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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의 지혜 (히 10: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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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와 나귀와 여우가 함께 사냥을 했습니다. 사냥해서 얻은 것들을 늘어놓고 사자는 나귀에게 분배를 맡겼어요. “네가 좀 공평하게 분배해보거라”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나귀는 사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똑같이 세 등분했습니다. 덜하지도 않고 더하지도 않고 똑같이 나눴습니다. 그러자 그것을 보고 사자가 화를 버럭 내면서 “사냥할 때 내가 제일 많이 애썼는데 이게 뭐냐?” 고 하면서 나귀를 잡아먹어 버렸습니다. 이제 사자하고 여우만 남았습니다. 사자가 여우에게 임무를 주었습니다. “여우야 이번엔 네가 좀 한번 공평하게 분배해보아라”. 여우는 어떻게 분배를 하였을까요? 역시 여우는 지혜로 왔어요. 사냥해서 얻은 것 중에 90%는 사자에게 다 돌렸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그 중에 10%만 차지했습니다. 이것을 본 사자는 아주 만족스러워 하면서 “너는 어디서 이렇게 지혜로운 생각이 떠올랐니?”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여우가 대답했습니다. “네, 나귀가 죽는 것을 보고 생각해냈지요”.

여러분, 우리가 보기에는 불공평한 분배처럼 보이지만 여우는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건지기 위해서 가장 값진 지혜를 발휘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인생을 살아갈 때에 이런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금 누가 보아도 어려운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은 이 시대를 가리켜서 “이제 말세가 되었다” “종말의 때” 라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에 보니까,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하였습니다. 마지막이 곧 임박해오고 있습니다.

로마서13장에 보니까,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고 그랬습니다. 구원의 완성이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깨어야 할 시기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 보면 이 종말의 증거를 열거해주고 있습니다.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뽐내며 교만하며 악담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조급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 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며” 라고 그랬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외모는 그럴 듯하게 크리스천처럼 보이는데 전혀 능력있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을 꼬집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말세의 징조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밖에 몰라요. 너무너무 돈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감사할 줄 몰라요. 부모에게 거역합니다. 다 사나워요. 뭐 조금만 건드리면 금방 그냥 벌컥 화를 내요. 조급합니다. 쾌락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이 시대에 영적 종말을 가리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의 육신적인 삶도 더욱 힘들고 어려운 세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의 경제 침체와 정치적 혼란은 우리 모두에게 불안함을 주고 있습니다. 한 방송사의 여론 조사에 의하면 다수 국민이 경제 위기감을 느끼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그 단계를 뛰어넘어서 실망과 분노감을 가지고 살아간다고도 이야기합니다. 살림살이에 관련해서 62%가 어렵다고 응답을 했습니다. 경제위기와 관련해서 64%는 IMF보다도 더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고 그렇게 응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오늘의 이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성경은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를 구분해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어리석은 인생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인생이란 목적없이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내 인생에 목적이 없어요. 내가 왜 오늘 존재해야 하는지 내가 왜 살아야 되는지 그 이유와 목적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루살이의 인생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눈앞의 이익에만 몰두해서 내일을 보지 못하고 목적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어느 날 만나서 재밌게 놀았습니다. 하루종일 놀다가 저녁때가 되어서 헤어지게 됐어요.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인사합니다. “하루살이야. 내일 또 만나서 놀자” 고 인사했습니다. 그런데 하루살이는 메뚜기가 뭐라고 그러는지 몰라서 고개를 갸우뚱갸우뚱 하면서 “내일? 내일? 내일이 뭐야? 난 오늘밖에 몰라” 하고 대답했습니다. 하루살이에겐 내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적이 없죠. 많은 사람들이 하루살이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인생의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역사학자 토인비는 사람을 세 종류로 분류해서 설명합니다. 마치 우리 인생은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배가 어디로 가는지 전혀 관심이 없어요. 오로지 배 안에 먹고 마시는 것만 있으면 됩니다. 먹을게 많으면 행복합니다. 먹을게 없으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의식주에 그들의 인생을 걸고 있습니다. 여러분. 배부르면 행복하십니까? 배고프면 불행하다고 느끼십니까?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배가 어디로 가는지 도통 관심이 없고 주변의 경치를 구경하는 일에 관심이 많아요. 날씨가 화창하고 경치가 좋으면 아주 즐거워하다가 궂은 날씨가 되고 그리고 볼게 없으면, 경치가 볼게 없으면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사람은 배가 가는 목적지를 분명히 하고, 분명히 알고 그 방향을 늘 점검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내가 지금 이 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아요. 그리고 그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그가 해야할 일을 알고 자신의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세 번째 부류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들은 성도들의 영원한 목적지, 천국을 향해 가는 사람들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에게는 천국에 대한 분명한 목표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목표를 향해서 오늘도 힘차게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목적이 없는 사람들, 하루살이의 인생. 또한 어리석은 인생은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는 사람들입니다. 금보다 귀한 시간들을 무가치한 일에, 쓸모 없는 일에, 그리고 남을 그저 비난하는 일에 시간을 다 소모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통계에 의하면 우리가 일생동안 시간을 어떻게 쪼개어 쓰는지를 조사를 했답니다. 그랬더니 잠자는 데만 26년이 걸리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잠을 많이 자는 사람들은 평생을 잠으로 보내는 거예요. 그리고 일하는데 21년을 보내더라는 거예요. 또 밥먹는데 꼬박 6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아마 프랑스 사람들 같으면 더 걸렸을 거예요. 약속 시간 기다리는 데에만 5년이 걸린다는 거예요. 약속해서 늦으면 남의 시간 다 빼먹는 것이지요. 화장실에서 볼일 보는데도 무려 5년이 걸린다는 거예요. 세수하는 데만 22일, 22일 동안 세수만 하는 거예요. 남자들은 넥타이를 매는 데도 18일이 걸려요. 담뱃불 붙이는 데만 12일이 걸리고 말입니다. 그리고 행복했던 순간은 그저 46시간밖에 되지 않더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주어진 하루의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고 어떻게 가치 있게 보내고 있습니까? 에베소서 5장 15절 이하에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귀중한 시간들을 정말 가치 있게 보람 있게 하나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잘 사용하고 있느냐 하고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시간을 마음대로 소모해버리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어리석은 사람은 결산의 때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내가 어디로 가는지,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에요.

오늘 성경25절에 보니까,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그 날(The day)” 은 무슨 날일까요? 그 날은 바로 종말의 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고 심판의 날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날이고 축복의 날이에요. 종말의 때가 가까워질수록 더욱 모이기에 힘을 쓰자 그런 얘기입니다. 그 날을 알아야 합니다. 그 날의 징조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결산의 때를 아는 지혜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들의 대부분은 마지막 종말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가라지와 알곡의 비유를 보세요. 밭에 곡식을 심었더니 알곡만 나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도 있어요. 그런데 가라지가 영양분을 더 뺐어 먹구요, 키가 더 큽니다. 종이 와서 주인에게 묻습니다. “주인이여, 가라지가 있는데 어떡할까요?” 그러자 주인은 “그냥 두어라. 괜히 가라지 뽑다가 알곡까지 뽑아버린다” 하고 대답합니다. 세상에서 보면 오히려 더 가라지가 더 번성하고 형통하는 모습도 보이자나요. 그러나 때가 되면 주인이 낫을 들고 들어와서 가라지부터 베어버리는 거예요. 가라지는 불에 던져서 다 불사름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불사르게 될 것입니다.

또, 악한 농부의 비유도 종말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어떤 주인이 먼 나라를 가면서 포도원을 어떤 농부에게 맡겼어요. 그리고 소출 때가 되어 종들을 보냈더니, 이 포도원 농부가 자기 것으로 착각을 하기 시작해서 이 종들을 다 때려서 빈손으로 그냥 돌려보냈어요. 마지막에 주인이 내 아들을 보내면 이들은 존대하리라. 내 상속자니까 하고 생각해서 아들을 보냈더니 오히려 이 아들만 죽이면 포도 원은 우리 거라고 아들을 죽여서 성문 밖에 던져버렸어요. 마지막엔 주인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그 악한 포도원 농부를 다 진멸하고 다른 사람에게 포도원을 주었다 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악한 농부를 징벌하는 날, 그것이 바로 종말의 때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달란트 비유도 동일한 것입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맡기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한 달란트 맡은 종은 그것을 땅속에 파묻어 두고, 악하고 게으른 삶을 계속 하다가 주인이 돌아왔을 때 한 달란트를 내밀었어요. 그래서 주인에게 책망을 받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이 사람을 밖에 내던져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하여라” 하고 밖으로 내쫓아 버렸어요. 주님이 내게 맡긴 직분과 은사에 열심히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주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는 더욱 그러합니다. 신랑이 오는데 신랑이 언제 올지 몰라요. 그러니까 신부의 친구들과 열 처녀가 깨어서 기다리는데 기다리다가 졸음이 와서 잠이 들었어요. 그 새벽녘에 신랑이 예고 없이 오자 이를 기다리던 신부가 일어나고 신부의 친구들이 같이 옮겨서 나가는데 다섯 처녀는 지혜롭게 등잔에 기름을 충분히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들은 불을 붙여서 들고 나가니까 신랑을 맞이하는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을 다 써버린지도 모르고 잠만 자다가 일어나 보니까 기름이 없어요. 그래서 부랴부랴 기름 좀 빌려달라고, 기름 좀 사자고 부탁을 해도 어디서 구할 때가 있어요? 등잔에 기름이 없는 고로 그들은 그 아름다운 잔치에 참여할 수 없었어요. 그들은 결국 다 박대를 당하고 맙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 예수님은 신랑처럼 신부된 우리들을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결한 모습으로 늘 깨어서 신랑 되신 주님을 기다려야 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날은 바로 구원을 받은 성도에게는 구원의 날이고 축복의 날이고 은혜의 날입니다. 신원이 회복되는 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고 준비되지 못한 영혼에게는 심판과 멸망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날을 준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성탄절이 되면 새벽송을 돌던 그런 아름다운 풍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 우리 교회들은 그 좋은 풍습을 다 버렸습니다. 문화가 아파트 문화이고 사는 지역이 다 떨어져 있으니까 그렇겠습니다마는 제가 섬기던 교회는 읍 지역의 교회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 백년의 역사 속에 계속 새벽송을 해오고 있어요. 새벽송을 돈다는 건 뭐예요?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훈련입니다. 그래서 새벽송을 도는 날,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면, 24일 저녁 11시에 수백 명의 교인들이 다 교회로 몰려들어요. 그러면 식당에서 준비한 떡국을 먹고 그리고 조를 짜서 등을 하나씩 들고 또 큰 포대자루 같은 거 하나씩 들고 그리고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명씩 조를 짜서 다 흩어지는 거예요. 버스를 타고 자가용을 타고 봉고차를 타고 수십 대가 다 새벽송을 도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교인들은 어떻습니까? 새벽송 도는 분들을 기다리는 거죠. 그냥 기다립니까? 오시면 추운데 따뜻한 차도 준비해놓고 빵도 사다놓고 과일도 사다놓고 선물꾸러미 사다놓습니다. 그래서 새벽송을 끝나고 그 다음날 성탄절 날이면 아주 먹을게 풍성해집니다.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날이에요. 왜? 집집마다 수백 가정을 돌고 오면은 말이에요. 백구 역이 넘는 수백 가정을 돌고 오면 먹을 것이 산처럼 쌓여요. 산처럼 말입니다. 주일학교 아이들은 실컷 먹는 날이에요. 그리고 기관마다 그것을 가지고 고아원으로 양로원으로 전 지역으로 가서 다 나누어줍니다. 그래서 성탄의 의미가 있는 거예요. 어떤 교인들은 11시, 12시쯤 기다리다가 새벽송을 도는 사람들이 오면 “아이구, 어서 오세요. 일찍 오셨네요” 하면서 반갑게 맞이하고 서로 찬양을 부르고 축복을 나누고 그리고 선물을 드리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나 어떤 분들은 새벽 4시 반에 되도 새벽송을 도는 사람들이 안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잘 수가 없죠. 옷을 다 입고 눈만 감고 잠깐 누워 있다가 밖에서 찬양 소리가 나면 얼른 뛰어나가서 준비했던 선물과 축복의 인사를 나누고 찬송을 함께 부르고, 그렇게 맞이하는 거예요. 어떤 분들은 졸고 있다가 갑자기 밖에서 찬양을 부르니까 자기 교회인줄 알고 그냥 선물을 줘버린 것입니다. 알고 보니 옆에 교회 성가대에게 줘버린 거예요. 그런 일도 있었습니다. 별 일이 다 있어요. 그래도 그런 훈련을 통해서 피곤하긴 하지만 그 마음에 솟아오르는 기쁨과 감격이 있다는 거예요. 교회의 모든 성도의 가정을 다 도는 거예요. 그 지역의 파출소, 우체국부터 다른 기관까지 말입니다. 주님 오실 준비하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진정한 성탄의 의미예요. 대림절의 의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특별히 어려운 이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의 지혜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본문말씀 22절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여러분은 주님 앞에 나오실 때 담대하게 나오십니까?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앞에 감히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왜? 우리는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성전으로 가서 예배를 드리는데 그 성전은 몇 가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성전의 맨 앞에 있는 뜰이 이방인의 뜰이에요. 이방인은 거기까지 밖에 못 들어갑니다. 그 다음 단계에 들어가면 유대인의 뜰입니다. 유대인들은 거기까지 밖에 못 들어갑니다. 그 다음 뜰이 레위인의 뜰이에요.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성소와 지성소가 있습니다. 성소에는 제사장들이 들어가 당번이 된 사람들이 들어가 가지고 진설병, 떡을 갈아놓기도 하고 기름을 보충하기도 하고 제물을 드리기도 하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가장 깊이 있는 지성소에는 절대 아무나 못 들어갑니다. 거기는 제사장 중에도 대 제사장만이 들어갑니다. 일년에 그것도 단 한번, 속죄일에 들어가서 전 백성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나아가서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거예요. 그게 지성소예요. 인간은 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없었어요. 대사장들을 통해서 대신 중보자를 통해서 나아갈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은 정말 지성소에 가려면 자기를 정결케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회개하고 철저하게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자기 옆구리에 방울을 답니다. 강아지 목에 거는 방울을 답니다. ‘딸랑! 딸랑! 딸랑!’ 하는 소리가 나는 방울 말입니다. 그래서 지성소에 들어가면 방울 소리가 “딸랑! 딸랑!” 하고 납니다. 그러면 밖에서 그 소리를 듣고 “아, 대제사장님이 아직 살아 계시는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뭔가 그가 불결한 일을 행한다거나 흠이 있을 때는 하나님이 그를 쳐서 즉시 죽습니다. 그러니까 방울 소리가 없어져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아이고, 제사장님이 돌아가셨구나!” 하고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갈고리를 집어 넣어서죽은 대제사장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대제사장 외에는 지성소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리고 다른 제사장이 대신 들어가서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해요. 아무나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예수의 피를 힘입어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본문말씀 19-20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담대함, 권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놀라운 축복입니다. 우리가 공관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던 날 예루살렘 성전에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커튼)이 있는데 예수님이 운명하시던 날 커튼이 두 갈래로 찢어져 버렸어요. 그래서 이제는 누구든지 성소와 지성소에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육체가 찢어지는 순간 성소와 지성소의 담이 허물어지고 우리는 중보자를 거치지 않고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 주실지를 알고 우리는 그분을 향해서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우리들은 주님 앞에 나올 때 어떤 마음을 가지고 나옵니까? 혹, 부끄러운 마음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실까? 하나님이 나 같은 것을 기억이나 하실까? 하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저는 어릴 때 그런 생각이 납니다. 아버님이 공무원이라서 이렇게 객지에 멀리 외지에 나가 계시다가 오실 때 있어요. 그런데 어릴 때 기억에 어느 날, 아버님이 오래 계시다가 오시는데 왜 그렇게 아버지를 보는 것이 부끄러운지 몰라요. 남들 다 나가고 그러는데 저는 아버지 얼굴을 부끄러워서 못 봐 가지고 저 뒤에 가서 숨었어요. 왜 거기 숨어있느냐고 나와서 아버지께 인사해야지 하시는데. 그렇게 낯설게 느껴지는 거예요. 남의 아버지 보는 거 같았습니다. 남의 아버지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마음에 담대함이 없어서 그래요. 여러분,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망설이는 마음으로 나옵니까? 우물거리는 마음으로 나옵니까? 그게 담대함이 없는 거예요. 우리는 담대함을 앞에 가지고 나와서 주님 앞에 예배하고 찬양하고 그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담대함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내 모든 죄를 씻으셨다는 믿음입니다. 예수의 피로 내 마음과 육신이 깨끗하게 씻음 받음을 믿고 나아가라는 거예요. 예수님의 피가 내 모든 과거를 청산했음을 믿고 나아가는 거예요. 그 담대한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지혜가 필요해요.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영신교회 가족들에게 이러한 참 마음과 담대한 믿음이 넘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에게는 소망을 굳게 잡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본문말씀 23절입니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본문의 “약속하신 이” 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약속하신 분은 미쁘시다고 했습니다. 미쁘시다는 말은 신실하시다라는 뜻이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고 변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분의 약속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미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약속의 소망을 믿고 굳게 잡고 나아가자.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라고 그랬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우리에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천국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부활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구원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내 자녀들, 너희들은 무슨 일을 하여도 다 잘 된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우린 그 약속을 믿고 소망을 붙들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 믿는 자들은 슬퍼하면 안됩니다. 절망하면 안됩니다. 왜? 우리에게는 약속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 이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할 자가 없게 하려 함이라” 고 그렇습니다. 우리 슬퍼하면 안 됩니다. 절망하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약속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소망을 굳게 붙드시고 흔들리지 말고 앞을 향해 나아가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종말이 때를 사랑하는 성도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해야 합니다.
본문말씀 24절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돌아본다는 것은 서로 살펴준다는 것입니다. 서로서로 돌아보고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종말의 때를 사랑하는 성도들은 서로서로 돌볼 줄 알아야 됩니다. 옆의 분들하고 한번 인사해 봅시다. “서로서로 격려합시다”. 우리 는 서로서로 살펴줘야 합니다. 서로서로라는 것은 “함께” 서로를 돌봐주는 의미입니다. 서로서로라는 말은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데 오십 번 이상 나옵니다. 우리는 혼자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늘 서로를 돌봐줘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혼자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고 혼자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에요. 여러분, 인간은 함께 살아가는 존재예요. 인간은 다 잘살고 잘먹고 행복하게 사는 것 같지만 그 이면을 보면 고독하고 외로운 사람이 너무 많아요. 여러분이 볼 때 “아유, 저 사람은 저렇게 옷도 잘 입고 다니고 좋은 집에 사는데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가서 물어보세요. 그 이면에는 고독한 순간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성가대한테 물어 보겠습니다. 혹시 욘사마가 누군지 아세요? 욘사마 좋아해요? 욘사마는 배용준을 의미합니다. 일본 아줌마들이 얼마나 배용준이를 좋아하는지 말입니다. 그런데 배용준의 겨울연가 때문에 경제에 미친 효과가 2조 3천억 원이에요. 2조 3천억 원. 엄청난 경제효과를 미친 것이죠. 그리고 일본이 한국에 대한 의식이 달라졌다는 거예요. 그리고 춘천에 가면 그 겨울연가를 촬영했던 춘천에 와서 아줌마들이 청소하고 다닙니다. 그래서라도 배용준이 발뒤꿈치라도 좀 보려고 말입니다. 그리고 청평에 가다보면 그 남이섬에 그냥 수십명, 수백 명의 일본 사람들이 매일 모여든다는 거예요. 그 겨울연가의 눈덮힌 설경을 촬영한 곳으로 가서 한번 서 보려고 말이에요.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몰라요. 일본 공항에 한번 내리면요, 수천 명의 아줌마 부대들이 와서 그전부터 진을 치고 있다는 거예요. 욘사마 한번 보려고 말입니다. 나도 그렇게 하루 살아봤으면 좋겠어요. 세상에. 그 수많은 아줌마들이 그 배용준이 얼굴 한번 보려고 말이에요. 그리고 보니 우리 교회는 제 얼굴 보려고 좀 앞자리에 토요일부터 와 가지고 철야하는 사람도 없는 거 같아요. 목사님 얼굴을 앞에서 좀 봐야지 하고 자리 먼저 잡아놓고 예약하고 그런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요. 어떤 기자가 배용준이를 만나 가지고 인터뷰를 했대요. “당신은 얼마나 좋습니까? 행복하십니까? 동남아시아에선 최고가 아닙니까?” 그랬더니 배용준이가 이렇게 말하더라는 거예요. “워낙 많은 사랑을 받고 있지만 저는 솔직히 말씀드려서 외롭습니다” 하고 말입니다. 배용준이가 외롭대요. 왜 그런지 아세요? 많은 사람이 사랑해주지만 진정 사랑하는 한 사람은 없는 거예요. 그 외로움을 덜어줄 친구가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어디갈 때도 변장하고 다니구요. 마음놓고 다니지도 못하는 거예요. 왜? 아줌마들이 달려들어 가지고 머리끄댕이고 뭐고 다 잡아 당기는 거예요. 넥타이 벗기고 옷 찢어가고, 배용준이 것이라면 뭐 신주 모시듯 하니까 말입니다. 그게 행복한 게 아니죠, 광적인 거죠. 절대 행복하지 않아. 우리에게는 이런 고독이 있어요. 우리 형제들을 통해서 채워져야 할 고독이 있어요. 이걸 채우는 게 뭐예요? 성도들의 사랑이에요. 성경은 “서로 돌아보아”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서로 돌아볼 때 우리는 고독을 잊어버릴 수 있고, 늘 즐거움과 감사가운데 살아갈 수 있어요. 고독을 이기는 가장 큰 비결이 뭐예요? 친구가 되어주는 거예요. 그리고 서로를 격려해주는 거예요. 격려만큼 위대한 약이 없어요. 사람은 격려를 받을 때 정말 감격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에요.

어느 심리학자가 그런 연구를 했습니다. 어떤 얼음을 넣은 아주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게 했다는 거예요. 어떤 방에는 한사람만 발을 담그고 시간을 재고 어떤 방에는 다섯, 여섯 명을 함께 집어넣어 놓고 시간을 쟀다는 거예요. 근데 한사람이 발을 담근 데는 얼마 있다가 뛰어나와요. 견디지 못하고 말입니다. 다섯, 여섯 명이 있는 곳은 서로 붙들고 격려하면서 그 얼음물에서 견뎌내는데 꼭 두 배 이상을 견뎌내더라는 얘기에요. 사람이 아무리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서로 격려를 하면 이겨낼 수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가족이 한사람이 어려움을 당해도 다른 가족이 격려해주고 싸매 주고 붙들어 줄 때 힘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이라는 곳은 바로 치료받는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바로 치료받는 공동체, 구역이 바로 치료받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격려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격려 받지 못하면 어디 가서 격려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늘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저는 격려의 위대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제 생애에. 제가 지난번 있던 교회에 있을 때 볼링부가 있었는데 일년에 한두 번씩 볼링대회를 합니다. 그 대회에는 교인들 가운데 볼링을 좋아하는 분들, 남녀노소 그리고 교인 모든 분들이 구경오고 많은 교인들이 참가합니다. 그래서 볼링장의 한 레일을 빌려 대회를 하는데 저도 거기 등록을 했어요. 저도 나갔어요. 그랬더니 교인들이 담임 목사가 하니까 얼마나 좋아하던 지요. 욘사마는 아니지만은 그래도 하여튼 너무 좋아요. 박수를 치고 격려를 합니다. 참, 제가 볼링공을 들고 “할렐루야!” 하면 교인들이 “아멘!” 하고 대답하는 거예요. 아, 그리고 볼링을 쳤는데요. 볼링이 그렇게 잘 맞는 거예요. 저는 볼링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어요. 그냥 막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볼링을 치면 110, 120점씩 점수가 막 두서 없이 나오죠. 그런데, 그 날은 제 생애에 그런 일이 있을 줄 몰랐어요. 200점이 나왔어요. 200점! 이건 선수들이나 칠 수 있는 등급이에요. 그래서 저는 ‘아, 격려라는 것이 이렇게 놀랍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칠래야 눈을 뒤집고 쳐도 못 칩니다. 격려를 그렇게 안 해주니까 말입니다. 저는 그 때 ‘아, 사람은 격려를 받을 때 자기 능력의 두 배 이상을 발휘할 수 있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 사람은 계속 비난을 받을 때 자기 능력의 50%가 감소가 되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애도 자꾸 못한다고 쥐어박으면 더 못합니다. 그래서 ‘그래 난 원래 공부를 못했지. 태어날 때부터 못했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 이래서 점점 기가 죽어버려요. 여러분 교인들도 격려하기 나름입니다. 목사님에게도 격려가 필요하고 장로님에게도 격려가 필요하고 교인들에게도 격려가 필요합니다. 우리 서로서로 격려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떤 한 아들이 등산을 갔다가 길을 잃어버렸어요. 아버지가 아들을 찾는데 험난한 기우, 궂은 날씨, 얼마나 위험한지 찾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어떡합니까? 아들이 얼어죽고 굶어죽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헬리콥터를 타고 저 높이 올라가서 삐라를 뿌리는데 아들에게 뭐라고 뿌리느냐. “아들아 우리는 너를 너무 사랑한단다”는 문구였습니다. 아들이 다 지쳐 죽어갈 지경에 그 삐라를 보는 순간 ‘아버지와 우리 어머니가 나를 이렇게 사랑한다는데 나는 살아나야지!’ 하고 살아날 방도를 구하는 거예요. 그래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그 험난한 길을 뚫고 나왔다는 거예요.

누군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가 있고 놀라운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영신교회가 이 어려운 시대를 살아갑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도 이 성전건축이라는 엄청난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이때 우리는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힘을 빼기보다는 격려하고 축복하고 사랑해서 이 어려운 짐을 감당해 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영신교회를 축복하시고 위대하게 지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열심히 모여야 합니다.
본문말씀 25절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개신교회의 특징은 열심히 모이는 것입니다. 어떤 군목 출신 목사님이 그래요. 군대에서 사병들을 점검하다 보면 종교란에 누구는 불교라고 쓰고 누구는 카톨릭, 누구는 개신교 이렇게 쓰는데, 불교라고 쓴 친구들은 절에 전혀 한번도 안 나가본 친구들이 대부분이에요. 자기 이름이 절에 있다. 그래서 불교인이다. 또 자기 부모가 절에 나가니까 자기도 그저 불교인이라고 쓰는 거예요. 카톨릭도 비슷해요. 그런데 개신교라고 쓴 사병들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그들은 뭔가 달라도 다르다는 겁니다. 열심히 믿고 헌신적이고 신실하고, 그래서 왜 그런가 하고 가만히 보니까 개신교는 열심히 모인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모인다는 것이 개신교의 특징인 것입니다. 열심히 모이기 때문에 말씀을 가까이 하고 예배를 자주 드리고 그러면서 그들의 삶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개신교의 열심히 모이는 전통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는데 안타까움이 있어요. 초대교회때 3장, 2장에 보니까 그들이 열심히 모였어요. 모여서 떡을 떼고 찬양하고 구제하고 유무상통했습니다. 역사가 흐르면서 그들의 열심이 식어가게 됐습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열심히 모이자” 이렇게 히브리서 기자는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개신교가 점점 모이기를 게을리 할 때 한국 교회의 위기가 찾아올 것입니다. 우린 열심히 모이셔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전도 주간에 교인들에게 열심히 전도하라고 설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배를 마치고 난 후 인사를 하는데 어떤 교인이 나오면서 “목사님, 저도 간신히 나오는데 어떡해 남을 전도해요?” 라고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아, 그 말이 맞다” 고 생각이 되어졌습니다. 그 사람 말이 자기 자신이 간신히 주일날 나오는데 어떻게 남을 전도해 데리고 나오겠습니까? 그 사람은 주일날 아침에 고민이랍니다. ‘갈까? 말까? 하고 말입니다. ‘두 주째 빠지면 삼주 째는 가야 되는데’ 이렇게 고민하고 있더랍니다. 이렇게 나온 사람이 무슨 전도를 하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교인의 모습은 하고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대로 신앙 생활을 하고 건강한 삶을 살려면 적어도 일주일에 다섯 번에서 열 번은 교회에 나오셔야 해요. 일주일에 다섯 번에서 열 번 나오려면 새벽기도만 나와도 일곱 번입니다. 수요예배, 저녁예배, 주일예배, 구역예배 이렇게 합치면 열 번입니다. 적어도 여러분이 다섯 번은 나올 때 건강한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교인들이 일주일에 한번 나오면 아주 대단한 것처럼 뽐내고 다니시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 저는요 한 주도 안 빠졌어요” 하고 자랑이에요 자랑! 예전에 권사님들은 거의 권사님이 되면 새벽이고 저녁이고 철야고 아주 교회에 사는 것으로 인정을 했습니다. 요즘 권사님들은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나오기도 벅차다고 합니다. 그것도 주일날 교회 나오는 것을 빼먹고 어디 가서 딴데 혼인집에 가있고 놀러 가는데 따라 가구 말입니다. 그런 권사님들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너무 부끄러워요. 이것은 주님이 보실 때 바른 신앙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건강한 신앙생활을 해야되지 않겠습니까?

특별히 여러분, 구역에 더 열심히 모이셔야 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모여서 격려하고 사랑할 때, 우리가 구역에서 새 힘을 얻고 또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보면 재직들이 구역예배에 더 참석을 안 하는 것 같아요. 구역예배를 보면 요리 빼고 저리 빼고 다빠져 있습니다. 거기다가 또 어떤 구역자는 허위보고까지 합니다. 보고는 들어와 있는데 제가 개인적으로 만나서 “구역자님 솔직히 예배 몇 번이나 드리나요?” 하고 물어보면, “한 달에 한 번 드릴 때도 있구요. 좀 바쁠 땐 그냥 건너뛰기도 하고 그래요” 하고 대답합니다. 보고만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부끄러워요. 잘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이 심판하지 않으시겠어요? 하나님의 사명을 그런 식으로 우리가 이름만 걸어놓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로마서 12장 11절에 보니까,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를 열심히 섬기세요. 먼저 예배를 사모하셔야 돼요. 아무리 바쁘고 어려워도 예배만큼은 여러분 소홀히 하시면 안돼요. 왜?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새 힘을 얻고 능력을 얻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살고 주님과 가까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나오십시오. 뜨거운 사랑으로 서로를 돌보십시오. 그리고 약속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모이기에 힘쓰십시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의 사랑 가운데 늘 넘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영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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