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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빌 0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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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애리조나주의 한 농장에 강렬한 허리케인이 불어닥쳤습니다. 허리케인은 집과 농작물 그리고 가축들까지 모두 날려버렸습니다. 농부는 절망하여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때 무너진 닭장 속에서 벼슬이 찢기고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수탉 한 마리가 비틀거리며 걸어나왔습니다. 수탉은 날개를 퍼덕이며 무너지지 않은 담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 아침 햇살을 바라보며 목청껏 소리를 쳤습니다.
“꼬끼오” 농부는 이 모습을 보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래 다시 일어나자. 나도 하늘을 향해 울고 있는 저 수탉처럼 다시 일어나자.’
잿더미 속에서 수탉이 울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본성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고난이 오면 하나님께 울부짖도록 하는 본성을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총체적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성도들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위기에 처할 때마다 부르짖을 수 있는 본성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본성을 찾을 때 하나님은 분명히 회복을 주십니다.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란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삼하22:3)

뉴질랜드라는 곳에는 날지 못하는 새가 다섯 종류나 있습니다. 왜 유독 이 섬에만 이렇게 많은 종류의 새가 날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아십니까? 왜냐하면 그 뉴질랜드에는 새의 천적이 되는 다른 동물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뱀들도 독이 없는 뱀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새들은 굳이 힘들게 땅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를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땅에서 지내다보니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는 새가 되고 만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새들이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위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실패가 없기 때문입니다. 게으르고 나약한 새들이 굶주린 맹수에게 잡혀 먹히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잃는 실패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평범함은 생활은 삶을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위기는 새를 날아오르도록 합니다. 새를 새답게 만들어 줍니다. 때문에 실패의 위기는 우리의 삶을 한 차원 더 높은 곳으로 날아오르게 만듭니다.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답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위기요 실패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다 해서 인생이 그냥 공짜로 쉽게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슨 보물 방망이나 그리고 요술 방망이를 주어서 되는 대로 그냥 척척 잘되게 하려는 그런 하나님은 절대로 아니십니다. 오히려 믿음의 생활을 해보면 안 믿는 사람보다 훨씬 더 어렵습니다. 좁은 길로 가게 합니다. 많은 시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쉽게 우리를 기르지 않습니다. 내 뜻대로 되게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반대의 길로 늘 가게 하시고 오늘 우리는 신앙생활에 많은 영적 훈련을 받게 하는 그 훈련을 통하여 우리는 여러 가지 눈물도 흘리고 고민도 많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내 뜻대로 되는 것보다는 하나님 뜻대로 되는 것이 얼마나 축복이고 이 훈련이 얼마나 값진 훈련 이여서 우리의 인생을 영원히 후회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 그의 자녀 그의 택한 사람, 들어 쓰실 귀한 사람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를 불러서 하나님은 엄청난 영적 훈련을 하게 하십니다. 고난과 십자가와 아픔과 눈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세계에 영적으로 크게 들어 쓰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33:29)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을 거스려 올라 가지만 죽은 고기는 물결을 따라 내려 갑니다. 사람(안드로포스)이란 위를 바라보는 존재란 뜻입니다. 모든 성공자는 다 성공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그들은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반드시 성공하게 됩니다. 오늘 목표를 확실히 정해놓고 저 높을 곳을 향하여 전진하는 믿음을 가집시다.
첫째, 성령 안에서 비젼을 가진 자만이 높이 전진할 수가 있습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과 똑같고 성경에 꿈이 없는 민족은 망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비젼 있는 사람을 통해서만 역사 하십니다. 링컨은 남북 전쟁 당시에 전투에 성공하기 위해 다리를 건널 때마다 참모들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건너간 다리를 끊어 버렸습니다. 죽음이 아니면 승리였지 삶이 아니면 패배를 선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은 뒤로 물러가는 사람이 아니고 홍해같은 바다도 갈라내고 여리고성 같은 철벽성도 무너뜨리고 오직 전진 하는 사람 입니다. 믿음으로 높은 곳을 향하여 전진할 때 역사는 성령이 하시고 성령의 사람이 가는 곳마다 지금도 기적은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둘째, 용기 있는 사람만이 높은 곳을 향하여 전진할 수 있습니다. 기회는 용기있는 사람의 것이요, 기회를 가진 사람은 반드시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돈이 없고 지식이 없어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용기가 없어 못하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의사는 없고 변호사는 없습니다. 성공자로 태어나거나 실패자로 태어 나지를 않습니다. 성난 파도를 두려워 마십시요. 하나님은 성난 파도 속에서 고요한 아침을 만들고 계십니다. 문제 뒤에는 큰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스펄죤 목사님은 청년 시절에 용기를 잃어 버리고 방황할 때 어느 시골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목사님 설교 중에 “여기 방황 하는 청년 있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습니다’는 말씀에 용기를 얻어 세계적인 목회자요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홍해 바다가 갈라질 때 용기의 사람이 물에 뛰어 들었을 때 바다가 갈라 졌다는 예화가 있습니다.
강철왕 카네기는 할일없이 방황하고 있을 때 믿음의 사람을 만나 그가 ① 성령받고 주의 일꾼 되라. ② 예배시간 빠지지 말라. ③ 십일조 생활을 잘하라. ④ 진실하게 살라. ⑤ 용기있는 사람 되라는 말씀을 듣고 조그마한 사업을 시작하여 세계적인 강철왕이 된 것입니다. 용기 있는 사람은 삶의 패배를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걸림돌을 디딤돌로 이용하고 문제를 이용하여 오히려 성공하게 됩니다.
셋째,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만이 높은 곳을 향하여 전진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1976년 6일 전쟁은 유명한 사건입니다. 아랍 공화국에서는 이번 전쟁은 최후의 전쟁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고 이스라엘은 단 시일내에 전쟁을 끝낼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과연 6일만에 이스라엘의 승리로 전쟁은 끝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13장∼14장에 최후의 승리자와 패배자의 모습이 나옵니다. 12명의 정탐꾼 중 10명은 부정적이고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긍정적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되는 것만 보고 말하고 되는 것만 고르는 소망적 천재들이고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10명은 안되는 것만 보고 말하고 안되는 것만 고르는 비극적인 천재들이었습니다. 결과는 용기있는 사람들만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된 것입니다. 물고기는 물에서 떠나면 끝나고 나무는 땅에서 뽑히면 끝나고 인생은 하나님에게서 떠나면 끝장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만이 계속 높은 곳을 향해 전진하여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성령 충만하여 큰 비젼과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저 높은 곳(푯대)을 향하여 전진하는 성공적인 사람들이 됩시다.
'산을 만드시고, 바람을 창조하시고, 하시고자 하는 것을 사람에게 알리시고, 여명을 어둠으로 바꾸시고, 땅의 높은 곳을 밟고서 걸어다니시는 분, 그분의 이름은 '주 만군의 하나님'이시다.'(아모스 4:13)

몇 년 전, 한 대학생이 자살했습니다. 대학 입시에 실패하여 자살한 거라면 이해가 갑니다만, 그는 우수한 성적을 받아 원하던 대학에 들어간 학생이었습니다. 합격을 축하하던 사람들은 그의 소식을 듣고 매우 당혹스러워했습니다. 장례식이 끝나고 얼마 후 책상 서랍에서 그 학생의 유서가 발견되었습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자살 이유가 적혀 있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죄송합니다. 저는 이제 살기가 싫어졌습니다. 오로지 대학 입시만을 위해 공부했습니다만 합격한 지금에 와서는 그 모든 것이 헛되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공부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라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극심한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만, 저는 그의 죽음 속에서 인생의 본질적 질문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어떤 가치와 목적을 향해 살아가는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삶의 진실성 여부는 우리가 어떤 가치와 목적을 향하고 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높은 곳에 푯대를 세우고 달려가는 사람은 눈과 마음과 일상 속에서 밝은 빛이 나옵니다. 반면 저급하고 값싼 목적 안에서 헤매는 사람의 삶에는 음울한 그늘이 드리워집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로새서 3:2)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우리 가정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아직도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까? 바쁘고 피곤해서 편리함과 타협하고 대치하지는 않았습니까? 보통으로는 그러기가 쉽습니다. 사람들은 힘든 것보다는 쉽고 편한 것을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는 초대교회와 같은 교회가 되는 것을 목표로 설립된 교회입니다. 이 목표를 향해 지금까지 걸어오고 있습니다. 계속 이 목표를 향해서 전진해야 합니다. 상처받은 심령을 부둥켜안고 나오는 분들이 정말 치유 받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실패한 사람이 나아와 승리의 확신을 얻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낙심한 심령이 나아와 새 소망을 가지게 되는 교회 되기를 바랍니다. 갈 길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심령이 나아와 생명의 길을 찾게 되는 감격스러운 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힘없는 교회가 아니라 힘있는 교회, 능력 있는 교회, 성령이 충만한 교회,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푯대와 목표를 향해 계속 전진합시다.

모든 사람은 동등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100중 5명 즉, 5% 미만 사람만이 높은 목표를 설정하고 달성합니다.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점은 훈련입니다. 훈련은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잠재력을 개발시킵니다. 오직 소수의 사람만이 잠재력을 개발시켜 행복하고 건강하고 보다 생산적인 삶,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한한 능력을 주셨는데 왜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의 능력의 10%만을 개발시킬까요. 그것은 우리가 10%만을 발휘하면서 편안하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일을 도전하는 데 두려움을 갖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할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L사장은 수영을 못합니다.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경험을 한 후 물을 멀리 합니다. L사장은 수영장에 같이 가자는 아들의 요청에 수영을 배우기로 결심했습니다. 용기를 냈습니다. 그리고 수영장에 가서 코치에게 레슨을 받으면서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6개월이 지난 지금 온 가족이 주말이면 수영장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냅니다. 수영을 하게 된 L사장은 새로운 프로젝트에도 열정적으로 임합니다. 자신감이 붙었기 때문입니다. 용기를 갖고서 자신을 훈련시키십시오. 자신의 높은 목표를 달성해 나가게 됩니다.
'할렐루야. 하늘에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높은 곳에서 주님을 찬양하여라.'(시148:1)

세계를 움직이는 민족의 힘은 지하자원이 아닙니다. 땅이 아닙니다. 정치적인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나라 정치도 다 비슷합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강건할 때 다 소화하고 다 이겨낼 수 있습니다. 넉넉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모든 것 다 이만하면 다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장 큰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우리나라의 도덕이 지금 아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신문에 보신대로 지리산 반달곰이 지금 붙잡혔어요. 신문에 철조망에 있는 것을 찍었어요. 이 지리산 반달곰을 왜 잡았어요? 왜 가두었어요? 높은 곳에 있어야 할 반달곰이 내려와서 암자를 습격하고, 꿀통을 뒤져서 꿀을 다 먹고, 염소를 막 죽이고 하니까 가두어 버린 거예요. 높이 올라가야 되는데 1000m 아래로 내려오면 안 되는데 점점 내려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내려오면 붙잡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붙잡혔습니다. 큰 시험을 당했습니. 롯이라고 하는 분은 소돔으로 내려갔다가 소돔성에서 다 잃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출세하고 돈 벌고 지위도 높이고 자동차도 고급으로 높습니다. 음식 문화도 높였습니다. 모든 것 다 높이고 친구들 사귀고 다 높였습니다. 아주 유명한 권력 있는 분들만 사귑니다. 그러나 어두움의 문화는 낮은 곳을 찾아갑니다. 나중에 보면 그 높은 곳에서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낮은 곳으로 내려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고, 택함을 받아도,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이 거하지 않습니다. 역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낮은 곳에서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 계신지 안 계신지 모릅니다. 낮은 곳에 있으니 모르는 것입니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한국이 올라가고 우리 모든 성도들이 올라갈 때에 이 민족의 앞날은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가서 살아야 합니까? 영적 높은 곳을 찾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가정이 어떤 가정이 되길 원하십니까? 영적으로 높은 가정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잘 경외하고 도덕 수준을 높이십시오. 여러분의 이상과 꿈을 높이십시오. 봉사를 낮은 곳에서 하지 말고 높은 곳으로 봉사를 이끌어 내십시오. 미국에 빌리 그레함 목사님의 사모님은 결혼 전에 그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나는 미남을 원치 않습니다. 나는 부자를 원치 않습니다. 나는 가문 좋은 남자도 원치 않습니다. 지식 많은 남자도 원치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믿음 좋은 남편을 원합니다.” 영적으로 높은 자리를 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기도, 결혼관도 이런 높은 결혼관을 가지고 있고 우리의 미래도 우리의 삶도 이런 곳을 찾아 나갈 때 우리는 조금 없는 어려움, 조금 가난함, 조금 시험 드는 것은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교회는 높은 곳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은혜를 받기 위해서 높은 곳을 찾아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저주와 슬픔이 없습니다. 시기와 다툼이 없습니다. 그런 것 하려면 교회에 나올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는 불의와 죄악을 쫓는 자들이 나오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멸망과 사망을 벗어나서 주님을 바라보고 천국을 목표하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기 위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의 낮은 곳에 있는 이 모든 어두움의 세력을 멀리하려고 나오는 것입니다. 온갖 음란과 방탕과 술 취함과 술수와 원수 맺고 당을 짓고 이기적으로 살아가려고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높으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님에게로 나오는 줄 믿습니다.
어떤 분이 가정이 파탄나서 자살을 하려고 하는데, 자살하기 직전에 길을 걷는데, 교회앞에 포스터가 붙어 있었는데 ‘세상을 이기는 삶’ 이라는 글이 있었다고 합니다. 세상을 어떻게 이기느냐? 괴로운 이 세상, 세상이 이렇게 싫은데 세상을 어떻게 이기냐? 를 알기 위해서 교회에 나와서 은혜를 받고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세상을 정말 이긴 것입니다. 낮은 곳에서는 세상을 못 이깁니다. 높은 곳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모든 어려움은 낮은 곳에 있으면 흔들리는 것입니다. 마음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비행기를 타 보신 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비행기는 낮은 곳에서 뜰 때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륙하기 10분전후에는 모든 직원, 승객, 스튜어디스, 기장 다 긴장하는 것입니다. 다 붙잡아 매고, 말도 안 하고, 의자도 전부 세워 가지고 긴장하는 것입니다. 내릴 때도 똑같습니다. 긴장하는 것입니다. 왜 그래요? 내려오니까 그렇습니다. 비행기 사고가 90%가 전부 낮은 곳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문제가 안 생기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고공증이 있어서 높이 올라가면 겁내는 분이 있습니다. 반면에 많은 사람들이 잠을 잡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기에는 아무 걱정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나라 경제가 내려가는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내려가는 게 무서운 것입니다. 영적으로 흐트러지고 내려갈 때가 나라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려움은 넉넉히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 나와서도 낮은 곳을 찾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생활 하면서도 민들레와 같이 낮은 곳에서 뿌리 내리고 더 이상 자라지 못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건 왜 그렇습니까? 아직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왔는데도 애굽의 문화를 버리지 못하고, 쫓아가고 이중적인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교회 와서 이중적인 믿음을 가지고 이중적인 생활을 하면, 영적으로 연약해지는 것입니다. 낮은 시험이 많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것을 하나하나 끊기 위해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할 줄 믿습니다. 성도들의 영적인 철학은 간단합니다. 육적인 것은 적당이하고 영적인 것은 최선을 찾고 잘 믿으려고 하고 입는 것은 적당이 하고 먹는 것도 적당이 먹고 항상 적당한 선에서 우리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 사는 집도 적당이 하면 되고 자동차도 적당이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적당하면 안됩니다. 영적으로는 높이 올라가는 삶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살아보면 육적인 것은 대단한 것 같아도 살아보면 다 그게 그것입니다.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가 있습니다. 한 번쯤은 우리가 다 이 책을 읽어 보았을 것입니다. 멕시코 해변에서 조각배를 타고, 조그만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나갑니다. 조그만 소년하고 고기를 잡으러 나가는데 40일 동안 고기를 잡지 못합니다. 소년은 집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노인 혼자서 바다에서 끊임없이 고기를 잡으려고 기다립니다. 드디어 83일 만에 바다에 큰 고기가 떠오릅니다. 흥분하고 감격합니다. 결국 고기를 잡게 되는데, 생명 걸고 몇 며칠 동안 얼마나 힘들여서 고기를 잡아서 배에 매고 돌아오게 됩니다. 돌아오다가 상어 떼의 습격을 받아서 싸움을 하게 됩니다. 많은 상처를 입고, 이 노인이 기진맥진하며 겨우 살아서 돌아와 보니 고기는 이미 다 뜯겨 버리고요.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습니다. 뒤따라 오는 고기들에 의해서 다 뜯겨지고 나중에는 빈 배, 빈 몸, 상처밖에 없고 결국에는 집으로 혼자 들어가 쓸쓸하게 잠을 자는 것으로 끝나게 됩니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와 높은 벼슬 자리,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지나고 보면 잠깐입니다. 얼마나 힘들여 잡은 큰 고기이지만 지나고 보면 다 나가는 거예요. 몸이 아프고 병들고, 하루하루 사는 것이 인간입니다. 우리 모두 생명 걸고 너무 고기 잡는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하나님을 잘 경외하고 저 높은 곳을 바라보고, 믿음 지키고, 양심 깨끗하게 관리하고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고 자녀들도 믿음으로 잘 기르고 저 높고 깊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전진하면서 살아가는 성도들 되기를 바랍니다.
* 기도:자비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주의 성전에 나왔습니다. 이 시대가 너무너무 여러 가지로 절망적이고 위기에서 있습니다. 전쟁도 하나님께서 막아주실 줄로 믿습니다. 가정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줄로 믿습니다. 모든 사람 자살하는 걸 어디에서 막겠습니까? 주님의 품안에 은혜 받으면 자살 마귀 다 물리칠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어떠한 타락도 위기도 저주에서도 승리할 줄 믿습니다. 신앙의 선배들의 믿음을 본 받게 하소서. 아브라함의 믿음, 아브라함의 길, 우리 모두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가게 하옵소서. 오늘 주님 앞에 나온 모든 성도들. 이 세상 살면서 영적으로 무 관심한 성도가 없게 하여 주시고, 항상 영적으로 높은 곳을 찾아 올라가고 사모하는 복된 성도들 만들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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