면 염려, 근심을 맡길 때는 없습니다. 신앙없는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염려, 근심을 이기지 못하고 중병을 앓다가 생명까지 잃게 됩니다.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일으킨 이후에 늘 극도의 염려와 정신적인 고통을 당했습니다. 왜냐하면 일개 신부가 유럽을 장악하고 있는 교황청에 대결해서 종교개혁을 일으켰으니 어마어마한 압력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통을 당하는데 하루는 우연히 먹이를 먹고 나무가지에서 편안하게 자고 있는 작은 새 한 마리를 보고 크게 깨달았습니다. ‘저 작은새는 내일 아침 먹을 것에 대해서도 내일밤 잠자리에 대해서도 아무 걱정이 없구나! 새 조차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아무 염려없이 자고 있는데 왜 나는 그토록 많은 걱정을 했을까? 작은새 한 마리를 돌보신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를 얼마나 아끼고 보호하시겠는가!’라고 생각했습니다.이후 루터는 자신도 그 작은 새처럼 하나님을 믿고 모든 염려를 맡기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마틴 루터는 용기와 힘을 얻어 교황청을 상대로 해서 싸워서 이기고 종교개혁을 가져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정말 하나님이 염려, 근심을 맡을 실력이 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할 때가 있습니다. 실력도 없는 분에게 보따리 맡겨봤자 소용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내 염려, 근심을 해결할 수 있을까? 내 개인문제, 가정문제, 자녀문제, 사업문제 등을 맡긴다고 해서 하나님이 해결할수 있을까요?
이사야 40장 27절로 31절에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실력이 있느냐고 묻습니까?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가는 것 같으며 달음박질해도 곤비치 않고 걸어가도 피곤치 않다고 했습니다. 능력이 한이 없게 많으신 하나님이 염려와 근심을 능히 짊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실력이 계시면 과연 하나님이 나같은 사람을 알아 주실까? 나는 벌레와 같은 인생인데 천천만만의 사람가운데 하나님이 과연 나를 알아 주실까? 하나님이 정말 나의 짐을 저주기를 기뻐하실까? 그런 질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1장 28절에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자만 오라. 교육받은 사람만 오라. 잘난 사람은 오라. 건강한 사람은 오라.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남녀노유, 빈부귀천 할것없이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직접 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짐을 저달라고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자청해서 우리들의 짐을 지시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고 염려와 근심을 맡아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계신 분이 계시기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찬송가 432장에 보면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세요. 하나님 아들이 친히 육신을 쓰고 오셔서 인생가운데 같이 계시며 풍찬노숙을 하시면서 우리의 사정을 친히 다 아시고 우리의 짐을 십자가에서 짊어지고 가셨습니다. 죄짐 짊어지고 가셨습니다. 세상과 마귀의 짐을 다 짊어지시고, 질병과 고통의 짐도 짊어지시고, 저주와 가난의 짐도 짊어지시고, 심지어 죽음과 영원한 멸망의 짐도 짊어주셨습니다.
이사야 53장 4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68편 19절에는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신 주님께서 우리와 같이 계신 것입니다.

3. 너희 염려를 주님께 맡겨라
그렇다면 우리는 적극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염려를 주께 맡기는 삶을 살아야 되겠는데 어떻게 맡길 수 있을까요? 기도와 간구로 맡겨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안믿는 사람은 기도하고 간구할 줄 모릅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간구하므로 우리 마음속에 있는 짐을 다 내려놓고 속을 다 부어 놓을 수 있잖아요. 예레미야애가 3장 33절에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로 13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도와 간구로 주님께 나아가야 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중언부언하면 안돼요. 분명하게 기도해야 돼요. 저는 마음에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이 다가올 때 되면 종이에 적습니다. 왜냐하면 그냥 기도하면 중언부언하게 되니까. 분명하게 적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면서 수십번 수백번 읽고 기도합니다.
시편 55편 22절에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횡설수설하지 않고 간단한 기도를 하더라도 하나님 우리의 기도를 분명하게 들어 주십니다.
감리교 창시자였던 요한 웨슬레는 늘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았던 사람인데 그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단순하게 기도했던 것을 유명합니다. 생전에 그가 썼던 일기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제가 그중 일부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4월 24일 목요일. 우리는 볼턴에서 류엘 하이까지 8마일을 말을 타고 달렸는데 거의 4시간이나 걸렸다. 내가 설교를 막 시작했을 때 햇빛이 내 옆머리에 어찌나 뜨겁게 비취던지 설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향해 구름으로 해를 가려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했다. 잠시후에 구름이 와서 해를 가리어서 설교끝날 때까지 그늘속에서 설교할 수 있었다.
참으로 간단한 기도입니다. ‘하나님 구름을 보내어서 해를 가리워 주시옵소서.’ 분명하고 간단한 기도 아닙니까?
4월 25일 금요일 나는 10시경에 티드몰튼 근처에서 설교하였다. 오후 3시경에는 햅튼 스톨에 가서 산등성이에서 설교하였다. 그런데 설교를 시작하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하나님께 ‘하나님 설교를 마칠 때까지 비를 멈추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는데 실제로 비가 멎어서 내가 설교를 끝마칠때까지 비가 오지 않다가 설교를 끝마치고 나니까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단순한 기도입니다.
저도 구소련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도할 때 얼마나 뜨겁던지 햇빛이 비춰서 도저히 설교할 수 없어요. 그래서 제가 강단에 앉아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구름을 보내어서 해를 가리워 주옵소서.’ 그래서 강단에 서서 설교하려니까 손바닥만한 구름이 오더니만 해를 가리워 내내 해를 따라가요. 설교를 끝마칠 때까지 구름이 가리워주는 체험을 한적이 있습니다. 기도의 내용이 장엄하고 거룩하고 복잡해야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하고 간단명료하게 거듭거듭 기도해 하나님이 응답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단순한 기도가 여러분 능력있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기도할 때 복잡한 기도는 신경을 많이 쓰잖아요. 단순한 기도는 반복할 수 있잖아요. 누가복음 18장에 불의한 재판관에게 나가서 부르짖는 과부의 기도는 너무나 단순했습니다. ‘내 원수에 대한 원한을 갚아 주소서. 내 원수에 대한 원한을 갚아 주소서’ 계속 반복했습니다. 그 반복이 효과를 발생해서 나중에 그 재판관이 응답했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기도할 때 열정으로 간구를 해야 합니다. 간절히 마음에서 끌어오르는 열정을 가지고 기도해야 돼요. 머리속에서 나온 차디찬 기도가 아니라 마음에 뜨거운 소원을 가지고 하는 간절한 기도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도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부르짖는다는 것은 속에 안타까움이 있고 하소연이 있어서 부르짖지요. 안타까움이 없는데는 왜 부르짖습니까? 그냥 조용하게 말하지요.
시편 142편 1절에도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리를 낼쯤되면 마음에 안타까움과 간절한 소원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은 뜨거운 열정으로 기도할 때 귀를 기울이시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장 10절에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괴로운데 통곡안할 수가 있어요? 울부짖지 않을수가 있겠어요? 그러한 열정적인 간구가 효과를 발생합니다.
저는 이전에 뇌성마비 아들을 부르짖어 기도해 응답받았다는 한 성도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분이 내게와서 이런 간증을 했어요.이 성도님은 해산할 날을 얼마남겨두지 않고 양수가 먼저 터지는 바람에 서둘러 병원에 가서 흡입분만기로 머리를 기계로써 잡아 당겨서 아기를 낳았습니다. 낳았을때는 괜찮은줄 알았는데 기계가 머리를 너무 조여서 뇌에 상처를 입어서 뇌성마비가 걸렸어요. 다른 애들은 다 잘자라는데 얘는 뇌성마비가 걸려서 3살이 되어도 꼼짝도 못하고 드러누워있는 전신마비 환자가 되었습니다. 그 어머니 아버지가 너무나 고통스럽고 괴로워서 불안해 하고 있는데 전도를 받아서 우리 교회에 나왔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마음에 믿음과 용기가 생겼습니다. 하루 저녁에 그 어린아기의 어머니가 기도를 하는데 얼마나 간절히 눈물을 흘리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기도했는데 부르짖고 기도하다가 성령이 임하여서 방언을 말하며 고함을 치는데 옆에서 있던 남편이 자기도 찌릿찌릿해지더랍니다. 그래서 부부가 밤새도록 어린 아들을 고쳐 달라고 기도했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모두다 눈물에 젖어 땀에 젖어 기도를 끝마치고 어린아기가 자는 방에 문을 열고 들어가니까 이 3살먹은 어린아이가 일어나서 “엄마! 아빠!” 그러면서 나오더랍니다.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에 불로써 응답한 하나님이 치료의 능력으로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간절히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냥 형식적으로 하는 기도는 힘이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끝까지 버터야 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마귀하고 씨름하고 또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귀와 싸워 이기고 하나님께 우리 믿음을 전달하는 것이므로 인내가 필요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다 가스를 사용하고 기름을 때기 때문에 나무를 때지 않잖아요. 그런데 우리 어릴때는 나무로써 밥도 짓고 군불도 땠는데요. 그러므로 학교 갔다오면 나무하러 갈때가 많습니다. 그때는 보통나무를 베면 일본순사에게 잡혀가요. 이미 나무를 베고 난 다음에는 구덩이를 파서 그 뿌리채 뽑습니다. 그런데 그것 힘들어요. 나무 베고 난 둥구리를 호미로 파고 괭이로 파서 그다음 그놈을 잡아 당깁니다. 처음에는 꿈쩍도 안해요. 그러면 또 파고 또 잡아 당기고 또 좀 쉬었다가 또 잡아 당기고 조금 흔들거리다가 조금 많이 흔들거리다가 나중에는 젖먹던 힘을 다해서 잡아 당기면 뿌리가 뽑히는 것입니다.
요사이 저는 마귀하고 싸울 때 어릴 때 나무 뿌리를 뽑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때의 경험이 마귀하고 싸우는데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인내의 기도를 해야 됩니다. 끝까지 버티면 이깁니다. 히브리서 10장 36절로 38절에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7절에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고 했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염려, 근심을 주님께 맡기고 인내로써 부르짖어 기도하면 염려와 근심도 뿌리가 뽑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기도를 해야 됩니다. 반드시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해야 됩니다. 내 기도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느냐라는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믿으라. 이 산에게 명하여 저 바다에 던져라 해도 된다’고 했습니다. 태산이 어떻게 바다로 옮겨 갑니까? 그러나 우리 인생에 개인문제, 가정문제, 생활문제, 자녀문제, 사업문제가 태산같은 문제가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내 힘으로는 안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태산을 옮기라는 것입니다. 예수 안믿는 사람은 꿈도 꿀수 없는 일이지만 예수믿는 사람은 인생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을 믿고 도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믿음이란 하나님이 기적을 행해 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량대로 믿음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태어날때부터 이목구비 사지백체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기분좋다고 팔이 올라가고 기분 나쁘다고 팔이 안올라가는 것은 아닙니다. 팔을 올리고 내리는 것은 내 자율적인 선택입니다. 춥다고 팔이 안올라가고 덥다고 팔이 올라가는 것 아닙니다. 내 선택입니다. 믿음도 내 선택입니다. 기분좋다고 믿어지고 기분 나쁘다고 믿음이 안믿어지고 몸에 불이 확확 온다고 믿어지고 몸이 싸늘하다고 안믿어지고 그것 아닙니다.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고 내앞길 칠흙같이 어두워도 내가 믿겠다고 작정을 하면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선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마어마한 태산같은 어려운 문제가 닥쳐왔을 지라도 태산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여 기적이 일어날줄 믿습니다로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땅이 꺼져도 주의 말씀은 변함이 없습니다. 주의 말씀이 어디있나요? 성경에 있습니다. 하늘이 바로 성경속에 있습니다. 이 성경말씀을 내가 믿기로 작정을 하고 결심하고 나가면 결국 태산이 물러가지 내가 물러가지 않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기적을 기대하고 믿음으로 기도해야 됩니다.
마기복음 11장 24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말했습니다.
염려란 작은 불씨와 같아서 빨리 끄지 않으면 온 집을 태웁니다. 염려, 근심이 마음에 생기면 몸을 망가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염려는 개인의 마음을 황폐케하고 생활에서 기쁨과 활력을 빼앗아 가며 삶의 분위기를 망쳐 놓고 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빌립보서 4장 7절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했습니다. 기쁨이 생길 때 기뻐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기뻐하면 마음속에 자율신경을 자극해 마음이 치료함을 받고 육체가 평안함을 얻고 고침을 받습니다. 사랑이나 평안이나 믿음이나 소망같은 것은 우리의 자율신경을 자극해서 우리 몸속에 건강과 평안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은 또다시 자율신경을 자극해서 우리 몸을 파괴합니다. 때문에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 했습니다. 기쁨은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거니와 우리 마음에 평안을 가져오고 육체에 건강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마음에 즐거움은 양약입니다. 우리 몸속에 약공장을 가동시키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개인, 가정, 생활, 자녀, 사업 무엇이든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께 나와서 맡길 하나님이 계시고 능력있는 하나님이 계시고 맡아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니 분명하게 간단 명료하게 그리고 뜨거운 열심과 열정으로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맡겨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러면 평화가 임하여서 하나님이 우리 짐을 다 맡으시고 평안을 주심으로 생각도 평안하고 마음도 평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 미움같은 것을 안고 살아가는 것은 영적인 파괴요, 심령의 파괴요 그리고 우리의 육체가 망가집니다.
여러분 흥분하고 분노하면 심장이 덜렁덜렁 뛰잖아요. 이러므로 우리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 삶의 공해인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을 제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그대로 내버려 놓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기도와 믿음으로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 이것을 제하여 버리고 마음속에 평강과 희락으로 충만하게 채우고 살 때 영도 마음도 몸도 생활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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