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젖먹이 신앙 (히 05:12-14)

첨부 1


저는 약 4년 전에 아프리카 선교사로 파송받아 이곳 영국에 와서 랭귀지스쿨에 다니다가 탄자니아로 들어갔습니다. 선교지에 들어가서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그곳 언어인 스와힐리어를 배우는 일이었습니다. 다행히 탄자니아에는 루터교에서 운영하는 선교사들을 위한 랭귀지스쿨이 있습니다. 다레살람에서 200km쯤 떨어진 모로고로라는 곳에 이 학교가 있는데, 모로고로에는 또 대학이 하나 있더군요. 탄자니아에 유니버시티가 둘 있는데, 하나는 다레살람에 있는 University of Dar es Salaam이고, 또 하나가 모로고로에 있는 Sokoine Agricultural University입니다. 그런데 저는 랭귀지스쿨에 다니는 동안 이 소코이네 유니버시티 채플린의 조수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채플린은 60년대에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오신 현지인 루터교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갓 선교지에 발을 디딘 저로서는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게 된 것이죠. 조수래야 기껏 한달에 두어 번씩 대학 채플에 가서 설교하는 일이었지만, 아프리카에 처음 와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또 설교를 해야 되는데 명색이 선교사가 설교를 안한다고 할 수는 없고, 아직 스와힐리어는 잘 모르니까 어차피 영어로 해야 되는데 언제 영어로 설교를 해 봤어야죠? 그래서 설교문을 영어로 써가지고 읽으면서 설교를 해야 했습니다. 영국에서도 못한 영어 훈련을 단단히 하게 되었던 것이죠. 그렇게 몇 개월을 지내면서 랭귀지스쿨을 마친 후에 저는 이링가라는 곳을 사역지로 선정하고 들어갔습니다. 그곳은 다레살람에서 500km가 넘는 산악지역의 작은 도시인데, 한국 사람이 전혀 없는 곳이었습니다. 제가 한국을 떠난 뒤로 어디를 가든지 한국사람이 있었는데, 처음으로 한국사람이 없는 곳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교회를 개척해야겠는데, 이제 막 랭귀지스쿨을 마친 상태에서 말이 제대로 통해야 무슨 일이든 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전에 랭귀지스쿨에서 조교로 일했던 청년을 가정교사로 데려와서 날마다 언어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링가에는 Street children들이 눈에 많이 띄더군요. 이 아이들이 주로 무슨 일을 하는가 하면, 사람들이 자동차를 세워놓고 일보러 가면 그 사이에 세차를 해 놓습니다. 그리고 차 주인이 돌아오면 세차비를 달라고 하는 거예요. 어쩌다가 그런 아이들 몇 명을 알게 돼서 물어보니 부모가 없는 아이들도 있고, 할머니랑 사는 아이들도 있고 그래요. 나이는 열 두세살 또래인데 학교는 문턱에도 못가본 거예요. 그래서 몇 명을 저희 집으로 오라고 해서 날마다 공부를 시켰습니다. ABC부터 시작해서 읽는 법하고 덧셈, 뺄셈 등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은 마당에서 공차고 놀게 하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우갈리를 한 그릇씩 먹여 다시 거리로 돌려 보냈습니다. 우갈리는 탄자니아 사람들의 주식입니다. 그러다 보니 저희 집이 미니 학교가 되었어요. 4개월이 지난 후에 마침내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탄자니아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복음의 불모지에 선교사가 들어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그런 곳이 아니에요. 커다란 카톨릭 cathedral이 있구요, 루터교회, 성공회 교회 건물도 웅장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물론 제가 속한 장로교회는 찾을 수가 없지만요. 어쨌든 초등학교 교실 한 칸을 빌려서 장로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매주 새로운 사람들이 나오는데 한결같이 요구하는 게 일자리를 달라는 것입니다. 줄 일자리도 없거니와 교회 나와 주는 조건으로 일자리를 줄 수도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랬더니 사람들이 안오더군요. 그 다음 예배당이 문제였습니다. 제가 '교회를 새로 시작했습니다. 한번 나오시지요' 하고 말하면 예배당은 다 지었느냐고 묻습니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입니다. 다른 교회들은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커다란 예배당을 다 지었는데 넌 뭐하느냐 이거죠. 그러니 예배당도 없는 교회를 더 안나오는거죠. 사람들 많이 안나오는 것은 둘째 문제고, 몇 사람이라도 앉아 있는데 예배를 드려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일주일 내내 하는 일이 설교를 스와힐리어로 작성하는 일입니다. 그걸 가지고 읽으면서 설교를 하는 거지요. 그렇게 1년을 이링가에서 살았는데, 갑자기 저희가 다레살람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제가 소속된 팀에서 다레살람에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저도 매 학기마다 두어 차례 가서 1주일씩 머물면서 강의를 했었습니다. 500km가 넘는 길을 다니면서 강의하는 일도 보통일이 아니었지요. 그런데 이 신학교는 선교사님들이 저처럼 다른 곳에서 사역하면서 잠깐 와서 강의하고 돌아가는 형편이고, 신학교 사역에 전담하는 교장 선교사님은 또 선교부의 장을 역임하고 있어서 너무 바쁜데다가 몇 개월씩 출타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다 보니 학교행정이 엉망일 수밖에요. 그래서 제가 신학교 사역에 전담하도록 뽑힘을 당해서 다레살람으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제가 주로 맡은 분야는 교무행정이었기 때문에 커리큘럼 조정하고, 시간표 작성해서 강사 선정하고 하는 일들을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사 과목들을 강의했습니다. 탄자니아에는 물론 다른 교회들이 많이 세워져 있고 기독교 인구도 30% 이상이 됩니다. 그런데 참 마음이 아픈 것은 그분들의 신앙이 무척 어리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래서 아직도 선교사들이 필요한지 모르겠지만, 많은 신자들이 nominal Christian이거나 기독교적인 삶의 가치관과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더군요. 한번은 예배당 부지를 구하는 문제로 시청에 갔었는데, 시청에 근무하는 아주머니가 하는 말이 자기는 둘째 부인인데 자기가 나가는 루터교회에서는 자기 아이들에게 세례를 주지 않는다는거예요. 그러면서 '당신이 새로 세운 장로교회에서는 내 아이들에게 세례를 줄 수 있느냐'고 묻더군요. 목사가 자기 부인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리는 경우도 부지기수입니다. 그러니 일반 교인들은 어떻겠어요? 그런데 아프리카 교인들만 미성숙한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닌 것 같더군요. 제가 지난 주에 덴마크에 다녀왔습니다. 더운 아프리카 몇 년 살다가 갑자가 추운 나라에를 갔더니 지금이 4월인데도 얼마나 추운지, 옷을 두껍게 껴 입어도 뼛속까지 찬바람이 들어오는 것 같더군요. 그런데 날씨만 추운 것이 아니었어요. 주일날 교회를 갔는데 한 열대여섯 명쯤이 저 뒷자리에 앉아 있고 목사님은 이상하게 생긴 가운을 입고 알아듣지 못할 덴마크 말로 예배를 인도하는데, 예배를 드리는 건지, 절간에서 염불을 하는 건지, 정말 답답할 노릇이더군요. 지난 주일이 바로 부활주일이었습니다. 이 부활절이야말로 우리 기독교의 가장 의미있는 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예수를 믿는 우리도 죽음의 권세 아래 있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부활의 종교라고 합니다. 이처럼 의미깊은 부활절을 우리가 축하하고 기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기독교 문화가 뿌리를 내린 곳에서는 이 부활절을 기념하기 위해서 공휴일로 정하게 되었겠지요? 부활절을 지키기 위해서 일도 쉬고 공부도 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형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부활절은 holiday라는 개념밖에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는지,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내가 기독교인이건 아니건, 오로지 부활절은 holiday일 뿐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이 Easter holiday를 즐기기 위해서 교인들은 교회에 나가는 대신 여행을 갑니다. 목사님도 다른 목사님에게 교회를 맡기고 휴가를 떠납니다. 이것이 소위 기독교 문화가 깊이 뿌리를 내린 나라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용어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도 주의를 해야겠지요? 이것을 보고 기독교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까? 얼마나 반기독교적인 문화입니까? 부활절이라고 떠들썩하게 외치면서 부활의 의미를 송두리째 말살시켜버리려는 사탄의 계략이 아닌가요? 탄자니아에서는 부활절이 되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옵니다. 그 사람들은 부활절이라고 해서 휴가를 가지 않거든요. 휴가를 갈 곳도 없고 휴가 갈 돈도 없고, 휴가라는 개념도 없습니다. 그런데 부활절이라고 교회에서 특별한 날이라고 하거든요. 그러니 부활절이 무슨 날인지,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났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면서도 교회로 가는거지요. 말하자면 교회로 휴가를 가는 셈입니다. 마치 저희가 어렸을 때 성탄절이면 동네 아이들이 다 교회에 나왔던 것처럼 말입니다. 참 유치하지요? 그래도 이런 경우는 좀 낫습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에 갔다가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된 경우들을 종종 볼 수 있으니까요. 작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기독교의 성장이 멈추었다고 걱정들을 많이 했습니다. 심지어 교세가 줄어드는 교단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IMF 시대에 접어들면서 다시 교인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살기가 좋고 재미있는 일들이 많으면 하나님도 잊어버리고 그저 재미있는 일에 빠지고 마는 것이 우리 인간의 속성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다가 조금 어려우면 다시 하나님을 찾고 도움을 구하는 거지요. 미성숙한 신앙의 모습들 아닙니까? 사람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나이를 먹고 성숙하게 되어 있습니다. 젖을 먹던 아기가 이유식을 먹다가 젖을 완전히 떼고는 점점 어른들과 같은 음식을 먹게 되지요. 먹는 음식이 달라졌다는 것은 그만큼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세월이 흘러간다고 성숙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더군요. 그래서 여기 히브리서 기자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말입니다. 이제 이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지가 오래 되었기 때문에 충분히 성숙한 신앙인들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만해야 할 터인데, 아직도 젖이나 먹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본적인 것을 이해하지 못해 기독교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역사에서도 미성숙한 신앙의 모습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혹독한 박해를 받다가 마침내 로마의 국교가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기독교가 박해를 당할 때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무척 성숙한 단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과 자신들의 목숨을 바꾸기까지 했었습니다. 그런데 핍박을 당하고 쫓기던 위치에서 핍박을 하고 쫓는 지배자의 위치로 바뀐 기독교는 그 수준이 형편없이 낮아지고 말았습니다. 전에는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켰었는데, 이제는 기독교 신앙이 출세하고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방종교들이 핍박을 당하고 신전들이 교회로 개조되면서 그 섬기는 신만 대치되는 현상이 생겨났습니다. 과거에 섬기던 이방신의 자리에 기독교의 하나님이 들어가 있을 뿐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이방종교의 많은 풍습과 사상이 기독교 안으로 흘러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기독교의 수준이 낮아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모든 일상생활을 지배하게 되었던 중세시대만큼 기독교가 부패하고 어두웠던 적이 없었습니다. 중세의 많은 기사들이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 때 사용하셨다고 전해지는 그 포도주 잔을 찾기 위해 모험을 떠났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그런 기독교가 아니라 전설따라 삼천리 같은 그런 기독교가 된 거지요. 시장에 가면 예수님이 잡하시기 전 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흘리셨던 피같은 땀방울을 살 수가 있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모유를 파는 가게도 있었구요. 먼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어느 특정한 성인의 유골이나 유물을 모신 성당에 가서 참배를 하고 가면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왜 이처럼 기독교의 수준이 낮아지고 신앙이 성숙한 데 이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까? 본문에서 기자는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라고 했습니다.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과 관계가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왜곡된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A를 생각하고 계시는데 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하나님은 B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A를 말하는 하나님과 B를 말하는 하나님이 같은 하나님인가요? 전혀 다른 하나님이죠. 그렇다면 B를 말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안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좀 심한 말이겠지만, 최소한 정도에 따라서 하나님을 잘못 믿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결국 이런 사람들을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성숙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오늘 말씀에서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를 말씀에 비추어 분변할 줄 안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기독교적인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교회에 출석하기 때문에 기독교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요. 오래 교회를 다녔어도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변해서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이 되어 있지 못하다면 나이많은 젖먹이 그리스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신앙생활하는 분들도 의외로 많습니다. '이제 그만하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선생이 되었겠지?' 하고 주님이 우리를 찾으시는데 '아니, 웬 우유병을 입에 문 아기야?' 이렇게 되면 좀 곤란하지 않겠어요?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이렇게 성숙하지 못한 신앙을 가진 형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을 위해서 선생도 필요하고 선교사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정작 이들을 돕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성숙한 신앙을 가져야 되지 않겠어요?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