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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됨의 생활의 4가지 증거 (유 0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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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에서 지진이 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부상당했다는 얘기를 얼마 전에 들었는데 대만에서도 지진이 나서 우리 나라에서도 구호물품과 구조대원을 보냈는데 그들이 어린아이를 구해서 큰 뉴스가 되었던 것을 우리가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지진이 날 때마다 많은 것을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의 신앙의 삶에도 영적인 지진이 일어날 때 든든히 설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1952년 동경에 큰 지진이 일어나 모든 집들이 무너졌지만 한 건물만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 건물은 『인페리어 호텔』인데 이 호텔이 든든했던 이유는 그 건물을 짓는데 공사기간이 4년이나 걸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보편적으로 1년이나 1년 반이면 되는데 이 건물은 시간과 비용을 몇 배로 들여서 진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조롱하고 비웃고 손가락질을 많이 했겠습니까? 그러나 이 건물을 진 사람을 꿋꿋하게 잘 지었습니다. 그때는 손해가 나는 것 같았지만 지진이 나니 그때서야 그 진가를 발휘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이 꼭 그렇게 믿어야 하는가 손가락질 할 때도 있지만 영적인 지진이 날 때 비로소 우리 자신의 진가를 발귀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예수님의 동생 유다가 마지막때에 많은 교회들이 핍박과 어려움을 겪고 이단 들의 침투속에서 교회를 지켜나가야 될때 주신 말씀입니다. 그때 그는 4가지 중요한 사실을 얘기하면서 성도된 생활의 4가지 증거, 든든히 서는 교회의 4가지 신앙생활의 증거를 우리에게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다시한번 생각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고 든든히 세워져 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라.(20)
우리 신앙생활의 기초와 기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 한 중풍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 중풍병자의 소원은 단지 하나 병을 고치는 것일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일어나 걸어가라'고 말씀하신 것 외에 한가지 더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생각에는 병들면 건강해 지고 배고프면 먹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던 것입니다. 죄사함을 받았으니 일어나 걸으라는 것입니다. 육적인 문제와 함께 영적인 문제까지도 해결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영적인 건강이 있어야 육적인 건강도 온다는 것이니다. 모든 중풍병이 모두 죄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니지만 이 중풍병자는 죄가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죄의 문제를 해결받으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사실을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의 역사나 우리의 사회를 볼때 얼마나 불안합니까? 답답한 것이 이루 말할 길이 없습니다. 어제도 뉴스에 인천 지하철을 개통해야 하는데 철근을 너무나 적게 써서 무너지 위험이 있다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건축자들은 그래도 괜찮다고 하지만 문제는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죄사함을 받지못한 죄인들이 걷고 뛰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천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천년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큽니까? 그러나 기대보다는 불안감이 더 많습니다. 엄청난 인구증가, 심각한 식량문제 그리고 쓰레기 문제와 엄청난 공해문제 어떻게 해결하겠습니까? 특히 우리나라는 남녀 성비문제가 심각합니다. 앞으로 이 아이들이 결혼하게 되면 여자 아이들은 편히 결혼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남녀의 성비가 맞지 않아 남자가 많게 되면 이땅에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습니까?

생물학자들에 의하면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은 생산, 소비 그리고 분쇄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생산은 식물로, 소비는 동물로 보는데 생산과 소비의 균형이 놀랍다고 합니다. 풍년이 들어 식물의 소출이 많으면 소비자인 동물도 같이 늘어난다고 합니다. 만약 흉년이 들어 실물의 소출이 적어지게 되면 동물도 도태가 되어 많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자연은 언제나 그 나름 대로의 균형을 잘 맞춰가고 있습니다. 소비자인 동물이 많이 죽게 되면 분쇄자인 미생물이 나타나서 썩게 하고 생산자인 식물에게 돌려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이 너무나 완벽해서 이 세상을 폐기물이 없는 아름다운 세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연의 균형을 깬 것은 바로 인간입니다. 죄인된 인간들이 이 균형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죄의 뿌리가 무엇입니까? 바로 욕심입니다. 욕심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균형이 깨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생산은 언제나 소비에 필요한 만큼 해야 합니다만 인간의 생산은 소유의 필요에 따라 생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두다 배추농사, 다 고추농사를 지으니 파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필요한 만큼만 하면 서로 다 잘 사는데 말입니다. 우리 스스로 생각은 많이 지어서 많이 팔면 이익이 많이 날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놓지 않습니다. 소비의 필요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소유의 필요는 한계가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생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욕심이 우리 자연의 균형을 깨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들에게 과학의 발달, 의학의 발달, 생명공학의 발달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더 많은 인간의 죄된 욕구를 채워줄 뿐입니다. 분쇄 자들이 분쇄할 수 없는 폐기물을 만들어 내어서 결국은 이 땅의 공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 인구의 문제, 식량의 문제 공해와 환경의 문제를 깊이 따져보게 되면 모두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과학만 발달하니 그 과학의 공해를 일으키고 그 공해로 인해 온 인류가 파멸의 길로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 사회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독약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죄사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불신앙입니다. 오늘 우리 인류가 방황하는 것은 죄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불 신앙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신앙인도 죄를 지을 수있는데 그 순간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거룩한 믿음의 터 위에 우리의 신앙을 건축해야 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죄 사함 받지 않고 일어나 걸으려고 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원한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지키라고 주셨습니다. 그러나 계명을 지키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구출해 낸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죄인되었을때에 구출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자녀들이야 말로 계명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죄된 인간들이 계명을 지키다 보니 그 계명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겸손해 지는 것이 아니라 누가 지켰느냐만을 따지며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높으냐만을 따집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고 이런 사람들이 저주받을 사람들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구원받음을 기뻐하는 성도들이 될수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랑 위에 우리를 건축해야 합니다. 이것 없이는 우리가 살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구원의 감격위에 자기의 신앙을 건축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위에 우리의 기쁨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거룩한 믿음위에 자신을 건축하는 사람입니다.

2.성령으로 기도하라.(20)
성령 없는 자 즉 이방인의 기도는 어떠합니까? 주문을 외우는 것입니다. 무엇을 몇 시간 외우면 어떤 결과가 있다고 하면서 도를 닦는 것입니다. 주문을 또 다른 말로 하면 요구하는 것입니다. 달라는 것입니다. 이들의 기도 속에는 늘 달라고만 하는 내용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다릅니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도 내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깨닫게 하고 그 안에서 참된 기도를 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말로만 해야 것이 기도인줄로 압니다. 그러나 기도는 대화입니다. 대화는 서로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는 것만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도 들을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성령만이 우리에게 듣게 하심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기도는 성령 안에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고 하면 보통 방언을 하느냐, 기적을 행하느냐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착각하지 마십시오. 물론 성령 안에서 기도하면 방언도 하고 병고침도 있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만약 그것만이 전부라서 기도할때마다 병이 낫고 기적이 일어난다면 이 세상의 질서는 어떠하겠습니까? 저는 가끔 바쁘면 '오늘 해가 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 기도대로 해가 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어느 사람은 밤이 빨리 왔으면 하고 기도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말입니다. 성령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기적을 나타내는 것만이 아닙니다.

기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을 향해 들어갈때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는 사람에게 얘기했습니다. '은과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래서 이 병자가 고침 받았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은과 금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나눠 줄만한 은과 금이 없었습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이고, 능력있는 사람이고, 남의 병을 고쳐줄만한 사람들이지만 실제 자신들의 주머니에는 은과 금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내가 없으면 남에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사도들은 없지만 남에게 줄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기적입니다. 아무것도 갖지 못한 사람이 남에게 준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은과금이 많은 것이 축복입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로 부요한 것이 축복입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추어야 합니다. 어느 것이 우리의 삶의 부요하게 하는 것인가를 심각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솔로몬이 임금이 되고난 후 축복받아서 부요할 때 금으로 방패를 만들었습니다. 금으로 방패를 만들면 값은 비싸겠지만 방패로서의 가치는 없습니다. 상대방이 칼로 치면 금으로 만든 방패는 아마 다 소용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솔로몬과 같이 금으로 방패를 삼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 든든하고 자신의 삶이 든든히 서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금은 우리를 든든히 지켜줄 수 없습니다. 금으로 방패를 삼는 사람이 무사한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자신의 방패를 삼는 사람은 강하고 부요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말합니다.'여호와는 나의방패시오 나의영광이시요 나의 머리 드시는 자니이다'

사도바울은 얼마나 가난했습니까?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그러나 그는 말했습니다.'내가 비천에 처할줄로 알고 풍부에 처할줄도 알아 어떤 상황에서든지 견딜줄 알았다' 즉 가난할 때도 부자일때도 배부를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풍성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없는 사람은 가난할 때 아주 못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부할 때는 또 사는것 처럼 느낌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렇게 산다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령안에 살면서 어려움도, 가난도, 병고도 이기고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부요함이 어디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저는 가끔 달란트의 비유를 보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맞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왜 부자가 되고 어떤 사람은 왜 가난하게 됩니까? 부지런 하면 부자되고 게으르면 가난하게 된다는 것 물로 맞는 말이지만 다 맞는 말은 아닌 것같습니다. 부자는 하나의 달란트 인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어떤 사람은 한 달란트를 가진 것 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이 다 다섯달란트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우리의 소유를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소유를 가지고 얼만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하느냐를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문화를 가졌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삶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헌신하면 안되는 일이 없습니다. 영적으로 풍요한 삶을 살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 안에서 기도해서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최선을 다 하는 여러분 될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어떤 분들은 우스개 소리로 얘기합니다. 요즘은 방언이 없는 이유는 종로에 영어학원이 많이 생겨서 그렇다고 합니다. 또 왜 병고치는 은사는 주지 않으시는가 하면 강남에 병원들이 너무 잘 해서 병고치는 은사를 덜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가지고 그런 기적만 바랄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삶의 현장, 이것이 성전일줄 알고, 성직인줄 알고 최선을 다해 충성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라.(21)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이 굉장히 눈이 나빠서 멀리 보는 안경과 가까이 보는 안경, 꼭 안경을 두개씩가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안경하나는 쓰고 또 다른 하나는 주머니에 넣었으니 말입니다. 한번은 밀워키에서 대중들 앞에서 연설을 하는데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하는 사람이 정확히 대통령의 가슴을 명중시켰는데 그 총알이 튕겨져 나간 것입니다. 대중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총알이 튕겨 나갔으니 말입니다. 요즘 안경 집은 천이나 플라스틱으로 만들어 져 있지만 그때만 해도 안경이 귀한 것이어서 안경집이 강철로 만들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때문에 살아난 것입니다. 루즈벨트는 생각했습니다. 눈이 나쁜 것이 그렇게 불편해서 하나님께 원망도 해고 그랬는데 바로 이때를 위함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했다고 합니다.

이런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 만이 좋다고 하지만 나쁜 것도 좋은 것으로 볼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이런 것을 알수 있습니까? 요 14: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이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친아들에게 쫓겨 맨말로 예루살렘을 도망나와야만 했습니다. 겨우 목숨을 얻은 다윗은 뭐라고 했습니까? 그때 그는 다른 곳에 가지 않았습니다.' 시냇물이 사슴을 사모하듯이 내가 주를 사모합니다'라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때에 비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많은 어려움과 시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좋은 일 많이 했을 때 교만하지 않고 시험에 들지 않는 단 한가지의 방법은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밖에는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여러분을 지켜나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21)

긍휼은 불쌍히 여김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은 받았지만 여전히 부족합니다. 죄 가운데 있어서 실족하기 쉽습니다. 다윗도 위대했지만 간음 죄를 지었고, 베드로도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지만 이내 사탄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이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 가서 잔치상을 받았습니다. 유대는 먼지가 많은 곳으로 샌달을 신고다니기에 유대인들의 집에 들어가면 물로 발을 씻겨주고 향수 몇 방울을 떨어뜨려 주는 것이 최고의 대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셨을때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씻어주고 그 말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이것을 옆에서 본 제자 가롯유다가 시험에 들었습니다. '저렇게 비싼 향유, 노동자가 일년을 벌어야만 살수 있는 것인데 저것을 가지고 예수님의 발에 붓는다는 말인가, 그것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면 얼마나 많이 도와줄 수있는데..' 성경은 유다를 도적이라고 했습니다. 가롯유다는 은혜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예수님의 제자였으면서도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귀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이 제자냐, 목사냐 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지위를 얻고 권세를 누리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마음가짐과 말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아무리 목사, 장로가 되어도 말을 함부로 하면 그 사람은 아름답고 깨끗한 마음으로 사랑과 봉사를 하는 평신도 보다 훨씬 더 못한 것입니다. 가롯유다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무엇이든지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도 나쁘게 보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어드린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을 주면 더 좋겠다고 하는 것은 즉 가난한 사람과 예수님을 똑 같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하는 일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하는 것 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 잘 믿어서 가난이 해결되면 예수 잘 믿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가난한 자 보다 못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누구신줄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이런 잔치자리에 왔습니까? 다른 것 아닙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려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사람입니다. 배고픈 사람을 먹게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분을 가난한 사람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오늘 우리는 어떤 지위나 직분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으로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가롯유다는 신앙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신앙이 없기에 신앙없는 말을 하고 영적이고 믿음의 말을 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가롯유다는 예수님을 따르고는 있지만 믿지는 않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예수님, 병든자를 고치시는 예수님, 문제를 해결하는 예수님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론 구제하고 경건하고 사회 참여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생명과 바꿀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귀한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가롯유다는 예수님을 파는 길에 이릅니다. 마귀의 작전에 말려든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살았고 충성해야 될 그런 사람이 오히려 주님을 배반하는 신앙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를 잘못 믿으면 오히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보다 못합니다. 교회생활을 잘 못하면 교회밖에 있는 사람보다 더 못합니다. 신학도 잘못하면 평신도 보다 훨씬 믿음이 작아질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다 부족합니다. 실족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언제가 기도하고 사모해야만 합니다. 부모가 나쁘다고 자식도 나빠지지 않습니다. 어떤 자식은 부모가 맘에 들지 않으면 '난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면서 이를 깨물로 결심하며 삽니다. 또 어떤 자식은 별 생각없이 살다가 부모과 같은 길을 가는 자녀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남편 때문에 시험에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남편이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열심히 노력하며 자식들을 잘 키우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는 실족하기 쉽니다.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모든 것을 좋게 보는 것을 선택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다 넘어질수 밖에 없기 때문에 주님의 긍휼하심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든든히 서 가고 이런 사람이 마지막 때에도 승리 할수 있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건축하십시오. 성령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을 지켜가십시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십시오. 마지막 때에 승리하는 성도로 하나님앞에 창찬받고 높임 받는 여러분 될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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