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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의 푯대 (빌 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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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 주로 살고 있는 스프링 벅 이라는 산양은 보통 30마리 정도가 무리 지어 살지만 어떤 때는 갑자기 한 곳에 속속 모여 수천 마리나 되는 큰 집단을 이룰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인도자 격의 큰 양이 앞장을 서서 천천히 걷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다른 양들은 몸을 맞대고 그 뒤를 따르며 도중에 있는 풀은 모조리 먹어치웁니다. 이기심이 많은 산양은 빨리 앞으로 파고 들어가 풀을 더 먹으려고 하지만, 맹수의 습격이 두려워 결코 대열을 떠나 옆에 있는 풀을 먹으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제각기 자기를 보호하고 게다가 풀을 듬뿍 먹으려고 밀어닥치니 얼마 후에는 친구들을 마구 떠다밀면서 점점 빠르게 전진하게 됩니다. 뒤따르는 양들이 점점 빨라지기 때문에 인도자 양은 자연히 뛰게 되고, 인도자가 뛰니까 뒤에서도 늦을 세라 더욱 뜁니다. 결국 모두가 전속력으로 뛰게 됩니다.
인도자 격인 산양들은 아마 친구들이 늘어났으므로 풀이 많은 새로운 거주지로 데려갈 예정이었을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그 목적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다만 뛰는 것 외에는 생각지 않고 그저 앞으로만 돌진합니다. 모래먼지를 날리며 질주하는 양떼들은 어느 새 사막을 건너 해안에 이릅니다. 그러나 앞선 양은 멈출 수가 없습니다. 뒤에서 밀어닥치는 무서운 힘에 밀려, 냇물이 바다로 흘러내리듯 많은 산양 떼들이 바다 속으로 밀려들어갑니다. 얼마 후 바닷가엔 가련한 양들의 시체로 가득 메어집니다. 이 양떼들의 죽음의 행진은 우리 인생과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낙오자가 되거나 위험한 바깥쪽으로 밀려나서는 안 된다고 자신의 안전을 지키려는 데는 필사적입니다. 남보다 뒤지지 않는 좋은 대학, 좋은 차, 좋은 주택, 좋은 직장을 가지기 위해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그러나 질주하고 있는 목적과 목표는 분명치 않고 결국은 죽음의 길로 열심히 달려가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지금 어디로 달려가고 있습니까?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반드시 목적과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목적이 없이 허송 세월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은 어떤 곳인가. 나의 현재의 존재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이를 생각하여 올바른 결론에 도달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즉 먼저 꿈과 이상을 가지고 이것을 이룩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꿈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비전이 없습니다. 뚜렷한 생의 목적이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하루 하루의 삶을 허무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되는 대로 살고 있습니다. 내일이면 막연히 오늘보다 나아지겠지 하며 그 날 그 날을 덧없이 살고 있습니다. 설혹 목적이 있다 해도 대부분이 내 개인의 부귀 영화와 행복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저는 윤리교육시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삶의 목적을 행복'이라고 했다고 가르치면서 학생들에게 질문했습니다. 너희들 왜 사느냐? 삶의 목표가 무엇이냐 물었습니다. 대개는 목표가 없고 기껏 대답하는 소리가 먹기 위해서 산다느니, 부자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목표들은 누가복음 12장 16절 이하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와 다름이 없습니다. 이 부자는 하나님과 이웃에는 무관심하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 곡간을 지으려다가 그 날밤 그 영혼이 불리워 갔습니다.
한 노인이 길가는 나그네에게 물었습니다.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느냐고?' 나그네는 서울에 간다고 대답했습니다. 노인은 '서울은 북쪽인데 어째서 남쪽으로 가느냐 묻자' 나그네가 말하기를 '염려 마세요 나는 성실하고 부지런하니 노력 만하면 안될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고 하면서 여전히 남쪽을 향하여 갔습니다. 여러분은 이 어리석은 나그네처럼 목표 없이 무조건 노력만하면서 인생을 살 것입니까? 바다 위의 배가 가려고 하는 항구 없이 떠돌아 다니면 마침내 유령선이 될 것입니다. 박찬호나 박세리 선수가 야구선수, 골프선수가 되겠다는 목표없이 이것 저것 하다가 우연히 세계적인 선수가 되었습니까? 목표없이 노력만 한다고 성공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그 소원이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보실 수 있는 소원입니까? 사람의 인격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은 그가 처한 처지나 지위에 따라서 평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가 어떤 목표을 향하여 살고 있고, 그의 평생의 소원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가령 그의 평생 소원이 그저 잘 입고, 잘먹고, 편안히 사는 정도라면 그 사람의 수준은 동물적 인간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심는 대로 거둡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둡니다. 로마서 8장 5-8절에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니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면서 삶의 목표가 오직 눈에 보이는 행복, 쾌락, 돈, 명예만을 좇는 자들은 그 결국은 멸망에 이른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뚜렷한 삶의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목표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엄청난 큰 차이가 있습니다.
미국 뉴 저지주의 상원 의원인 모르우씨가 뉴욕시를 떠나는 기차를 탔을 때 그는 기차표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기차표를 제시하기를 기다리던 역무원이 '모로우씨,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이 상원의원이신데 설마 표를 안 사셨겠어요. 그러나 후에 표를 찾으시면 우편으로 보내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모로우씨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어려움은 그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제가 가는 행선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 기차표를 지금 꼭 찾아야만 합니다.' 미상원의원 모로우씨는 정확한 행선지를 모른 채 기차에 탔던 것입니다.
오늘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삶의 분명한 목표가 없이, 인생을 아무런 계획성도 없이 살아가기 때문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저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시세에 따라 이리저리 요동하면서 살다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공군교육사령부와 공군 대학 교관시절에 피교육자인 장병들에게 비전을 발표하는 시간을 여러 차례 가졌는데 그들 대다수가 군복무를 마치면,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예쁜 아내를 맞아 결혼하고, 아들 딸 낳고 돈 많이 벌겠다는 것이 그들의 삶의 비전과 목표의 전부였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분명한 삶의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한 추장이 나이가 들었습니다. 그는 세 아들 중 하나에게 추장직을 물려주기로 하였습니다. 추장은 아들을 데리고 사냥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추장 일행의 눈앞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나타났습니다. 그 나뭇가지에는 커다란 독수리 한 마리가 앉아 있었습니다. 추장은 세 아들에게 각각 물었습니다. 저 앞에 무엇이 보이느냐? 장남이 먼저 대답했습니다. '파란 하늘과 나무가 보입니다.' 이번에는 차남이 대답했습니다. '거대한 나무와 나뭇가지에 앉은 독수리가 보입니다. 추장은 매우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막내가 대답했습니다. '독수리의 두 날개와 그 사이의 가슴이 보입니다' '그러면 그 곳을 향해 화살을 쏘아라.' 막내의 화살은 독수리의 가슴에 명중했습니다. 추장직은 당연히 막내에게 돌아갔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표가 없는 인생은 실패한 여행일 뿐입니다.
어떤 학생이 서울에 유학하여 공부하다 농촌에 돌아왔는데 아버지가 땀을 흘리며 밭을 가는 것을 보고 도와 드릴려고 아버지를 소나무 밑에서 쉬게 하고 서투른 쟁기질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참 갈다 보니 아버지가 간 밭의 고랑은 똑바르나 자기가 간 고랑은 구부러져 있습니다. 이를 본 아버지가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목표를 세워야 똑바로 갈 수 있다.' 그래서 아들은 풀을 뜯고 있는 황소에 목표를 두고 밭을 갈았습니다. 여전히 구부러졌습니다. 왜냐하면 소가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다시 말했습니다. '얘야, 움직이지 않는 목표를 정해고 갈아야 한다. 아들은 저 앞의 포플러 나무에 목표를 두고 갈았습니다. 그러자 똑바로 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생명 바칠 대상과 목표를 가지면 1. 집중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2. 선택을 잘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어떤 직업, 어떤 배우자, 어떤 책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큰 차이가 있습니다. 냉장고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삶의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선택을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목사가 되겠다는 목표와 비전을 가진 사람은 신부를 목사 사모감으로 적당한 여자를 선택할 것입니다. 3. 목표와 비전이 있으면 인내력이 생깁니다. 목표가 없는 사람은 쉽게 포기하거나 단념하지만 목표가 있는 사람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힘들어도 참을 수 있습니다. 4. 목표가 있으면 추진력이 생기고 미리 미리 준비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한 처녀가 목사 사모가 되겠다는 목표가 정해져 있으면 결혼 전부터 남편될 목사를 위해 설교자료를 준비하고 스크렙 할 수 있습니다. 5. 목표가 있으면 방황하지 않습니다.-이것저것 하다 허송세월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군대가기 전에 삶의 목표가 있는 사람은 군 생활 중에도 자기의 목표를 위한 책을 찾아보기도 하고, 휴가 중에도 그런 곳을 찾아 가보기도 하지만, 목표가 없는 젊은이는 내무반에서 후배들을 기압이나 주고, 휴가 중에 술이나 먹고 허송세월하기 쉽니다.
옛날에 어느 시골 노인이 서울 가는 딸 네 집을 찾아왔습니다. 몇 년 사이에 어찌나 변했는지 이 집이 저 집 같고, 저 집이 이 집 같아서 노인은 당황해 했습니다. 그때 지나가던 친절한 젊은이가 노인에게 도와드릴 것이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노인은 딸네 집을 찾아왔는데 도무지 어느 집인지 모르겠다고 사정이야기를 했습니다. 젊은이는 주소도 모른다는 노인의 말에 난처해져서 그럼 혹시 딸네 집에 다른 집과 달랐던 무슨 특징이 없었던 가를 물었습니다. 노인은 한참 생각하더니 무릎을 탁치며 '이제 됐다' 싶은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있었지, 있었고 말고, 내가 그때 기억해 두기를 잘했지 우리 딸네 집 담장 위에 누런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네' 노인은 보이는 것이 영원하리라는 생각으로 표적을 삼았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비 본질의 것들에 현혹되어 삶의 목표를 그것에 둘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것은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인 경우가 많습니다. 즉 천국, 사랑, 믿음, 소망 이런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지만 아주 중요한 목표입니다.
한 영국 귀족이 부모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그 귀족은 그 돈을 가지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많은 돈을 돌연 변이 쥐를 만드는 일에 모두 투자했습니다. 그리고 수십 년 후 마침내 돌연 변이 쥐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무익한 일이었습니다. 그 귀족이 엄청난 돈과 시간과 노력과 재능을 돌연변이 쥐를 위해 바치고 무언가 특별한 일을 했다는 만족감에 일순간 빠졌지만 그 돌연변이 쥐는 인류에게 아무런 유익도 가져다 주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잘못 된 삶의 목표, 헛된 꿈들은 결국 삶을 절망으로 이끕니다. 우리의 모든 수고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과 무관한 것일 때 다 헛되고 무익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 34절 등에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이루는 것' 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섬기러 오셨고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개미떼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새롭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개미떼들은 무엇인가를 얻고자 그토록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하고 있었던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어린 나는 그 개미떼들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왔다갔다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숱한 세월이 흐른 지금, 잠시 교무실 창가에 서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개미떼처럼 저 많은 사람들은 과연 무엇 때문에 저렇게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는 것일까? 위에서 내려다보고 계실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일을 위해서 일까? 그렇지 않으면 썩어 없어질 헛된 것을 위해서 일까?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9:24-25)
많은 재산을 쌓아둔 채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도 그 재산의 위력으로 주변 사람들을 휘두르다가 세상을 떠나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남기고 간 복잡한 문제들과 그로부터 파생된 갈등을 겪는 유가족을 대하면서 '과연 그 사람은 자신의 죽음 뒤에 이같은 복잡한 문제들과 갈등이 뒤따를 줄 알면서 죽어간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전혀 알지 못한 채 죽어간 것일까'하는 의문이 생기곤 합니다.
그 사람이 평생동안 달음질하여 얻은 것, 그것은 결국 '썩을 면류관'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 사람은 불쌍하고 무책임한 사람이요, 몰랐다면 불쌍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니, 어느 쪽이든 불쌍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창밖에 보이는 저 많은 사람들이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저렇게 분주하게 달음질하는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것 즉, 소망과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 의와 생명과 영광의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달음질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생활을 보면 칠십 년을 아무 목표도 없이 삽니다. 그런 사람의 생활은 마치 산 위의 풀과 같이 바람이 부는 대로 요동합니다. 지조를 찾을 수 없고 의리와 절개도 없게 됩니다. 이런 생활이 실패로 돌아갈 것은 명백한 것입니다. 또 목표를 정하기는 정하지만 잘못 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령 학생들은 지식을 탐구하며 열심히 공부하지만 지식이 방패는 될 수 있어도 일생의 목표는 될 수 없습니다. 일류대학입학, 결혼, 돈, 세상에서의 출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일시적이요 헛된 것이며,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들은 모두가 썩을 면류관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중에 해바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해바라기는 해를 향해 자란다고 해서 해바라기입니다. 옛날 인도의 왕이 중죄를 지은 사형수에게 '기름이 가득 담긴 그릇을 주면서 이 그릇의 기름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온 성을 한 바퀴 돌고 오면 죄를 사면하리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죄수는 온 정신을 그릇에 집중하며 복잡한 성 밖 목표 지점을 돌아왔습니다. 왕은 죄수가 정말 다녀왔는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어디에서 무엇을 보았고 어디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물어보았습니다. 죄수가 모른다고 대답하자 왕은 그것도 모르면서 갔다 왔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냐고 다그쳐 물었습니다. 그때 죄수는 분명히 말하기를 '왕이여, 나의 생명이 이 그릇에 달려 있는데 어찌 한눈을 팔 수 있겠습니까? 저는 오직 그릇만 보고 다녀왔나이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때야 임금은 죄수의 성실함을 인정하여 죄를 사면했다고 합니다.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곳곳에서 다가오는 유혹의 손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를 믿는 우리들은 오직 주만 바라보며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고 푯대를 향하여 달음질합시다. 오직 성경이라는 그릇만 바라보며 살아갑시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주바라기가 됩시다.
자신이 목표한 일,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의 푯대인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초점을 맞추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유혹의 손짓에 아랑곳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반드시 참된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링컨 대통령은 소년시절 고통받는 흑인들을 보고 일생의 목표로 '노예해방'을 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정치계에 투신하여 여러 번 실패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달성하여 존경받는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간디도 어린 시절 고통받는 인도인들을 보고 '나는 커서 인도인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이 되겠다'는 목표를 정하고 분투 노력하여 지금 인도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마하트마 간디가 대영제국과 대결하여 승리한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막대한 돈, 막강한 무기, 철저한 군사조직을 가진 영국 정부를 간디가 이긴 것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목표를 분명히 설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국가를 구원하여야 한다는 목표는 이리저리 흔들릴 수 없는 분명한 방향입니다. 오직 한길이었습니다. 그는 대영제국이 물러간 후에 말했습니다.
“목표의 힘은 군사력의 힘보다 강한 것입니다. 조직적인 정신력은 조직적인 군사력보다 위대한 것입니다”
나폴레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늘 이렇게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전쟁의 승리는 우리가 이미 장악하였다. 치밀한 목표 달성 계획은 이미 텐트 안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텐트 안에서 이미 승리를 맛보았다. 나는 오직 목표만을 바라볼 뿐이다. 목표를 향해 전진해가면서 장애물이 생기면 생기는 대로 그것을 없애면 되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펠프스는 말했습니다.
“삶을 지배하는 거대한 힘 가운데 하나는 뚜렷한 목적을 갖는 것이다.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삶을 살아가기 시작할 때 목소리와 옷차림, 외모와 동작 하나 하나까지 변화하게 마련이다.”
우리 성도님들도 삶의 목표를 정하고 달려가야 합니다. 예를 들면 '나는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 '남을 구제하는 일'을 목표로 삼겠다. 남을 가르치는 일, 즉 교육, 아니면 사랑, 또는 '전도의 왕'이 되겠다. 평생을 남을 위해 기도하는 일에 누구보다 힘쓰겠다. 또는 찬송하는 일 등을 정하고 오직 그 일을 위해 전심으로 노력하고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달려갈 최종목표와 길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주님께만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제가 군대에서 장교로 복무할 때 장군 되는 것이 나의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통해 그것이 허탄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역하였습니다. 지금 저의 삶의 목표는 '많은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단12:3) 아울러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죽는 것'(막8:35)이 제 삶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저는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매일매일 기도하고, 노력하고 수고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얻은 후 지금까지 세상에서 최고로 생각했던 가치와 지식을 해(害)로 여기고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빌4:7-8) 우리도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것들을 다 해로 여기고 배설물처럼 여겨야 삶의 전환점을 맞습니다.
라인홀드 니버라는 사람이 이러한 기도문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이여, 나에게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없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정을 주시고, 내 힘으로 고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용기를 주시며, 그리고 이 두 가지 차이를 깨달아 알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낡고 더러운 옷처럼 벗어 버려야할 것은 없습니까? 그것을 깨닫는 지혜와, 깨달았다면 과감하게 방향전환 즉 고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더러운 세상의 욕망을 쫓던 방향에서 의로운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아 하겠습니다. 오직 내 자신만을 생각하던 자리에서 방향을 전환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을 생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던 자리에서 절대 순종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 사람처럼 헛되고 무익한 것을 좇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고, 세월을 아껴서 주님께 영광돌리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끝으로 로마서 14장 8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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