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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받는 성도의 받을 상 (벧전 0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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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전체에서 제일 많이 나타나는 말 세 가지는 ‘고난,’ ‘소망’ 그리고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고난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지막 장인 5장을 통해서 베드로는 이렇게 고난받는 사람이 받을 보상이 무엇인가 하는 데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에는 어떤 보상이 있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4절을 보세요.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게 해 주시겠다는 것이 고난에 대한 보상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기서 말씀하는 것은 미래의 보상입니다. 이것은 종말론적인 보상으로 우리가 장차 주님 앞에 설 때 받게 될 보상인 것입니다.
그리고 10절 말씀을 보세요.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했습니다.

여기서 주시는 말씀은 이 세상에서 고난받는 데 대한 보상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장차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많은 상급을 기대할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우리에게 주는 놀라운 유익이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베드로전서 5장은 베드로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고난 속에 있는 교회를 향해서 그들이 이 고난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리고 무슨 보상을 기대해야 하는가 하는 데 대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1-4절은 지도자를 향해 말씀합니다.
1절 말씀을 보세요. “너희 중에 장로들에게 말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다” 했습니다. 여기서 교회의 지도자들을 장로라고 불렀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말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장로, 감독, 목사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장로, 감독, 목사는 동의어입니다.
‘장로’라는 명칭은 인생에 있어서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고 신망이 있으며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 연장자라는 의미입니다. ‘감독’이란 명칭은 지도자의 기능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는 일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로나 감독, 그리고 목사는 각각 기능과 책임을 강조한 동의어입니다.

성경에서는 다만 두 가지 제도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직책으로서 성경이 인정하는 것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오늘의 용어로 말하면 ‘목사’와 ‘집사’입니다. 다시 말하면 장로와 집사, 두 가지 직책밖에는 없습니다.
가령 디모데전서 3장에 보면 교회의 지도자에 대해서 가르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보면 두 가지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1절 이하 7절까지에서는 감독의 직분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면”하고 시작했는데 여기에 나오는 감독의 직분은 오늘날로 말하면 목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8절을 보세요.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라고 말하면서 집사의 자격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목사 혹은 감독과 집사 사이에 중간 직분이 없습니다. 성경은 교회의 직분을 두 가지만으로 명백하게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감독이고 다른 하나는 집사입니다. 이 두 가지 직분만이 성경을 통해서 분명하게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높임받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비성경적인 직분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집사 일을 보면 안되겠다고 생각해서 권사가 되어야 하고 장로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인간적인 것이고, 말하자면 종교적인 허영심인 것입니다. 성경은 부름받아 양무리를 먹이고 치는 목사와 그 목사를 돕는 집사, 이 두 가지 직분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1장 1절을 보세요.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도 감독이나 장로나 목사가 같은 직분에 대한 명칭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절을 다시 한 번 보세요.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라고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장로’라는 것은 교회의 지도자를 가리킨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가 주신 편지는 장로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에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왜 교회 지도자들에게 편지하는 것일까요? 이 베드로전서는 박해와 고난의 때를 배경으로 해서 쓰게 된 것입니다. 박해와 고난의 때일수록 교회가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좋은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지도자의 자기 성찰이 더욱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입니다.
일찍이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4장 17절에서 임박한 심판을 예감하면서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으므로 먼저 하나님의 집이 바르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집이 바르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지도자들이 하나님 앞에 견고하고 경건하고 성실하게 설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 놀라운 편지를 끝맺으면서 먼저 교회의 지도자를 향해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보면 교회의 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자격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보세요.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지도자는 그리스도 예수를 개인적으로 깊이 체험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내가 체험하지 않은 사실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자신이 ‘장로’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교황 혹은 법왕이라는 명칭을 부여했습니다. 지금도 로마 바티칸성당에 가면 역대 교황의 이름을 돌에 새겨 놓았는데 초대 교황이 누군지 아십니까?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신을 “나는 함께 장로 된 자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함께 지도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강조된 것은 고난보다는 그리스도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의 증인이란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고난받으시는 모든 광경을 다 지켜본 예수님의 증인이란 말입니다.
이 사실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셨듯이 우리도 고난을 받을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나는 예수님이 고난당하시는 모습을 지켜본 증인으로서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와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사실을 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나를 구속하셨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사람이라야 이 시대를 향해서 복음의 메시지를 확실하게 증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법정에 서는 증인은 사실에 대한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내 귀로 직접 들어야 그 사실을 증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 노릇을 잘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에 관해서 보고 들은, 사실적인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만나신 체험이 있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할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넓게 체험할수록, 우리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넓게, 확실하게 알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의 지도자는 먼저 그리스도의 사건에 관한 확실한 증인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2절을 보십시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라고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양무리를 치는 사람입니다. 이 말을 잘못 이해하면 양무리를 때리는 사람으로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여기서 “친다”는 말은 ‘먹이고 돌본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나셔서 식사하신 후 베드로를 따로 불렀습니다. 타락하고 배신해서 다시 옛 직업으로 돌아왔던 베드로, 그는 얼마나 엉거주춤하고 어정쩡한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때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을 치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어떤 책임을 맡기십니까? “너희들이 나를 사랑하느냐?” “네, 사랑합니다.” 그러자 주님의 음성이 메아리처럼 들려 옵니다. “그러면 내 양무리를 치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제일 사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러면 너도 내 백성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일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비단 목사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성숙한 교회 지도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교훈인 것입니다. 교회학교 교사도 목자입니다. 어린이를 가르치는 목자입니다. 구역의 책임자도 목자입니다. 구역 식구들을 인도하는 목자입니다. 신앙의 연륜이 쌓이면 자연히 신앙이 어린 사람들을 양육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이 다 목자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말하면 목사만이 목자는 아닙니다.

여기 “양무리를 치되”하는 말이 나오는데, 목자는 양무리를 잘 먹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잘 먹이기 위해서 살진 꼴, 기름진 좋은 꼴을 먹여야 합니다. 영양을 잘 공급해야 합니다. 목자가 양에게 독초를 먹이면 안됩니다. 그러면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우리 자신이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고 묵상하며 정말 살진 꼴을, 신선한 꼴을 먹여야 합니다. 다양한 메뉴로 양들에게 말씀을 먹여야 합니다. 이것이 지도자의 책임입니다.
“양무리를 친다”라는 말 속에는 양무리를 먹이는 것뿐만 아니라 보호의 책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 가지 거짓된 교훈과 이단 사상으로부터 양무리를 보호할 책임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6-32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과 작별하면서 주신 마지막 메시지가 있습니다. 같이 읽어보실까요?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니라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들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걱정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리들이 들어와서 거짓된 교훈을 퍼뜨리고 성도들의 믿음을 바른 신앙에서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지도자는 언제나 바른 진리, 바른 교훈을 가지고 이 양무리를 잘 보살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도자는 자원해서 양무리를 섬겨야 합니다. 2절 말씀을 다시 보세요.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 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자원한다”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원하는데는 한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전제되지 않고 내 생각만 강조되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일하라는 것입니다

2절의 계속되는 말씀을 보세요.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즐거운 뜻”이란 다른 말로 하면 ‘열심으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이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섬김의 태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섬기는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지도자는 섬기는 자이어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문제거리 중의 하나는 교회의 직분을 계급처럼 오해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교회의 직분을 계급의 차원에서 다룬 적이 전혀 없습니다. 직분을 맡으면 계급이 상승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낮은 종의 위치에 서는 것입니다.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가장 많이 섬기고 가장 성실하게 섬기는 사람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4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지도자가 되려면 먼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욕심을 멀리해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2절을 보면 지도자는 더러운 이(利)를 멀리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물질적인 욕심을 위해서 사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교회 지도자의 자질로 이 점을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가 지도자에 대해서 물질적으로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도자 자신이 이 물질에 얽매여서는 안됩니다.

또한 지도자는 양무리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3절 말씀을 보세요.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 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인도의 정신적인 지도자였던 마하트마 간디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도자가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면 그를 따르는 사람은 이유도 모르고 따라간다.” 의미 있는 말입니다. 지도자의 영향력이 이처럼 큰 것입니다. 성경은 자신이 모본이 된 지도자만이 가장 호소력 있게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자세로 지도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상을 약속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4절을 보세요.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했습니다.
둘째로, 5-9절은 모든 교인들을 향한 교훈입니다.
5절에 보면 “젊은 자들아”하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젊은 자들은 장로들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젊은 자들은 청년들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고 교회 안에서 신앙적인 지도를 받고 있는 모든 교인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까요?

① 순복하라고 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5절을 보십시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라고 했습니다. 지도자를 따라 주는 사람이 있어야 지도가 가능합니다. 아무도 따라 주지 않으면 지도자는 지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지도자를 신임하고 마음을 다하여 순복하는 자세가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한 공동체의 지도력을 존중히 여기십니다. 지도력이 확립되지 않으면 공동체는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지도자에게 순복하라고 권면했습니다.

② 겸손하라고 했습니다.
5절 말씀을 다시 보세요.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했습니다. 겸손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교만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느니라.” 사단의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겸손의 덕을 강조하고 있으십니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했습니다. 일을 하려면 우리는 허리를 동입니다. 이것은 일하고자 하는 자세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겸손하면 때가 될 때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십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겸손하셨습니까? 빌립보서 2장 6절 이하에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겸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가장 높이셨습니다.
이것은 젊은 사람들을 향한, 옳은 교훈으로 삼을 수 있다고 봅니다. 젊을 때는 순복보다는 반항을, 겸손보다는 교만을, 신뢰보다는 의심을, 유혹을 극복하기보다는 유혹에 굴복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 따라서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③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라고 했습니다.
7절 말씀을 보세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염려’라는 말은 본래 ‘마음을 나눈다’는 뜻이 있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염려가 지나치면 정신 분열을 일으키게 됩니다. 왜 염려합니까?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사람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염려는 다 주께 맡겨 버리세요. 진정으로 맡기면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할 책임이 그 보따리를 맡으신 분에게로 넘어갑니다.

④ 마귀를 대적하라고 했습니다.
8절 말씀을 보세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사단은 대적이고, 마귀는 ‘참소자, 고발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대적 마귀란 곧 사단 마귀라는 뜻입니다.
사단 마귀를 어떻게 대적해야 승리할 수 있을까요? “근신하라, 깨어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권면하는 베드로 자신의 경험 속에서도 근신하지 못하고 깨어 있지 못해서 그만 사단에게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깨어 있지 못하고 졸고 잠자다가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그렇게 졸다가 마귀에게 당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 이 말을 더 실감 있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사단을 대적하려면 믿음을 굳게 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세요. 9절에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예정하신 때에 우리를 높이시기 위해 고난을 주십니다. 이를 알고 주님을 바라보고 승리하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면 마귀와 대적하지 않고 오히려 지도자와 싸우게 됩니다.

끝으로, 10-14절에 약속과 권면이 있습니다.
무슨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10절 말씀을 보세요.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이미 말씀드린 대로 4절에서 말씀한 보상이 미래의 보상이라면 10절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한 보상입니다. 10절에 자세히 보면 ‘잠깐’이라는 말과 ‘영원’이란 말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고난’은 ‘영광’이란 말과 대조가 됩니다. ‘영원한 영광’ 그리고 ‘잠깐의 고난’입니다. 이 두 말을 비교해 보세요. 잠깐의 고난, 그렇습니다. 고난이 아무리 힘겨워도 잠깐입니다. 그런데 이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지 못하고, 잠깐의 고난을 피하기 위하여 영원한 영광을 상실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영광이 그렇게도 뚜렷한 보상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잠시의 고난을 견뎌야 합니다. 그 고난을 견디고 극복하여 승리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고난은 우리에게 이런 축복을 가져다줍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온전해집니다. “온전해진다”는 말은 ‘찢어진 그물을 깁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굳게 섭니다. 기초를 단단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터가 단단해야 그 위에 영광스러운 집을 세울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강해집니다. 이 말은 일을 할 수 있는 힘찬 자세를 가리킵니다. 고난을 통해서 위대한 일을 도모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폭풍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굳건히 서서 생의 마지막 때까지 하나님의 일을 계속 할 수 있도록 우리 인생의 여정 가운데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고난에는 반드시 보상이 있습니다. 장차 하나님 앞에서 시들지 아니하는 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땅에서도 온전하게 하시고, 굳게 해 주시고, 강하게 해 주시고, 또 견고케 하시는 보상을 주십니다.

“권력이 세세 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모든 고난을 뛰어 넘어 그리스도 안에 언제나 승리한다는 이 놀라운 소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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