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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산 소망을 가진 사람의 삶 (벧전 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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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는 신약 성경 중에 ‘공동서신’ 가운데 하나이고 사도 베드로가 쓴 편지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아주 따뜻하면서도 강력하고,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필치로 그 당시 고난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이 고난을 이겨 나갈 수 있을까 하는 데 대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사도 베드로는 ‘산 소망의 삶’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3절 말씀을 보세요.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산 소망의 삶을 살 수 있습니까? 2절 말씀을 보세요.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 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고난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베드로가 왜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을까요?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 계신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우연히 태어나 지금 이런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창세 이전에 여러분을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택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택함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여러분이 당하는 고난이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고 해도 실망해서는 안됩니다. 왜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정말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우연히 던져져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아시고 택하셨습니다. 때가 이르러 우리가 세상에 태어났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선택 가운데 서 있는 택함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선택의 사실을 소개하면서 베드로는 성부, 성자, 성령 성삼위 일체 하나님의 사역을 동시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미리 아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을 순종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 덕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를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선택의 사건 속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성삼위 하나님의 사역이 동시에 나타나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창세 전에 이미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을 때, 그때 이미 우리를 구원받은 사람으로 보셨습니다.
그러나 성자 예수님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그때 우리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했을 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게 되었을 때 성령은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사역은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부께서 택하시고, 성자께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 내 마음 가운데 역사하시고, 어느 날 나로 하여금 복음을 듣게 하시고, 내 마음의 문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를 내 주로 영접하게 하시고 복음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택하심을 받은 성도들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사도 베드로는 ‘피 뿌림’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성령의 거룩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입었습니다. 하나님의 그 귀한 사랑을 받아 성령의 역사 하심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순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보면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피 흘림’은 우리의 속죄의 근거입니다. 그런데 ‘피 뿌림’은 속죄의 적용을 강조하고 있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시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기 전, 하나님께서 완고한 바로 왕 때문에 애굽에 살고 있는 모든 처음 난 것과 장자들에게 심판을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구원받을 사람을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양의 피를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 피를 볼 때에 넘어가리라”(출 12:23).
여기 어린양 한 마리가 죽었습니다. 그 가족을 대신해서 양 한 마리가 피를 흘리고 죽었습니다. 이 피 흘림 때문에 그들 가족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속죄의 근거였습니다. 그러나 양이 피를 흘렸다고 해서 저절로 그 집의 장자가 죽은 것이 면제된 것은 아닙니다. 흘려진 피를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뿌려야만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 사실을 지식으로 알고 그 사실에 동의하지만, 그렇게 나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참으로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들은 드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은 피 흘림의 사실은 알고 있지만 피 뿌림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으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위해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나의 구속의 주님으로 영접하셨습니까? 그때에 피 뿌림이 이루어집니다. 이처럼 ‘피 뿌림’이란 말은 속죄의 적용 측면에서 강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 믿음의 응답이 없이는 안됩니다.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작정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에는 우리의 믿음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신앙고백이 없이 하나님이 선택하셨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신앙을 고백하게 됩니다.
선택에는 반드시 인격적인 믿음의 응답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시고 창세 이전부터 우리 삶을 간섭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3절 말씀을 보세요.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거듭난 것은 하나님의 그 많으신 긍휼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긍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땅히 저주해야 할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저주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크고 얼마나 많습니까? 사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악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훨씬 더 죄에 찌들고 오염되고 부패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이 이 죄에 대해서 얼마나 신랄하게 고발합니까?
우리는 성령의 밝은 빛 앞에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자신의 죄악의 깊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임하게 될 하나님의 진노를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마땅히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았습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절망합니까? 고난받는다고 해서 낙심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 많은 긍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어떤 환경, 어떤 조건 속에서도 감사하고 찬미하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거 참 이상하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니…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신비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시되 마치 사랑할 사람이 나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하신다. 내가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유일한 생존자라고 할지라도 그분은 여전히 나 하나를 위해서라도 기쁘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갔을 것이다. 이상하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니.”
이와 같은 고백을 한 성 어거스틴의 마음이 바로 오늘 이 말씀을 통해 고백하고 있는 베드로의 심정과 같은 것입니다. 그 많으신 긍휼대로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나를 구원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이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어떤 역경 중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큽니까?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 이것이 고난을 이기는 힘입니다. 이것이 산 소망의 원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그 분이 나를 아시고 그 분의 품안에 안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품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며 많은 긍휼의 대상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2장 4절 이하에 주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 바울도 하나님을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선택 이것이 우리가 가진, 살아 있는 소망의 원천인 것입니다

그러면 산 소망의 기초가 무엇입니까? 오늘 주신 말씀 3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주님, 그 주님이 나에게 새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새생명을 통해서 새 소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일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의 체험이기도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도 나를 계속해서 도우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은, 우리도 언젠가는 죽지만 예수님과 같이 다시 육체적으로 살아난다는 부활의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순간에도 주님은 우리를 영적으로 소생시켜 주시고 계속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허락하십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까지는 믿을 수 있지만 예수님의 부활만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이 없이 기독교가 성립될 수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5장 14절을 보세요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의 믿음도 헛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삶 속에 뛰어들어와 우리에게 새생명을 주시고 새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계속 인도하십니다. 이 다시 사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산 소망의 기초가 되십니다.

그러면 언제 이 산 소망이 시작됩니까? 오늘 주신 말씀에서 산 소망은 “거듭남으로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육체를 가지고 태어날 때 어떤 상태로 태어납니까? 소망 없이 태어납니다. 바울이 에베소서 2장 12절에 말씀한 대로입니다. “그때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더니.” 우리는 이렇게 소망 없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언제 우리가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거듭난 순간부터입니다. 무엇으로 우리가 거듭났습니까? 베드로전서 1장 23절을 보세요.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했습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거듭났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의 말씀을 접촉하기 시작했을 때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구주 되심을 알았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 없이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생명에 연결되었고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영원한 생명을 우리의 것으로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거듭났습니다. 그 순간부터 우리 안에는 산 소망이 임했습니다. 이런 사건이 여러분에게 있었습니까? 여러분에게 정말 산 소망이 있습니까? 혹시 아직도 희망 없이 방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님으로 신뢰함으로 거듭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 주신 말씀 4절부터 12절까지는 산 소망의 능력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산 소망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산 소망은 우리의 미래의 삶과 현재의 삶에 똑같이 영향을 미칩니다. 미래에는 기업의 보증이 되십니다. 1장 4절에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산 소망은 미래의 기업을 보증합니다. 그 기업이 어떤 것인데요? 1장 4절에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했습니다.
우리의 가진 많은 소망들은 다 부패한 소망입니다. 육체의 소멸과 함께 다 사라집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늘에 간직해 놓으신 이 산 소망은 누구도 훔쳐갈 수 없습니다. 아무도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더럽지 않습니다. 이 말은 본래 ‘다른 색깔로 염색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변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우리 위해 예비하신 기업은 불변의 기업입니다.
더구나 쇠하지도 않습니다. 이 말의 본래의 뜻은 ‘영원히 그 아름다움을 보존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자랑하는 모든 아름다움은 다 순간적입니다. 다 지나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그 기업은 쇠하지 아니하는 찬란한 영광을 영원히 간직하고 있는 기업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위해서 하늘 나라에 간직되어 있는 기업입니다.

그리고 9-12절 말씀은 구원의 완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9절 말씀을 보세요.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했습니다.
믿음의 결국은 우리의 구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구원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품에 안길 때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이미 구원이 확실해졌습니다. 그러나 이 구원은 계속해서 자라야 할 소망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품에 안길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요사이 어떤 이는 구원받기 위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구시대적인 발상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의 주제는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 말씀을 보세요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했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꿈을 세웠어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구원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10절 이하에서는 이 구원이 어떻게 우리에게 오게 되었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소망은 장차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에게 영원한 기업을 주실 것이라는 보증이며 구원의 완성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래에 대한 산 소망의 능력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산 소망은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는 어떠한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까?
우선,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1장 5절 말씀을 보세요.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요한복음 10장 28-29절을 같이 읽으십시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아버지 손안에 있는 나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든든합니다.

따라서 시련을 극복하게 해 주십니다. 6-7절 말씀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도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시련이란 말은 그 당시 순금과 가짜 금을 감정할 때 쓰던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왜 시련이 옵니까?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흔히 어떤 사람이 “믿다가 타락했다”고 하는데 사실 그 말은 틀린 말입니다. 그 사람은 처음부터 믿지 않았고 믿는 척하다가 시련이 오니까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정말 구원받은 성도는 결코 주님 앞에서 완전 후퇴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잠시 방황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주님 안에서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하게 됩니다.

다른 하나의 뜻은 학생이 시험을 치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욥이 시련을 통해서 더 높은 단계를 향해서 성숙해진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라고 말씀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시험은 여러 가지입니다. ‘여러 가지’라는 말은 ‘여러 가지 색깔’을 의미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노라면 형형 색색의 시험이 우리에게 부딪쳐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얼마나 많은 시험이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련은 잠깐이라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근심도 잠깐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가지 비밀을 압니다. 이 시련은 결국 나를 유익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7절 말씀을 보세요,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도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련은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형성하게 합니다. 어떤 인격을 형성합니까? 주님 다시 오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을 수 있는 인격을 준비시켜 주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이 시련 속에서 성숙합니다. 시련 속에서 우리는 주님을 의지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주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순금보다 더 귀하게 정련된 인격이 이 불같은 시험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시련이 찾아올 때마다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위한 칭찬과 영광과 존귀의 보장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바라보세요

그러면, 우리에게 시련이 닥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시련이 닥칠 때 우리는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이 산 소망 때문에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시련 속에서도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우리 찬양의 대상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고난 속에서도 우리에게 산 소망을 갖게 해 주신 주님을 찬양합시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8절 말씀을 보세요.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고 의지하며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산 소망 중에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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