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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를 짓지 않으려면 (요일 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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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말씀을 보면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근본 뜻은 어떻게 해야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해답을 찾기 전에 만일 죄를 범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지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2절 말씀을 보세요. “저는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여기 “화목 제물”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깨어진 상태인데 이것을 회복시켜 화목하게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도 그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목을 위해서 오신 하나님의 어린양, 즉 화목의 제물이란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깨뜨린 것이 무엇입니까? 죄입니다.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인간이 죄를 범하고는 하나님을 등지고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아담을 찾으셨지만 인간은 그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하고 말할 수 없는 가책과 갈등 속에서 하나님께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육신은 살았으나 심령은 죽었습니다.
빛 되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니까 어두움에 다닐 수밖에 없고, 사랑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니까 미워할 수밖에 없고, 생명이신 하나님을 떠나니까 사망에 거할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 사이에 가인과 아벨을 낳았는데 그 형제 사이에서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갈라놓는 것입니다. 갈등과 살인과 시새움과 증오와 전쟁이 인류 역사 속에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죄가 있는 동안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 계급과 계급 사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이 인간 역사 속에서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음을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까? 성경에 보면 유대인과 이방인이 어떻게 적대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데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막혀있는 벽을 평화이신 주님께서 헐어버리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귀한 말씀만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놀라운 기적만 행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생활의 본만 보여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고, 죄의 결과로 죽었고,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사는 것을 평화하게 하기 위하여, 말하자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하기 위하여, 화목의 제물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화목의 제물이 되심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끊어졌던 관계가 회복되고, 그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뿌림을 받은 사람은 평화를 누리게 되고, 죄사함을 받아 하늘로부터 유쾌하게 되는 날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인한 화목 제물이십니다. 그는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세상의 죄를 위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범할 때 실망해서는 안됩니다. 절망해서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죄를 범하면 바로 예수님이 그 죄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 나아오면 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또한 이사야 1장 18절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절과 2절 말씀에 두 가지로 표현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우리의 대언자이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의 화목 제물이십니다. 대언자 되시고 화목 제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문제에 대한 해결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혹시 죄를 범했다고 해도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대언자이십니다.
대언자라는 말의 본래의 뜻은 “부름을 받아서 내 곁에 서 계신 분”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별명인 보혜사와도 의미가 같습니다. 혹시 우리가 죄를 범해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여기서 예수님을 그저 우리 곁에 계신 분으로 제시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대언자로, 다시 말하면 우리를 돕고 게신 분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적인 표현을 살려서 “대언자”란 말의 의미를 잘 드러낼 수 있는 다른 말로는 “변호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이 재판장이고 예수님이 변호사라면 검사가 있어야 하는데, 검사가 누굽니까? 검사는 사단인데, 사단은 “참소자”로서 고소를 합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0절에 보면 사단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단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형제들을 참소하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인 한 사람이 죄를 범하는 순간 하늘의 법정에서 일어날 사건을 연상해 보세요. 제일 먼저 누가 활동을 시작합니까? 검사가 먼저 고소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높으신 재판장이시여,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저 사람을 보세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구원을 받았다고 간증을 하면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방금 죄 가운데 빠져서 죄를 범한 저 꼴을 좀 보세요. 저러면서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어쩌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이런 죄를 범했으니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고발하고 양심의 가책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죄 가운데 일어나는 가장 심각한 위기입니다. 죄를 범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사단의 참소입니다. 마귀의 고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절대로 마귀의 고소하는 말만 듣고 절망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변호사이신 예수님의 변론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잠깐만 제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제가 바로 저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짊어지고 보배로운 피를 흘린 사실을 기억하시지요. 그 피로 말미암아 그는 구속함을 얻었고, 죄사함을 받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가 되지 않았습니까?”라는 예수님의 위대한 변론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변론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속에서도 똑같이 나를 변론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이 변론을 통해서 우리 영혼에 일어나는 두려움이 제거되고 위로와 용기와 확신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1절에서 위대한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 “이제”라는 말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의 죄를 친히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힌 “이제”는, 이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 하심을 얻고 성결한 자리로 나아가는 “이제”는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물론 이 말은 그리스도인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이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보다 그리스도와 깊은 관계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15장에서 제자들을 향하여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하면서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이 얼마나 위대하고 기쁜 소식입니까? 참으로 은혜입니다. 우리는 다 지은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사람들이요,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이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를 결코 정죄할 수 없습니다.

요한 번연도 “그리스도에게 몸을 숨긴 사람에게는 절대로 형벌이 임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인정함을 받게 되었고, 우리의 심령이 주를 영접하는 순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영혼뿐이고 이 세상에서 우리는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동안, 아니 내가 원하는 것은 아닌데 죄에 끌려가고 죄에 포로가 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을 겪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이 육신과 영혼, 선과 악, 죄와 의가 계속 투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싸움도 나 자신의 힘으로써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주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다 실패를 거듭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러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기독도가 장망성을 떠나서 천성을 향하여 가는 것과도 같습니다. 어려움이 많고, 시험과 유혹이 많고, 그 심신이 피곤하고 지치고 상하면서 계속 나아갑니다. 어떤 때는 잘못된 길에 들어서서 한동안 방황하다가, 또 다시 정신 차리고, 전도자의 인도를 받고 바른 길로 돌아옵니다.
우리의 가는 길이 꼭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에 물들고, 세상의 악의 가시에 찔리고, 상처난 우리 심령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절망적인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야. 너는 네가 범한 이러이러한 죄 때문에 형벌을 받아야 해. 죄의 삯은 사망이야.” 이렇게 우리에게 위협을 가해 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귀의 이 공갈에 겁내지 말아야 합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죄를 범해서 두려움 가운데 있는 분 계십니까? 분명히 들으세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결단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누구도 정죄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위해 이 땅위에 오셨고, 우리 위해 고난당하시고, 십자가 지시고, 우리 위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가 정죄받아 죽게 되는 우리를 꼭 안아 주시면서 “제가 이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피를 흘렸습니다”라고 말씀하실 때 누가 그를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누구도 정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죄를 범할 때 우리의 마음과 영혼 속에 일어나는 커다란 위기는 무엇입니까? 처음에 한 번쯤은 자백해도 서너 번쯤 죄를 범하고 나면 그 다음엔 어떤 생각이 듭니까?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한두 번이 아닌데 또 고백할 수 있는가’하는 논리가 때때로 더 커다란 설득력을 가지고 다가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사단의 참소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백을 안하는 그 순간부터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헤아리기 어려운 타락의 심연으로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는 한 하나님의 의식이 우리의 영혼을 붙들고 있기 때문에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백이 귀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화목 제물입니다. 사실 화목이란 말은 정확한 번역은 아닙니다. 이 말의 헬라 말은 “힐라스모스”인데 영어로 표현하면 ‘propitiation’입니다. 우리말에 가깝게 번역하면 “속죄소”입니다.

옛날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죄 용서를 빌 때 속죄소 앞에 나아갔습니다. 속죄소는 지성소 안에 있어서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를 위임받아 그 죄를 담당하고 장막 안에 들어갑니다. 들어가면 거기에서 성소와 지성소로 나누어집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지성소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대제사장이 홀로 하나님께 나아가 직고합니다. 그래서 그 죄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지성소 안에 들어가게 되면 제일 앞에 있는 것이 언약궤입니다. 그것을 법궤, 혹은 증거궤라고 하는데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그 휘장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법궤가 놓여 있습니다. 그 법궤 맨 위에 붙어있는 판이 속죄소입니다. 우리말 신약 성경에는 그것을 “은혜의 보좌”라고 했습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양쪽에 천사들의 모습 같은 그룹들이 내다보이는 그 판 위에다 대제사장은 속죄의 피를 뿌립니다. 흐르는 피에 의해서 언약궤 속에 들어있는 모든 것이 감추어집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법궤 속에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 깨어진 돌비, 그리고 만나가 들어 있는데 이 세 가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중대한 범죄와 관련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율법을 범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파괴의 범죄, 범법의 범죄, 깨어진 돌비는 하나님의 법을 파괴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를 언제나 상기시켜 줍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간에 지도자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열두 지파를 대표하여 지팡이를 갖다 놓았습니다. 그리고 위도 아래도 다 잘랐습니다. 그런데 아론의 지팡이에서만 싹이 나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꽃이 피었습니다. 그래서 아론을 지도자로 세웠다는 것을, 그의 권위를 하나님께서 입증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그 지팡이를 법궤 속에 갖다 넣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에 대한 항거, 이것은 인간이 가장 잘 범하는 범죄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법궤 안에는 만나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먹을 것을 원했습니까? 광야를 행군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먹고 흥분하고 좋아했습니다. 만나는 꿀 섞은 과자와도 같고 기름 섞은 과자와도 같이, 그러니까 달콤한 맛도 나고 고소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처음 먹을 때는 그렇게 신비했었는데 자꾸만 먹다보니 싫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애굽 땅에서 먹고 살았던 음식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기도 했고, 이제 만나가 그들의 불평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정적으로 “박한 식물은 싫어하노라”고 선언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그때처럼 진노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자마자 불뱀을 보내셔서 그들을 징벌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축복의 만나를 오히려 원망의 대상으로 삼았던 이 범죄가 이 만나의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 축복하신 것들에 대해서 감사하는 대신에 얼마나 원망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환경,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재능, 내게 주신 사업, 감사해야 할 이러한 조건들에 감사하는 대신 오히려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법궤 속을 들여다 본 사람마다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범죄자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속죄소 위에서 그 백성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흘려진 제물의 피가 모든 죄를 덮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화목 제물’이란 ‘피가 덮였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우리 마음속에 적용시켜 보면 아름다운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문을 법궤의 뚜껑을 열어본 것처럼 여시고 우리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이 밖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신뢰했을 때, 하나님의 처방인 은혜로 말미암아 어린양의 피로 우리의 죄는 덮여지고 도말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속죄의 효력은 우주적이며 보편적입니다.

그러면 죄를 범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죄를 범하면 해결책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죄를 범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고 죄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5-6절에 그 비결이 있습니다. “주 안에 거하라” 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데 하나는 말씀을 지키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3, 4절을 보세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사람은 계명을 지킵니다.

우리가 만일 죄를 범했으면 먼저 자백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백하고 나서 그 다음에 또 죄를 범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면 이런 자백은 참된 자백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참된 자백은 다시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열망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 말씀에 순종합니까? 우선 벌이 무서워서 순종합니다. 그리고 나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순종합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에서 순종의 동기는 그 차원이 높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순종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깊은 사랑에서 우러나온 순종으로 말씀을 지키는 삶이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5절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 21절에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했습니다. 23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했습니다.

예수님도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버지의 명령을 지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0절에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한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그 계명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사랑합니까?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을 기쁘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방법은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러면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씀을 알아야 순종할 것 아닙니까? 그러기 위해서 성경을 읽어야 하고, 암송도 하고, 어떤 분처럼 쓰기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생활 속에 적용시켜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알아야 순종합니다. 그리고 말씀이 우리 속에 있을 뿐 아니라 그 말씀대로 살면 주님과 우리 사이에 사랑이 더 깊어 가는 감격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기꺼이 준행하기 원하는 즐거운 소망을 갖고 있고, 말씀이 축복인 것을 아는 사람은 비로소 시편 기자의 심정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의 율법을 주야로 행하는 그 기쁨을, 그 즐거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편 40편 6-8절 말씀을 신약 성경에서 자주 인용하셨습니다. 경건의 생활, 죄를 이기는 승리의 생활은 주님에 대한 사랑에 뿌리박은 행함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주님과 지속적인 교제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주님과 지속적으로 교제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닮으려는 계속적인 노력을 하는 것, 기도를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 묵상을 통해서 사귀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잊혀지기 쉬운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자각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곁에 계신 주님을 계속 상기하는 일입니다. 이것을 통해 주님과 계속적으로 교제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범한 데서부터 승리하기를 원하십니다. 죄악이 관영한 세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세상에 살지만 주님을 사랑함으로 그 말씀 따라 살고, 주님의 임재를 계속 상기하면서, 죄 범치 않고 살아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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