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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한 삶을 위한 비결 (빌 0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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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이 어느 날 거지에게 동전 한 닢을 주자 거지는 매우 행복해 했습니다. 어거스틴은 그 얼굴을 잊지 못했습니다. '행복의 열매는 기쁨이 아닌가. 나는 그 거지보다 훨씬 불행한거야. 어느 거지를 보아도 그 얼굴에 근심이 없는데 나는 갈수록 더 큰 번민과 고통에 빠져가고 있다. 따지고 보면 거지는 떳떳하게 빌어먹지만 나는 겉은 멀쩡하면서 떳떳치 못하게 빌어먹고 있는거야.' 그 당시 그는 탁월한 수사학자로 마음에도 없는 로마황제에 대한 칭찬의 연설문을 써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신은 어떤 삶은 살고 계신지요? 겉은 멀쩡하면서도 양심에 걸리는 삶을 살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어거스틴은 그 후 절대자, 그 분을 영접하고 참 행복을 누렸거니와 수많은 사람에게 그 행복을 나누어주는 사랑과 행복의 성자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후에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서 29장 11절에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행복하게 사는 사람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이 더 많은 실정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들이 행복의 길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행복한 삶을 위한 비결’이 무엇인지를 살펴봅시다

첫째, 행복하게 살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합니다. 주안에 거하는 삶이란, 곧 주님을 힘입어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하셨습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포도나무와 일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가지는 포도나무와 생명을 공유합니다. 이 때 가지는 포도나무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예수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동참한 사람입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진액을 공급받아 절로 과실을 맺듯이, 성도들은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아서 선한 행실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고 한 찬송과 같이, 우리가 주안에 있을 때 불안이 있을 수 없고, 슬픔이나 근심 걱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주안에 있을 때 우리 마음에는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포도나무로부터 풍성한 진액을 공급받는 가지는 늘 푸른 잎을 내며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주님의 풍성한 생명을 공급받아서 언제나 생동감 있는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습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저는 이 구절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상태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쓸 당시에 그는 로마 감옥에 갇힌 죄수의 신세였습니다. 언제 처형당할는지 알 수 없는 죄수의 처지에서도 사도 바울은 밖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빌립보 교회의 신자들을 향하여 항상 기뻐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이는 자기의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어둡고 습기 찬 감옥에 갇혀서 무엇이 그리 기쁘길래 그런 편지를 쓴 것일까요? “주안에서”라는 말이 그 비결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만으로 항상 기뻐할 만한 충분한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기쁨은 행복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주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사죄의 기쁨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행복의 조건을 다 갖추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양심이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화려한 생활로 죄책감을 감출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는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야 할 부채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큰 소리 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몸짓에 불과합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쳐죽인 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자 시침을 떼고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지적하시자 가인은 고백하기를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고 했습니다. 죄인은 늘 그 마음에 가책을 느끼면서 살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뻔뻔함은 고의적으로 가책을 면해 보려는 임시방편에 불과합니다. 그런 마음에 평화가 깃들리 만무합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 57:20-21)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성도들은 죄 사함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이므로 그 마음에 평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 대신 영생의 기쁨이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며 삽니다.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인생길을 홀로 걷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하루 하루를 살아갈 뿐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천국을 향하여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호하심 아래 있으므로 악한 자들이 넘볼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7-28)고 하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좋은 친구와 사귐을 갖고 있기에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믿는 우리를 친구로 대우해 주십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15:13-15)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좋은 친구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관중과 포숙아의 우정을 일컬어 관포지교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친구를 얻기도, 그런 친구가 되기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같은 우정이 너무 귀하기 때문에 수천 년을 두고 사람들이 칭송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관포지교가 무색할 만큼 좋은 친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우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희생하셨습니다.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아낌없이 버린 친구가 있다니, 세상에 이 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행복합니까? 주안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은 결코 불행할 수는 없습니다 그 행복을 빼앗을 자도 없습니다.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144::15)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심으로 언제나 행복한 삶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행복하게 살려면 관용을 베풀면서 살아야 합니다.
본문에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진정한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사람에게 꼭 나타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관용'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죄인이고 부끄러운 존재인지를 이해하게 되면 남을 더 이해하게 됩니다. 그처럼 관용을 베푸는 마음을 통해서 어렵고 힘든 일 중에서도 살아갈 힘과 용기가 생기게 되고, 문제 해결의 능력이 생겨나게 되고, 행복을 얻게 됩니다. 관용이란, 너그러운 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무인도에서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인간관계를 통해서 행복을 누립니다. 가정을 일컬어 행복의 보금자리라고 하는 이유는 가정은 부모 자식, 부부, 형제간에 관용에 근거한 친밀한 사귐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싸우다가도 몇 시간이 못 되어 언제 싸웠느냐는 듯이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서로 관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남의 부부 싸움에 간여하는 것처럼 바보짓은 없습니다. 부모 자식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경우에는 대체로 부모가 자식에게 관용을 베풉니다. 자식이기 때문에 허물이 있어도 용서해 줍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도 형제간에는 용납이 되는 것은 피를 나눈 형제로서 관용하기 때문입니다. 관용할 때 가족 간에 분쟁이 사라지고 화목한 분위기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관용을 가족에게만 베풀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로 확대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관용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운전을 해도 좀 양보하면서 하면 스트레스도 받지 않고 교통사고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에 정치인들이 관용의 정신을 조금만 발휘했더라면 대통령 탄핵이란 불상사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말실수를 합니다. 그런데 사사건건 말 꼬리를 물고 늘어지면 타협을 원칙으로 하는 정치가 아니라 진흙탕에서 물고 무는 볼 상 사나운 난장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관용은 나도 살고 너도 사는 길입니다. 노사간에도 관용이 있어야 회사도 살고 사원들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믿음의 형제들 사이에 관용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내가 먼저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면 그들도 나에게 호감을 갖고 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쪽에서는 불친절하게 굴면서 친절한 반응을 기대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관용을 베풀 수 있는 근거에 대하여 본문에는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이 가까운 것이 왜 관용의 이유가 되는 것일까요? 주님의 재림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줄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에 불과합니다. 모세는 말씀하기를 “우리의 년 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시 90:10)고 했습니다. 물론 더 오래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90세, 백세까지 사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재물을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쓰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나누는 삶을 살려고 할 것입니다.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31) 기왕에 다 쓰고 가지 못할 바에야 착한 일에 사용해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때 받을 상급을 준비하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과거에는 옷이 귀했으나 요즘은 집집마다 옷가게를 열어도 될 정도로 많은 옷을 갖고 있습니다. 또 서랍마다 사용하지 아니하는 물건이 수두룩합니다. 그런 것들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바로 그런 것이 관용의 정신입니다. 그런즉 행복하기를 원하시거든 먼저 상대방을 이해하고, 친절을 베풀고, 미소를 띤 얼굴로 대하고, 참아주고, 친교의 악수를 청하고, 먼저 대접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 행복하게 살려면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저는 어린아이들의 천진한 모습을 보노라면 제 마음이 깨끗해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또 어린아이들의 걱정 없는 얼굴을 대하면서 “천국이 이런 자들의 것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생각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염려하는 법이 없습니다. 나이가 어릴수록 걱정이 적습니다. 그것은 부모를 믿고 맡기고 살기 때문입니다. 맡기는 것이 행복의 조건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맡기지 못하니까 염려, 근심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맡기지 못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믿고 맡겼다가 낭패를 본 경험이 다 있습니다. 육이오 사변이 터졌을 때 정부는 서울을 끝까지 사수할 것이니 피난가지 말라고 방송해 놓고, 자기들은 부산으로 피신했습니다. 그 결과, 정부의 말을 믿고 서울에 남아 있었던 시민들이 무진 고생을 했습니다. 그 후부터 백성들이 정치가들의 말을 신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물론, 정부가 국민을 기만할 목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만, 국민의 안위를 책임질 만한 능력이 없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사람을 의지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말씀하기를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사2:22)고 하였고, 또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찌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시146:3,4)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턱대고 사람을 불신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사람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 역시 지혜롭지 못합니다.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다윗은 말씀하기를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 131:2)고 했습니다. 젖을 배불리 먹고 엄마 품에 안겨 있는 갓난아이처럼 만족스럽고 행복한 상태가 어디 또 있겠습니까? 다윗이 하나님의 사랑을 그처럼 풍성하게 받은 것은 다른데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의 지혜나 용맹스러움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마치 갓난아이가 제 엄마를 신뢰하듯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했기에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사실, 우리가 염려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염려는 우리를 위축시켜서 할 일도 하지 못하게 만들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마6:27)고 하셨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그 대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였습니다.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가장 위대한 특권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맡기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성도들에게 평강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신 말씀이 이를 의미합니다. 우리 인간은 지각을 갖고 있습니다. 지각이란 사물을 분별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지각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자기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큰 문제를 만나면 우리의 지각은 더 이상 창조적인 해결책을 찾아내지 못하고 자포자기하고 맙니다. 그러나 기도로써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각을 초월하는 평강을 주셔서 어떠한 형편에서도 희망을 갖고 살아가게 해 주십니다. 감사의 기도는 절망을 이기는 힘의 원천이고, 성장을 견인해주는 가장 소중한 영적 도구입니다. 기도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고, 영적 난쟁이를 영적 거인으로 만들어줍니다.
한번은 아람 군대가 엘리사가 거주하는 도단 성을 겹겹이 포위했습니다. 아침에 엘리사의 사환이 밖에 나갔다가 이 광경을 보고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습니다. 사환은 절망해서 선지자에게 말하기를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조금도 동요하지 아니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사환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이에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두른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셨을 때에는 그 말씀에 대하여 철저하게 책임을 지신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삶 전체를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심으로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넷째, 행복하게 살려면 빛의 자녀답게 행동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둠에 속한 자가 아니고 빛에 속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은 성도들이 추구해야 할 삶을 이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여기서 우리는 ‘무엇에든지’라는 표현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것은 무엇을 하든지, 무슨 일에나, 언제 어디서나 변함 없이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참된 일을 생각하고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참되신 분이시나, 마귀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참된 삶을 살 때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무엇에든지 경건해야 합니다. 말과 행동이 윤리적으로 올발라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에든지 옳게 행해야 합니다. 이는 정당하고 의롭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부도덕한 행실을 권장하고 선전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영화나 소설이나 잡지, TV 드라마 할 것 없이 불건전한 인간관계를 미화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정상적인 이야기는 유치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불 경건한 삶은 당장에는 감미로와 보이지만 그 속에는 치명적인 독이 들어 있어 결국 그 사람을 파멸시키고 맙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에든지 정결해야 합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을 깨끗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는 완전히 세속화되어 있어서 성도들이 자칫 방심하면 세속에 물들기 쉽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정결한 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3절로 4절에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무슨 물건을 선물로 주고받지 않더라도 격려의 말 한 마디, 칭찬의 말 한 마디로 얼마든지 상대방을 기쁘게 해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말과 행동이 혐오스럽지 않고 예의바르고 붙임성이 있고 사랑스러워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좋은 인상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이 가르침을 명심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야고보 선생은 말씀하기를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1:22-25)고 했습니다.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고, 몸소 실천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가르침을 순종할 때 평강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께서는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평강을 주시면 불안과 염려 따위가 우리 마음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행복하게 살려면 여호와를 경외하며 주님의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시128:1)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주안에서 누리는 행복을 맛보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주저하지 마시고 그 행복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영혼을 위하여 예비하신 안식처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마음속에 평화가 강같이 흐르고, 기쁨이 샘처럼 솟아나게 되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 세상에 사는 사람 중에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행복과 같은 행복을 맛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무리 좋고 훌륭하다 해도 우리 영혼의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어찌하여 너희가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여러분, 빈손 들고 주님께 나아와 영혼의 배부름을 얻고 참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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