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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림자와 실체 (히 1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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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론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그림자와 실체, 다른 표현을 쓴다면 율법과 복음, 율법과 그리스도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성경 주석가중의 한 분인 존 맥아더의 히브리서 강해를 보면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얘기가 하나 씌어져 있습니다. 영국의 한 마을에 교회가 하나 세워 졌는데 정문 아치에 그들이 다음과 같은 문구를 새겨 넣었습니다. We preach christ crucified(우리는 예수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설교한다)라는 문구입니다. 그 교회 성도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에 대한 설교를 듣고 싶었고, 그 교회 목사님 역시 그것을 설교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서 시대가 바뀌어 짐에 따라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하는 말은 골동품처럼 사람들이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그 설교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그것은 별로 매력적인 얘기가 되지 못한다든지, 시대에 뒤떨어지는 얘기로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생각하기를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이 ‘예수의 피로 구원받는다’라는 말을 쓰는 것 대신에 피라는 말이 좀 촌스러우니까 ‘예수님의 삶이 우리를 구원한다’로 잠깐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정문 옆에 담쟁이 넝쿨이 하나 있는데 잘 자랐습니다. 담쟁이 넝쿨이 자라다가 자라서 crucified라는 말을 가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랬더니 ‘우리는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로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편안한 마음으로 사회 참여 문제나 정치 문제, 철학이나 도덕 등 여러 가지 세상적인 이슈들을 가지고 설교하기 시작했고 또 그 문제들에 대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핵심적인 메시지를 타협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잘 자라가지고 그 옆에 있는 단어를 가리기 시작했습니다. Christ라는 말을 가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볼 수 있는 단어는 We preach(우리는 설교한다) 뿐이었습니다. 무엇을 설교하는지 아무튼 설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복음을 잃어버리는 교회가 되어 버렸다는 아주 우스꽝스런 얘기를 제가 읽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복음의 핵심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시작을 하고 또 그런 얘기를 하면 또 굉장히 촌스럽거나 현대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말씀을 찾아보면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을 듣게 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 예수의 십자가처럼 중요하고 우리의 신앙에서 이것처럼 영원하고 본질적인 메시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중요한 메시지는 세상에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하여 퇴색해 가고 본질을 잃어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만해도 여러 가지 하고 싶은 얘기가 왜 없겠습니까? 다루고 싶은 주제가 왜 없겠습니까 세상에는 정말 할 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세상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내가 원하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궁극적인 관심과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느냐에 대한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선포해야 하고 이것을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Ⅱ. 본론
본문에서 참된 제사의 의미와 본질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된 구원과 영원한 제사를 가르쳐 주기 위해 1절에서 구약 제사의 실패에 대해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10장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리고 구약의 율법과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 성경은 두 가지 단어를 사용함으로 대칭적으로 구분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림자라고 하는 말입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는 내용이 없는 형상, 단순한 윤곽 그리고 영상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세밀한 부분까지 완전하게 재현된 말을 참된 형상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진이나 초상화를 뜻하는 말은 아닙니다. 이것은 그림자에 대한 실제 사람이 거기에 있는 모습 전체를 표현하는 그런 단어입니다. 여기서 구약에 있는 제사, 율법은 하나의 그림자에 속하게 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 복음은 거기에 나타난 참 형상, 실체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1. 그림자로서의 율법
오늘 전체의 내용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율법으로서의 그림자와 복음으로서의 참된 형상에 관한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첫 번째 구약의 율법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절을 다시 한번 주의 깊이 관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이 장차 올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형상이 아니라는 말을 하면서 이러한 결과 때문에 세 가지 현상이 나타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 구약의 제사는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없다는 말은 무슨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사람이 나아갈 수 없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사람은 죄인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구약의 율법으로는 부분적인 그리고 제한적인 제사를 드림으로 온전한 속죄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온전하게 나아갈 수 있는 길을 구약의 율법이 제시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소원과 이상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하나의 형식과 종교적인 의식 때문에 자신들이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구약의 제사로는 구약의 율법으로는 사람을 온전케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러한 제사의 방법으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나아가는 길을 갈 수가 없다는 것이 오늘 여기의 말씀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제사는 반복되는 제사이기 때문에 이 구약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영원한 완전한 구원을 그들은 사모하게 됩니다. 또한 그들이 구약의 제사를 드릴 때마다 깨닫는 사실은 죄가 얼마나 무섭고 죄의 삯이 사망이라는 이 엄청난 현실을 제사 드릴 때마다 실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영원한 속죄양이 필요하다사실들을 이 구약의 제사를 드리면서 그들은 체험하게 됩니다.

성경전체에 보면 사람의 가장 큰 행복은 시편 1편에 나타나듯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은 사람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자”라고 합니다. 또한 시편 32편에서는 “그 죄가 가리움을 받고 허물이 씻음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문제에 가장 심각한 문제는 다른 문제가 아닙니다. 먹는 문제, 마시는 문제, 사는 문제, 사업하는 문제, 결혼하는 문제, 교육하는 문제보다도 더 본질적인 중요한 문제는 죄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죄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이 문제는 다 덮어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필요 없는 적당한 얘기를 가지고 흥분하고 얘기하고 합니다만 사람의 내면 속에서 가장 치명적이고 결정적인 문제는 바로 죄의 문제입니다. 내가 행위로 짓던 무의식으로 짓던 내가 알고 짓던 모르고 짓던 이 죄라고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창살 없는 감옥이 인간을 가두어 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 문제에서부터 자유와 평화를 얻기까지는 인간에게는 진정한 평화와 자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제사로서는 도저히 이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구약의 제사는 해마 다 죄의 무서움과 이 죄의 현실이 그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마치 이것은 이런 것과 같습니다. 병을 발견은 했는데 치료의 길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병을 발견하고 치료의 길이 없으면 더 절망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황소와 염소의 피로써는 인간의 죄를 해결할 길이 없다고 합니다. 구약의 제사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형식적이며 상징적인 제사였습니다. 황소와 염소의 피가 우리 죄를 없이하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하나의 모형을 보여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 이처럼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에게 완전한 구원을 제시했음에도 불과하고 아직도 교회 안에는 아직도 구약의 제사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성도들이 너무나 많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아직도 교회 나와서 종교적인 의식에는 아주 숙달되어 있습니다. 헌금을 하고, 십일조를 하고 교회 봉사를 하고 성가대를 하고 유년 주일학교를 하고 여러 가지 교회 행사에는 잘 익숙되어 있지만 그 영혼에 아직도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이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자기 죄가 씻어지는 경험과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원이 자기를 자유하게 했다고 하는 이 자유감이 분명하지 않다고 하는 분들이 너무나 많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참된 제사를 드리실 때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고, 즉 형식적인 제사를 원하지 아니했다고 하는 말이 여기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6절에도 똑같은 말이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와 내적인 자유와 영적인 변화 없이 형식적인 종교 생활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은 분노하시고 진노하십니다. 구약의 율법이 구약의 제사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그림자 형태였다고 한다면, 이것은 실체가 있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실체 없는 그림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그림자를 통해서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멀리서 내다 봤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그림자라고 하는 것은 실체를 추적하는 결정적인 열쇠입니다. 그러므로 이 율법을 통해서 복음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2. 실체로서의 복음
그러면 복음이란 무엇인가? 예수란 또한 우리가 믿는 구원이란 무엇인가? 진짜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본문에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인카네이션, 즉 성육신입니다.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인간이 되신 것을 의미합니다. 실체는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구체적으로 사람의 몸으로 오신 것입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영화 보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만나는 것을 얘기합니다. 예수에 대한 설교를 듣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만나는 게 중요합니다.
두 번째로 이 복음은 참된 실체 즉 그리스도는 제사와 예물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신 것이 아니라 그분은 겸손과 순종을 통해서 인간에게 오신 바로 복음입니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인데 이것은 스스로 낮아진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참된 제사는 순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될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 여기 시편 40편 6절에서 8절의 말씀을 인용했는데 이 히브리서 기자가 시편 40편 6절의 얘기를 다르게 인용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기에는 5절에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였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시편 40편 6절에는 그렇게 표현되지를 않고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하는 말로 바꾸어서 설명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성경 인용을 히브리서 기자가 잘못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 의미를 신약의 의미에서 바꾸어 설명을 한 것입니다. 이것을 직역을 하면 이런 말이 됩니다. “주께서 당신이 나의 귀를 뚫으셨다” 라는 뜻이 됩니다.

귀를 뚫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21장에 보면 종이 자유함을 얻게 되었는데 주인이 너무 좋아서 나는(종이) 자유인이 되지 않고 당신의 영원한 종이 되겠습니다라고 서약을 할 때 송곳으로 귀를 뚫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표로 삼은 것이 귀 뚫는 겁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당신에게 영원한 종이 되겠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영원히 순종을 하겠습니다 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참된 제사란 동물의 제사로써가 아니라 귀를 뚫음으로 다시 말하면 순종과 헌신을 함으로 이루신다고 하는 말이 이 본문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우린 두 가지 단어를 다 합쳐야 될 것 같습니다. 귀를 뚫었다고 하는 말과 한 몸을 예비하였다고 하는 말은 영원한 실체인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실체인 그리스도 또 우리의 완전한 구원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이것을 좀 더 확증해 주는 말이 7절에 있습니다. 7절에 보면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성령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철저하게 살았던 것은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신앙은 자기 뜻의 관철이 아닙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잘못 가리키고 있습니다. 믿음은 내가 기도해서 무엇을 성취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것을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창조적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서 내가 열심히 애써서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얻는 것을 믿음의 성취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자기 포기입니다. 자기 성취가 아닙니다. 내 뜻을 이루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자기 꿈을 이루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내가 순종하고 그것을 이루기 보다는 자기의 어떤 계획과 비전과 뜻을 세워놓고 하나님보고 사인해 달라는 얘기입니다. 죽어도 좋고 병들어도 좋고 병들어서 당신께 영광 돌릴 수 있으면 하나님 나는 그것을 택하기를 원합니다. 내가 세상에서 버림을 받고 내가 세상에서 창피를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 그런 것을 통해서도 내가 하나님 영광을 돌릴 수만 있다면 나를 부요하게 마옵시고 가난하게 하여도 감사하겠습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자기 뜻을 성취하는 것,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서 자기 뜻을 자기의 생각을 펼쳐 나가는 것을 믿음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은 성경과 거리가 아주 멀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예수님도 무엇입니까?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내가 온 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왔다는 것, 그것이 성육신입니다. 내가 당신의 뜻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내가 수모를 당하겠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겠습니다. 고난을 당하겠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 주시옵소서. 이것이 믿음입니다.

Ⅲ. 결론
신앙생활이란 참된 순종 생활을 배우는 것입니다. 요즘 현대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의 이상적인 상은 반항하는 스타일입니다. 틀린 것에 대해서 보전하고 파괴하고 반항합니다. 혁명적인 인간을 만들어 놓습니다. 분신자살하고 이렇게 해서 이러한 반항과 파괴와 폭력과 이런 모든 방법을 통해서 어떤 뜻을 성취하려고 하는 것이 현대인의 요즘 경향입니다. 이것은 비성경적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지 않을 수 있었고 혁명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왜 예수가 십자가에 죽었습니까? 얼마든지 주장할 수 있고 소리 지를 수 있고 그리고 도전할 수 있지만 이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왜냐하면 순종을 통해서 이기는 것만이 성경적입니다. 사랑을 통해서만 미움을 이겨야지 분노와 폭발을 통해서 이기는 것은 어떤 것도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교회에 순종하는 태도를 배워야 합니다. 남편에게 순종하는 태도를 배워야 합니다. 순종은 굴욕이 아닙니다. 순종을 통해서 이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통해서 이기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교회는 이 정신을 다시 배워야 합니다. 악을 어떻게 이기는가? 악으로 악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순종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사랑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적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내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왔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제사를 완전하게 대치시켜 주신 분입니다. 이사야 40장 6절, 8절을 다시 해석하신 말씀이 히브리서 10장 8절, 9절, 10절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경에 이렇게 말합니다.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첫 것을 폐하시고 둘째 것을 완성하신 분이셨습니다. 이 말은 예수께서 내가 율법을 완성했다고 하는 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첫 것을 폐했다고 하는 말은 첫 것을 버렸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첫 것을 완성했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율법은 결코 잘못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잘못됐을 뿐입니다. 잘못된 인간이 율법 앞에 섰을 때 그 잘못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것뿐입니다. 결론은 무엇입니까? 10절 마지막 부분에 있습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거룩입니다. 순종을 통한 거룩, 겸손을 통한 거룩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죄 씻음을 통한 온전하신 거룩이 내 인격의 내면 속까지 깊이 들어와서 그것이 인격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성도요, 복음을 깨달은 성도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더러워졌던 우리의 영과 육이 다시 정결함을 받아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다시금 영원하신 대 제사장이요, 우리의 사도시오, 우리의 영원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분을 바라보십시오./하용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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