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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각을 사용한 연단 (히 05: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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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 신문이나 잡지를 읽어보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건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현대인들이 건강문제에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도 지난번에 일년정도 허리가 아파서 고생을 하는 바람에 거의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다음부터는 황수관 박사를 모실 필요가 없이 제가 하려고 합니다.
건강하게 살려면 첫째는 운동을 하고 둘째는 적절한 식사를 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입니다. 운동에 대해서 제가 일년동안 연구하고 내린 결론은 걷는 것입니다. 한 시간을 빠른 속도로 걸으면 거리로는 6km가 되고 칼로리는 약 650 칼로리 정도 소모됩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5번 정도 빠른 속도로 하루에 한 시간만 걸으면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먹는 것인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론이 많아서 무엇이 좋은 것이라고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중에서 이런 이론이 있습니다. 우리 치아는 모두 32개가 있는데 앞니가 8개, 송곳니가 4개, 그리고 어금니가 20개가 있습니다. 비율로 하면 2:1:5입니다. 그런데 치아의 기능이 앞니는 채소를 먹을 때 사용하고, 송곳니는 고기를 먹을 때 사용합니다. 그리고 어금니는 밥을 먹을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먹어야 하는 음식을 치아를 통해 구분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류, 채소, 곡물의 비율이 1:2:5가 되면 균형이 맞는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식생활이 좋은 것입니다. 밥 한 공기, 그리고 김치, 거기다가 고기 몇 점이 들어간 고깃국, 이렇게 먹으면 1:2:5의 비율이 정확하게 맞습니다. 이렇게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고 균형 있게 식사를 하는 것이 건강의 비결입니다.
그런데 왜 이것을 알면서도 지키지 못합니까? 이렇게 하기만 하면 다 건강하게 살 수 있는데 왜 안 하는 것입니까? 한 마디로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게으르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성적으로 살지 않고 감정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어느 날 '오늘부터 운동을 시작해야겠다'하고 그 날로 비싼 운동기구를 사들입니다. 그래서 일주일은 아침저녁으로 열심히 하십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고 나면 그때부터는 왜 오늘은 운동을 할 수가 없는가 하는 핑계를 만들기 바쁩니다.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안되겠다' '오늘은 손님이 와서 안되겠다' '오늘은 저녁을 너무 많이 먹어서 안되겠다' 온갖 핑계를 다 갖다 댑니다. 이렇게 한 달이 지나면 비싼 돈주고 산 운동기구가 애물단지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자기 감정대로만 살면 하나도 되는 일이 없습니다. 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하고, 이렇게 살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은 출근할 기분이 아니냐, 어디 낚시나 가야겠다' 이러고 낚싯대 챙기는 분이 계십니까? 하기 싫어도 해야 합니다. 오늘도 출근하면 변함 없이 그 지겨운 소리를 들을 것이 뻔한데도 눈 딱감고 출근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안 잘리고 버틸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은 왠지 교회 갈 기분이 아니야' 그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말씀하셨으니 다른 데 가고 싶어도 참고 교회로 나오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졸업식을 할 때 상을 주는데 맨 먼저 주는 상이 우등상입니다. 공부를 잘해서 받는 상입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주는 상이 개근상입니다. 그런데 저는 거꾸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일 먼저 개근상을 주어야 합니다. 이것만큼 귀한 일이 없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감기에 걸려도, 버스 바퀴가 펑크가 나도 굳세게 학교에 나오는 것, 이것이 소중합니다.
신앙생활도 교회에 꾸준히 나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디 가서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은혜 받고는 '이제부터 죽도록 충성하겠습니다' 그리고는 한 두 달 열심을 내다가 슬그머니 없어지는 것, 이것은 바른 신앙의 자세가 아닙니다. 신앙이란 켄터키 치킨이 아니라 삼계탕입니다. 펄펄 끓는 기름 속에서 잠깐 튀겨지는 것이 아니라 인삼 넣고 대추 넣고 약한 불에 24시간 우려낸 삼계탕입니다. 은근하면서도 꾸준히 계속하는 것, 이것이 올바른 신앙의 자세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 부흥회가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지만 좋은 영향만큼이나 나쁜 영향도 많았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을 감정적인 것으로 몰고갔다는 것입니다. 어떤 감격이나 기쁨이나 온 몸이 짜릿해 지는 것, 이런 것들을 찾아다니다 보니 신앙이 언제나 제 자리 걸음입니다. 믿음이 체계적으로 자랄 기회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바로 그 말씀입니다. 믿음생활을 내 감정에 따라 하면 그 믿음이 자라지를 않습니다. 단단한 음식을 먹을 생각은 안하고 언제나 젖만 먹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보다는 당장에 좋은 것, 당장에 기쁘게 해주고, 짜릿하게 만들어주고, 세상만사를 잊게 해주는 것만 찾아다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싸움입니다. 자기와의 싸움이고 환경과의 싸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싫어하는 나 자신의 게으름과의 싸움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방해하는 환경과의 싸움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핑계를 많이 대십니다. '사실은 이렇게 하고 싶은데, 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드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들고, 용서하고 싶은데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을 주십시오, 용서하는 마음을 주십시오'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기도했는데 안주십니까?' 하는 것입니다. '나는 사랑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안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닙니다' 이렇게 빠져나가는 분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언제 '아 오늘은 왠지 모르게 성경을 읽고 싶어' 이런 마음이 드신 적이 있습니까? '오늘은 하루 종일 기도가 하고 싶어' 이런 날이 단 하루라도 있었습니까? '오늘은 왠지 모르게 쇼핑을 하고 싶어' '오늘은 하루 종일 수다를 떨고 싶어' 이런 마음이야 항상 드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때까지 미루면 평생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용서하는 마음이 들 때까지 기다리다보면 평생 미움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은 그렇게 고상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본문 1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성숙한 신앙인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지각이란 무엇입니까?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양식입니다. 하고 싶지 않지만 그것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면 하는 것을 말합니다. 감정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 움직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장성해서 굳은 음식을 먹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려면 더 이상 감정적으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그만 두는, 그런 자세를 가지고는 언제까지나 젖을 먹는 어린아이 신앙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하기 싫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셔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감정대로라면 양쪽 뺨을 원투 스트레이트로 두들겨 주고 싶어도 성경말씀에 '왼편도 돌려대라' 하셨기 때문에 웃으면서 돌려대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홍콩 쪽에 갔다 오다가 사고가 날 뻔했습니다. 언덕길을 내려오는데 신호등은 분명히 파란 불인데 앞에 가던 차가 갑자기 서는 것입니다. 있는 대로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차가 오른편으로 갔다가 왼편으로 갔다가 한참 요동을 치더니 그래도 서지를 않습니다. 그대로 갔다가는 앞차와 충돌하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마침 옆 차선이 비어있길래 앞차를 피해서 겨우 세웠습니다. 브레이크는 꼭 ABS 브레이크가 달린 차를 쓰십시오. 그런데 옆 차의 운전사가 저보고 인상을 쓰는 것입니다. 부딪칠뻔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썬 글라스를 끼고 차에서 척 내리면 아무도 시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감히 저한테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못해 놓고는 저한테 무슨 운전을 그렇게 하느냐고 시비를 겁니다. 제가 어떻게 했겠습니까? '죄송합니다' 그리고 애교스럽게 웃었습니다. 어떻합니까?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까지 주라고 하셨는데. 그리고 집에 와서 우황청심환을 먹었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으니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각을 사용하여 연단을 받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사랑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으니 이를 악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각을 사용하여 연단을 받으려면 무엇보다도 교회 안에서 모이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히브리서 10장 24절 이하에서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같이 하지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옴을 볼 수록 더욱 그리하자' 말씀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믿는 사람들끼리 자주 어울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학생이 '나는 오늘부터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 결심하고는 PC방에 가서 앉아있어서는 안됩니다. 학교에 가서 수업시간에 착실하게 앉아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기본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내가 오늘부터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겠다' 생각했으면 교회에 열심히 나와야 합니다. 가라오케에 가서 열심히 찬송 부른다고 해서 그것으로 믿음이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나와서 서로 돌아보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 합니다.
교회를 한문으로 어떻게 씁니까? 가르칠 敎에다가 모일 會자를 씁니다. 그런데 사실은 교통할 交에다 모일 會자를 쓰는 것이 맞습니다. '모여서 교제하는 곳'이 교회의 본뜻입니다. 옛 교부들의 글을 보면 교회를 '콤뮤니어 쌍또룸' (COMUNIA SANCTORUM)이라고 했는데 영어로 번역하면 Community of Saint, 즉 성도들이 서로 교류하는 공동체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우리 믿음이 자라나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확실한 방법은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상하게 수요예배에 제직들은 안나오고 제직이 아닌 분들이 더 열심히 나옵니다. 저는 비 오는 수요일 저녁에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제직 되시는 분들은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교회에는 목사가 있고 장로가 있습니다. 그리고 권사, 안수집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직분을 주어 세우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일반 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경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이 있을 때는 목사를 찾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문제들에 대해 신앙적으로 도움이 필요할 때는 장로님들이나 권사님들, 그리고 안수집사님들을 찾아가셔야 합니다. 장로나 권사, 또 안수집사 같은 직분들은 이런 일을 위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의 선배로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어떤 어려움들이 있었고 어떻게 그것을 극복했는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직분을 주어 세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직분을 맡은 분들이 오히려 일반 성도들보다 뒤쳐져서는 안됩니다. 누가 와서 뭘 물어보면 '저두 잘 몰라유' 이렇게 겸손하면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지도자의 직분을 맡았으면 그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도록 애를 쓰셔야 합니다. 본문 12절을 다시 봅니다.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어야 될 터인데' 말씀했습니다. 적어도 직분을 맡으신 분들은 더 이상 왔다갔다하지 말고 이제는 선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뿐 아니라 요즘 한국교회의 안 좋은 특징 중의 하나가 교회 안에서 자신을 숨기는 것입니다. 무슨 어려운 일을 만나도 좀처럼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물어보면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놓아보았자 득이 되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실은 이렇게 되어서 요즘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야기하면 도와주고 감싸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소문을 내고 다닙니다. 그래서 아무도 교회에 와서 어렵다는 이야기를 안 합니다. 병원에 와서 의사가 '어떻게 오셨습니까?' 물어보면 '아니에요, 그냥 심심해서 구경 나와봤어요' 이러는 꼴입니다.
교회는 서로의 상처를 싸매 주는 곳입니다. 서로의 부족한 것을 메워주는 곳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곳입니다. 내 감정이 아니라 지각을 사용하여 서로 사랑하고 서로 감싸주고 서로를 위해 대신 짐을 지어주는 훈련을 하는 곳입니다.

또한 지각을 사용하여 연단을 받으려면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자신을 훈련시켜 나가야 합니다.
젖먹던 아이가 젖을 떼려면 상당한 고통이 따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우유 병을 빼앗고 밥을 먹으라니 아이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황당한 일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우유 병을 붙잡고 내놓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나중에 취직해서 우유 병을 싸가지고 출근할 수는 없습니다. 어른이 되려면 우유 병을 포기하고 숟가락 잡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의 믿음이 성장하려면 오늘 그 자리에 그냥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보다 높은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훈련을 하셔야 합니다. 이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들을 보면 전부 눈물을 흘립니다. 덩치는 남산만한 역도선수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면 참 볼만합니다. 왜 눈물을 흘립니까? 금메달을 따기까지 그만큼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고통의 순간들에 대한 대가가 주어진 것에 감격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모세의 이야기를 보십시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을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는 애굽의 바로가 될 수 있는 신분을 포기했습니다. 고난받는 자기 백성들을 찾아가 그들을 위해 일생을 바쳤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의 부귀와 영화가 아니라 하나님께 받을 상급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늘의 안락한 생활에 만족하지 않고 지각을 사용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이성적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연단 시켰습니다.
여러분도 오늘에 만족하지 마십시오. 그냥 그렇게 대강 살다가 인생을 끝내지 마시고 여러분의 지각을 사용하여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훌륭한 인생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옳은 길인가를 판단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이루는데 다가오는 어려움을 기쁨으로 감당해 나가셔야 합니다.
제가 제 아이들에게 가끔 하는 말이 있습니다. '너희들에게 지금 1년은 이 다음에 10년과 같다. 지금 1년을 열심히 공부하면 나중에 10년을 보람 있게 살고, 지금 3년을 열심히 공부하면 이 다음에 30년을 값지게 산다' 알겠다고 고개는 끄떡이는데 진짜로 알아듣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일단 좋은 학교를 나올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좋은 학교를 나오면 그 다음에는 3대가 우려먹습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왜정시대에 와세다를 나왔다' 이거 하나로 얼마나 폼을 잡았습니까? 3대가 자랑스럽게 살 수 있다면 그것을 위해서 3년을 투자 못할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서도 이런 지혜가 있습니다. 세상을 사는 것도 지각을 사용해서 판단을 하고 스스로를 연단 시켜 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물며 신앙생활은 어떻겠습니까? 히브리서 12장 2절을 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인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감정으로는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창조주이신 그 분이 피조물인 인간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 전혀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그냥 다 그만두고 하늘로 올라가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때 지각을 사용하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지각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각을 사용해서 십자가 뒤에 있는 즐거움을 바라보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내 감정에 따라 때로는 열심을 내었다가 때로는 식어버리는 것은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감정이 아니라 지각을 사용해야 합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 앞에 상급을 받는 일인가, 이것을 분명히 알고 그 일을 위해 싫으나 좋으나 부단히 자신을 단련시켜 나가는 것, 이것이 바른 믿음입니다. 감정이 아니라 지각을 사용하여 연단을 받아 장성한 그리스도인으로 굳게 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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