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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절하는 믿음 (히 11: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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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을 잘 받은 영리한 개는 모르는 사람이 맛있는 고깃덩어리를 던져줘도 주인의 허락이 없이는 먹지 않고 고개를 돌립니다. 왜냐하면 도둑이나 보신탕감 도둑놈들은 고깃덩어리에 독약을 넣어 죽이고 훔쳐가기 때문입니다. 영리한 개도 먹고 싶다고 아무것이나 집어먹지 않고 먹기를 거부하는데 하물며 사람이, 더욱이 영으로 살아야 하는 크리스천들이 육신의 소욕대로 절제나 거부하는 것이 없이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사람은 그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본성대로 살면 반드시 망하게 되고 실패하게 됩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3) 했습니다.

사람의 변화되지 못한 욕구에 대해서 거절하지 못하면 이는 마치 병들어서 질병이 깊어가고 있는데 병을 키우는 음식을 계속 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타락한 인간의 품성에서 나오는 요구에 대해서 단호하고도 분명한 거절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설교를 들을 때에 두 가지 거부감이 있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하나는 변화 받지 못한 사람들의 거부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변화 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게 되고 심지어는 적개심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데 말씀이 그 것을 책망하고 있으면 마음에 그 말씀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게 됩니다. 초대 교회에 스데반이 설교할 때 변화 받지 못한 사람들은 스데반에게 거부감을 가지고 돌을 던졌고 성경에는 이러한 거부감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음 하나는 변화 받은 사람들이 가지는 거부감입니다. 변화 받은 사람들은 변화되지 못한 삶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변화 받은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나를 위해서 하는 호의나 배려까지도 거부감을 가지게 됩니다. 마치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사람은 질병을 일으키는 음식이나 해로운 습관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거부감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말씀을 빼앗아 가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항상 거부감을 가지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다니엘 세 친구 같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아닌 일들도 그들에게는 거부감을 분명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어떤 거부감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변화 받지 못한 거부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거부감 때문에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대적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들이 그와 상관이 없는 말씀이 되고 맙니다. 현대 사회가 가진 반감들을 분석해 본다면 이상하게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거부감이 너무도 강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성도는 이러한 거부감을 치유해야 주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성도는 변화 받은 거부감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이 세상에서 보여 주신 그러한 거부감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가졌던 그 거부감을 가져야 합니다. 요셉이 가졌던 그 거부감, 모세가 가졌던 그 거부감을 가져야 합니다. 변화 받은 사람들은 변화 받지 못했을 때 친숙했던 삶에 대한 거부감이 있습니다. 거부감에 대한 변화야말로 가장 구체적인 변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을 정의할 때에 무가치한 일에 대해서 거절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1. 물질의 유혹을 거절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모세는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더 큰 재물로 여겼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보화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질의 유혹을 거절하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이것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잃어버리고 살았구나 하는 깨달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물질의 유혹을 거절하게 되면 그에게 새로운 세계가 보여집니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요 하나님의 상주심입니다. 성도는 물질의 욕심을 거절하는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삭게오가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물질의 욕심에 끌려 다녔던 인생입니다. 모든 것을 돈이라는 기준으로 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물질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습니다. 욕심을 내려놓는 순간 그의 눈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보여졌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유혹을 거절하지 못하면 결코 그리스도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가룟 유다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물질에 대한 욕심 즉 애굽의 보화에 집착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상 주심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주님께 나아온 한 청년의 이야기를 보면 그 청년은 주님께 영생에 대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 때 주님은 이 청년이 물질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가 보여 질 수 없기에 그 욕심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고 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시날 왕과 그 동맹군에게 포로가 된 롯을 구하기 위해서 집에서 훈련한 318인을 데리고 가서 약탈당했던 모든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포로 되었던 사람들을 구출했습니다. 이 때에 소돔 왕과 살렘 왕이 승리하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맞이했습니다. 소돔 왕은 아브라함에게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재물을 가지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드릴 십일조 이외에는 아무 것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아브라함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을 거절했던 아브라함에게 진정한 보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보상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링컨은 '내가 이러한 오늘이 있는 것은 지금은 이미 세상을 떠나가신 천사 같은 어머니의 덕분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링컨의 마음속에 남았던 것은 어린 시절 통나무집에서 어머니가 가르쳐준 십계명 교훈이었습니다.
그 후 그에게 어떻게 뇌물을 거절할 수 있었는가 라는 물음에 그는 어머니가 가르쳐준 출애굽기 20장이 늘 귀에 쟁쟁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영국의 문학자 벤슨이 지적한대로 링컨은 금전에도 깨끗하여 가난한 자의 변호사였습니다.

2. 이성의 유혹을 거절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가정에 팔려서 그 곳에서 청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를 유혹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여 주인인 보디발의 아내였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을 유혹하기 위해서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요셉에게 접근해 왔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에게 날마다 유혹을 했습니다. 우리 속담에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요셉은 이성의 유혹을 거절하는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모든 시대에서 성도는 이성의 유혹을 거절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너무도 많은 유혹의 통로들이 있습니다. 성도는 이성의 유혹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보여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현대 사회의 많은 가정들이 이성의 유혹을 거절하지 못하므로 흔들리고 상처를 받고 관계가 파괴되고 있습니다. 이성 유혹이 갖는 가장 무서운 무기는 바로 은밀한데 있습니다. 요셉에게 아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는 것이 요셉의 신앙고백입니다. 쾌락의 유혹은 참으로 무서운 파괴력을 가졌습니다. 김유신과 천관녀의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성에 대한 유혹을 거절하므로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역사를 이룬 사람이 되었습니다.

3. 명예의 유혹을 거절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사기에 보면 나무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무들이 나무의 임금을 삼기 위해서 감람나무 포도나무 무화과나무를 찾아갑니다. 우리들의 임금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 때 나무들은 한결같이 그 제의를 거절하게 됩니다. 남들을 지배하려는 유혹을 극복한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남보다 우위에 서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명예욕을 거절할 수 있어야 하나님의 쓰심에 합당한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유혹에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명예욕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은 자신의 사명을 깨닫는데 있습니다.

영국의 간호원 나이팅게일은 러시아와 영국을 비롯한 연합군의 싸움인 크리미아 전쟁(1853-56)의 참상에 대한 타임즈 통신원 럿셀의 보도가 전해진 후 어린 날의 친구였던 육군대신 허버트의 위촉을 받아 34명의 간호원과 함께 전선으로 나갔습니다. 이곳 저곳의 병원을 천사처럼 돌아다녔고 그로 인해 그녀의 이름은 모든 병사들의 가슴에 새겨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도진들이 그녀에게 사진을 찍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할 때마다 거절한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일화입니다.

4. 세상적인 안일의 유혹을 거절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온누리 교회 하용조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에 영국에서 신학 공부를 마치고 갓 돌아온 한 형제의 방문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평소에 나는 그 형제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는 터라 동역자로 함께 일했으면 좋겠다는 요청을 그에게 했는데 여지없이 거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유인즉 자기는 꼭 강원도 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강원도로 떠나면서 나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해 주었습니다.

'저는 영국에 공부하러 가기 전에 서울에서 모 신학교를 다녔습니다. 한번은 강원도 산골짜기에 10-20호 정도의 가구가 모여 마을을 이루고 사는 곳에 가서 여러 마을을 전도했는데, 교회도 없고 목회자도 없었습니다. 그때 ‘이들에게는 누가 목회자가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나는 평생 이런 사람들을 위해 헌신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저는 원하는 공부를 마쳤기에 하나님께 한 약속을 지키려고 지금 강원도로 떠납니다. ”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잘 가라고 진심으로 격려하면서 그의 거절을 받아들였습니다. 약속하기는 쉬우나 실행하기는 어렵습니다. 부인과 자녀들을 데리고 강원도 산골짜기를 찾아가는 그의 용기와 믿음을 보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 거절할 때 거절하는 것은 얼마나 큰 용기이며 믿음입니까!

5. 죄악을 거절할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어느 운송 회사의 사장이 사원들에게 특별한 지시를 내렸습니다. 선박이 토요일 밤늦게 도착하기 때문에, 일요일에 모두 나와서 선박의 짐을 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한 청년이 사장 앞에 나와서 말했습니다. “사장님! 내일은 주일이기 때문에 저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 사장은 자신의 지시를 거역하는 사람과는 함께 일할 수 없다면서 회사를 그만두든지, 내일 나와서 일을 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했습니다. 그 청년은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제가 비록 늙으신 어머니를 봉양해야 할 처지지만, 주일에는 일을 할 수가 없군요!” 그 뒤에 청년은 3주 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일자리를 구했으나 얻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시중의 모 은행 총재가 운송 회사의 사장에게 쓸 만한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지점을 하나 더 열어야하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하던 사장은 자신이 해고했던 그 청년을 추천했습니다. 총재가 그를 추천하는 이유를 묻자, 사장은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물론 내가 그 청년을 해고했었네. 그가 일요일에는 절대로 일할 수 없다고 해서 그렇게 했던 것일세. 하지만 자신이 처한 형편에 따라 신념과 원칙을 바꾸지 않는 사람이라야 돈을 맡길 수 있지 않겠나?” 결국 그 청년은 이전의 직장보다 더 좋은 곳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올림픽 게임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금메달, 은메달을 딴 사람들은 예외 없이 자기와의 싸움에서이긴 사람들임을 느끼게 됩니다. 먹고 싶을 때 먹지 않고 마시고 싶을 때 마시지 않고 쉬고 싶을 때 쉬지 않고 육신안일을 거절하고 육신의 소욕을 거부하고 맹훈련을 쌓았기 때문에 메달을 딴 것입니다. 어떤 선수는 영 점 몇 초 차이로 금메달을 못 따고 은메달, 동메달을 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레슬링 선수들을 보면 예외 없이 전부 귀들이 비정상이 되고 불구자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훈련할 때 하도 짓뭉개고 짓찧고 비벼댔기 때문입니다. 그 분야에서 세계 제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기를 이기고 육신의 안일과 쾌락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금메달을 따고 일인자 되는 데도 먼저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쾌락과 안일을 거절한 만큼 큰상을 받는 것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귀하게 쓰임 받고 궁창의 별과 같이 영원히 빛나는 인물이 된 사람들은 더욱 자기를 절제하고 본능과 욕심을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모세가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본문, 히브리서 11장 24-26절에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라고 했습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편안히 살았으면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고 잘하면 애굽의 황제가 될 수도 있었지만 모세는 이 큰 기회를 거절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잠시 죄악의 날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긴 것은 장차 더 크고 영원한 상을 바라보기 때문이었습니다.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을 거절하고 잠시 있는 나그네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영원히 빛나는 인물이 되고 천국에서 영원한 상급과 면류관을 받은 것입니다. 모세가 부름을 받았을 때 자기는 말도 잘 못하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망설일 때 하나님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던지라고 해서 던졌더니 그것이 뱀이 되었습니다. 지팡이는 우리가 몸을 의지하는 것이고 허리 아프고 다리 아플 때 의지하고 도움을 받는 물건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은 세상의 사람이나 권력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면 그것이 뱀과 같이 마귀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고, 또 손으로 그 뱀의 꼬리를 잡으니 다시 지팡이가 되었다는 것은 마귀 같은 원수라도 바로 잡으면 지팡이같이 우리를 돕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사람이나 권력이나 물질을 하나님보다 의지했다가 그것이 마귀로 변하여 여러 해 동안 고통 당한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또 한편 거짓말로라도 거금을 헌금하겠다고 한 것 때문에 큰 예배당 지을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뱀 같은 마귀도 결국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일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4장에 귀중한 나드향 옥합을 몽땅 깨뜨려 예수님께 부어드렸는데 그것은 일 년 동안 일해서 번 돈에 해당한 금액이요, 더욱 귀한 것은 여자들이 결혼 밑천으로 저축해 둔 결혼저금통장이나 마찬가지인데 그 모든 욕심과 애착심을 거절하고 예수님께 부어드린 것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는 아깝게 허비한다고 마리아를 책망하는 가롯 유다를 도리어 책망하셨고 마리아에게는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막14:9)라고 엄청난 칭찬과 축복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기념하다'라는 말은 신약에 꼭 두 번 나오는데 또 하나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성만찬을 행하시고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19절에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마리아에게 하신 칭찬과 축복이 얼마나 무게가 있고 영구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거절하기 어려운 것을 거절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할 때 그 상이 얼마나 큰 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4-25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거절”의 극치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 신앙의 극치를 말씀하신 것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본문,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잠깐 살다가 안개와 같이 사라지는 세상에서 월계관을 쓰고 금메달을 따기 위해서도 절제하고 거절하는데, 하늘의 영원한 상을 얻는 데야 얼마나 육신의 욕망을 거절하고 절제해야 되겠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27절에서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라고 했습니다. 거부하고 절제하고 죽어야 큰상을 받는데 사람들은 거부나 절제는 하지 않고 큰상만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영적 깊이 있는 위대한 고백을 고린도후서 4장 10-12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부인과 거절의 극치는 죽는 것인데 죽어지는 만큼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역사합니다. 내가 죽는 만큼 남도 살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라고 했습니다. 주님도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거절한 만큼 큰상을 받습니다.

미국에서 일류대학을 나와 주지사가 되고 장관이 되고 대통령이 된 사람들은 대학에서 자신을 바쳐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을 배우고 섬기고 봉사하는 법을 배운다고 합니다. 영어로 공복(公僕)을 civil servant라고 하는데 이는 섬기고 봉사하는 직분자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처럼 높은 공무원이 되면 세도나 부리고 으스대는 사람과는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헌신적 자세가 지식이나 지능지수보다 목표달성과 자기성취에 더 큰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10여 년 전 하버드 대학에 내신성적이 뛰어나 아시아계 사람들이 많이 입학을 했는데 그 해에 아시아 학생 10명이 낙제를 했고 그 중의 9명이 한국 학생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머리는 좋고 지능지수는 높아서 일류대학에 입학은 했지만 초일류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일 뿐 그 이상의 장기적이고 궁극적인 목적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일류대학을 나와서 출세하고 돈 많이 벌어서 잘 먹고 잘 살아보자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류가 공통으로 추구하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희생하고 헌신할 줄 모르는 사람은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없고 시대적 주류 물결에 합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일류대학교에서 교육받고 주지사 되고 상하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된 사람들은 자기가 출세하는 것이 최종목표가 아니라 전 세계의 평화와 행복,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꿈이요 최종목표이기 때문에, 미국이 자기 나라만 평안하고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인터폴 즉 세계를 감시하고 지키는 일을 하고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나 북한의 김정일을 세계의 악의 축으로, 인류 공동의 적으로 알고 싸우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밑에 깔려 있는 미국은 다른 나라들과 그 이념과 사상이 다른 것입니다. 한국도 지난 54년 동안 미국이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남한도 공산화 돼서 몇 년 동안에 수백만 명이 굶어죽고, 교회를 다 파괴시킨 북한과 같이 되었을 것입니다. 자기의 욕망을 거절하고 희생과 헌신의 자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온 인류를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려는 태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요사이는 “섬기는 지도자”라는 말이 유행이고 또 그런 책도 많이 나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더 많은 영혼구원을 위해서 모세처럼, 바울처럼 자신의 욕망을 거절하고 날마다 죽는 자기부인의 자세가 먼저 있어야 교회도 부흥되고 진정한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창조주이며 메시아임에도 불구하고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즉 조물주가 피조물 인간을 섬기고 자기 목숨까지 우리 인류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사이 유행하는 말 가운데 웰빙(well being)이니, 하이리빙(high living)이니, 양질의 삶이니 하는 말은 한마디로 잘 먹고 잘 살자는 뜻입니다. 어찌 보면 좋은 말 같으나 여기에는 하나님의 영광이나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자는 이념이 결여되어 있고 육신의 안일이나 쾌락 위주의 삶이 인생의 목표가 되는 느낌을 줍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도 “놀기 위해”, “즐기기 위해” 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목사,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순교자들처럼 내세천국을 위해, 신앙을 고수하기 위해, 현재의 삶을 포기하고 생명도 버리는 포기와 거절의 신앙은 점점 찾아볼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진리는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요, 메시아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라고 한 말씀과,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9장 25-27절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라고 한 말씀과, 위대한 영도자 모세가 히브리서 11장 24-26절에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라고 한 말씀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세상 것, 육신의 것을 거절하고 포기하면 그만큼 큰상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됩니다.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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