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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만 바라보자 (히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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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 창설자인 요한 웨슬레에게 한 교우가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나는 지금의 이 고통과 문제, 여러 가지 쌓여있는 걱정에서 어떻게 헤어나야 할 지 정말 앞이 캄캄할 뿐입니다. ' 그러자 웨슬레 목사는 창가에서 저 멀리 소 한 마리가 고개를 들고 돌담 울타리 너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가리키며 그 교우에게 물었습니다.
'형제님, 저 소가 왜 저렇게 고개를 들고 돌담 울타리 너머를 바라보는지 알겠습니까?' '글쎄요, 왜 그럴까요?' 그러자 웨슬레 목사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저 소는 돌담을 뚫고 볼 수가 없기 때문에, 고개를 쳐들고 담 위로 보는 겁니다. 저 소처럼 형제님도 앞에 막힌 걱정과 문제의 담 그 너머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담의 앞뿐만이 아니라 너머, 위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힘이 되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인도의 바케이 목사님이 친구와 함께 험한 길을 따라 구릉지대를 가로질러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한참 걸어간 후에 그들은 계곡의 급류 위로 연결된 좁다란 밧줄 다리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 다리를 많이 건너 본 친구가 밧줄 다리를 건너 먼저 건너편에 도착했을 때, 바케이 목사님은 쩔쩔매며 겨우 다리의 중간 지점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바케이 목사님은 소용돌이치며 노호하는 급류를 내려다보며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그 다리가 마치 급류의 반대 방향으로 흔들리며 움직이는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그때 그 친구가 바케이 목사를 향해 소리쳤습니다. “내려다보지마! 나를 똑바로 쳐다보라고!” 그 충고는 효력이 있었습니다. 바케이 목사님이 세차게 흐르는 물결에서 친구에게로 시선을 돌렸을 때, 그는 담대히 다리를 건널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 여정에서 간혹 위협적이고 어려운 상황에 부딪히게 됩니다. 이와 같은 때에 우리가 문제 상황만을 응시하며 거기서 해결책을 찾고자 한다면 그것으로부터 빠져 나올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를 넘어 목표를 바라볼 때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믿음의 주님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볼 때, 결코 흔들리거나 두려움 없이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스펄전이라는 유명한 설교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스펄전이 자기의 생애에 깊은 회의에 빠진 일이 있었습니다. 인생의 길을 다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영혼이 되었습니다. 어느 주일 아침에 시골길을 가다가 이름 없는 감리교회에 들어가 예배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는 사람이 대 여섯 명밖에 안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목사도 없어서 구두를 깁기도 하고, 수선하기도 하고, 만들기도 하는 구두 직공이 일어나서 설교를 하는데 설교도 특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바라보십시다. 예수를 바라보십시다. ' 그 소리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스펄전을 보고는 큰 소리로 설교단에서 '저 청년 방황하고 있습니까? 길을 모르십니까?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라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때에 스펄전은 '아, 나는 길을 잃은 사람이구나 !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생각하고 예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영국의 거성 같은 위대한 설교자인 스펄전이 탄생한 것입니다.

한 때 미국 이민은 곧 인생의 성공인 것처럼 환상에 들떠 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역 이민 현상이 생기고 한인 교포사회가 가진 문제도 많이 노출되고 있습니다. 그 시절 미국에 이민 가서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얻은 사람들은 과거에 선망하던 대로 자가용을 몇 대나 굴리게 되었고, 수억 원이 넘는 집에서 살며 골프를 즐기고, 미국의 첨단 문명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과거에 특권층이나 되어야 만질 수 있고 누릴 수 있었던 그런 것들을 다 해보고 나니, 이제 누구도 부러워하거나 쳐다보아 주지 않는 현실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런 것들은 상대적인 가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이 바라보아야 할 목표는 바로 하나님뿐입니다. 이 세상의 부나 명예, 혹은 안락함을 추구하다 보면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 방황하는 삶을 살수밖에 없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우리는 먼저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구해야만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3S를 즐깁니다. 3S란 스포츠(sports), 섹스(sex), 스피드(speed)입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나사는 빼버리고 삽니다. 기계가 천천히 움직일 때는 나사가 하나쯤 빠져도 별 지장이 없는 것 같으나 속력을 내서 급히 달리다 보면 나사빠진 기계는 파괴되어 버리고 맙니다. 현대인들이 즐겨하는 3s위에 먼저 찾아야 할 중요한 S는 바로 영혼(spirit)입니다. 열왕기하 4장 2-7절에 보면 빚에 쪼들린 선지 생도의 아내가 영혼의 중요성을 망각할 때에 엘리사가 그녀에게 무엇이 있느냐고 물어보자 건전한 영혼이 있다고 대답하지 못하고, 믿음과 소망이 있다고 대답하지 못하고 기름 한 병 밖에 없다고 대답합니다. 잘 믿는 사람도 왕왕 영혼보다 물질을 더 앞세울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믿는 자로서 큰 잘못입니다. 중국 제나라에 도둑이 있었는데 대낮에 금방에서 금을 훔치다 붙잡혔습니다. 관원이 '사람이 많은데 왜 금을 훔쳤느냐'고 묻자 도둑이 대답하기를 금덩어리만 보이고 사람은 보이지 않아 그랬노라고 대답했다 합니다. 금에 현혹되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정신을 바로 차리고 하나님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미국 애리조나주의 한 농장에 강렬한 허리케인이 불어닥쳤습니다. 허리케인은 집과 농작물 그리고 가축들까지 모두 날려버렸습니다. 농부는 절망하여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때 무너진 닭장 속에서 벼슬이 찢기고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수탉 한 마리가 비틀거리며 걸어나왔습니다. 수탉은 날개를 퍼덕이며 무너지지 않은 담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 아침 햇살을 바라보며 목청껏 소리를 쳤습니다. “꼬끼오” 농부는 이 모습을 보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래 다시 일어나자. 나도 하늘을 향해 울고 있는 저 수탉처럼 다시 일어나자.’

잿더미 속에서 수탉이 울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본성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고난이 오면 하나님께 울부짖도록 하는 본성을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총체적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성도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위기에 처할 때마다 부르짖을 수 있는 본성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본성을 찾을 때 하나님은 분명히 회복을 주십니다.

처진 어깨의 귀갓길 어쩌다 밤하늘을 봅니다. 늘 상 본 것 같은 하늘인데 생소한 것이 별을 본 것이 언제인가 싶습니다. 탁 트인 넓은 하늘과 수많은 별들, 내게 지치고 힘든 내게 희망을 연구하는 듯 반짝입니다. 지치고 힘든 당신, 하늘을 보세요. 별을 보세요. 지금의 역경이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합니다. 별은 어둡기에 더욱 빛이 납니다.

유명한 작곡가 리스트의 일화입니다. 어느 날 리스트는 집에 놀러온 친구와 음악에 관해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진지하게 대화를 했습니다. 한참 지난 뒤 친구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하며 돌아갈 뜻을 비쳤고 리스트는 친구를 역까지 전송했습니다. 그런데 길가는 중간에 갑자기 날이 어두워지더니 소나기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러나 리스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계속 작곡이야기만 했습니다. 친구가 소나기가 오는데 이야기만 하느냐고 하자 리스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날씨가 나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듯 나도 날씨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내 머리 속에는 음악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며 살면 환경이 나쁘게 변해도 절망하지 않고 소망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경기도 개성시 북쪽 16Km 지점에 솟은 천마산 아래에는 박연폭포가 있습니다. 그 폭포를 향하여 가는 길에 두 절벽이 마주보며 만나는 곳이 있는데 그 간격은 약 1미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1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를 건너뛰는 사람이 몇 사람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평지에서의 1미터라면 어린 아이도 건너 뛸 수 있지만 천길 만길 되는 낭떠러지를 바라보며 건너뛰자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뛰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바위를 결단의 바위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밑을 바라보지 말고 평지라고 생각하며 앞에 있는 목표만 바라보고 결단을 내려서 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이 1미터의 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뒤를 바라보지 말고 앞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경주자는 끝까지 경기의 룰을 지키면서 우리 주님처럼 바른 경주를 해야합니다. 그때 우리의 기쁨은 배가 될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는 물위를 저벅저벅 걸었지만, 바람을 바라보았을 때는 무서워 바다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신 말씀이 마태복음 14장 31절의 말씀입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疑心)하였느냐?”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는 베드로가 물위로 저벅저벅 걸었습니다.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삶에 보람이 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바람 이는 바다를 바라보았을 때, 두려움·공포·의심이 생겼을 때는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믿음이 적은 자여!”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믿음이 적은 사람입니다. 큰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심을 물리쳐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담대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한 목수 아버지가 어느 날 못질을 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아들이 그것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큰 망치로 작은 못을 탕탕탕 박는 것이 재미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못질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얘야, 못질을 잘 하려면 네 시선을 고정시켜야 한단다. 못만 쳐다봐라. 그러면 처음에는 못이 작아 보이지만, 나중에는 점점 크게 보인단다. 그렇게 해서 못 대가리만 때리면 되는 거야. 그런데 만약 네가 시선을 고정시키지 않고 한눈을 팔면 손가락을 찧고 말 거다.”

실패하는 사람들은 한눈을 팔아서 그렇습니다. 잘못된 사람들,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 다 한눈 팔아서 그렇습니다. 이것저것 한눈 팔다가 자빠지고 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만을 향해서 전진해 나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고 앞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 가지 목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합니다. 성도여러분, 우리 모두가 하나님만 바라보며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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