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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민들레 홀씨 제130호: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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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호 / 2004 년 11월 28일 발행 (부정기 발행)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다/ 고후 3:12-18 김재성/ 민들레성서마을지기
고후 3:12-18

1. 벗어버리지 못하는 너울

오늘의 본문에서 바울은 모세가 자기 얼굴에 너울을 쓴 것을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출애굽기 34:29-35에 나오는 이야기다. 모세가 두 증거판을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왔을  때에 그의 얼굴이 빛났고, 사람들은 그에게로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모세는 사람들 앞에서는 수건을 쓰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그것을 벗었다고 한다. 바울은 이것을 두고, 모세가 자기 얼굴의 광채가 사라져 가는 것을 이스라엘 자손이 보지 못하게 하려고 그런 것이라고 해석을 한다. 본래 출애굽기에서는 모세가 나쁜 의도로 그렇게 했다는 의미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바울도 모세 자신을 비난하려는 의도보다는, 유대사람들의 어떤 맹점을 지적하려고 하는 의도로 이런 해석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바로 다음 구절에서 잘 나타난다.

“사실 그들의 생각은 완고해져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그들은 옛 언약의 책을 읽을 때에, 그들의 마음에서 바로 그 너울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14절).

“옛 언약의 책”은 율법서(토라)를 의미한다. 그것을 “옛 언약”, 즉 “옛 계약”이라고 하는 데서 이미 “새 계약”을 전제하고 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율법서의 참 뜻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그들의 마음에 율법주의라는 너울을 덮어 쓰고 있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본래 율법은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고 자유하게 하려는 것이었지만, 율법주의라는 너울은 사람들을 위선과 정죄에 빠지게 하여 사람들을 법 문구와 형식의 노예들이 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진실을 보지 못하게 가리고 허위 의식과 거짓된 권위를 세워서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고 그들을 노예로 만드는 것을, 바울은 “너울”이라는 은유로 표현하고 있다.

톨스토이의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는 라 보에티의 “스스로 노예이기를 원하다”라는 글이 나온다. 보에티는 자유는 모든 야생동물의 본성이라고 하면서 하물며 가장 자유로운 존재인 인간이 자유보다 굴종을 원하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동물들은 자유를 빼앗기면 이내 죽어버린다. 또 큰 동물과 작은 동물은 사람이 잡으려고 하면 부리, 발톱, 뿔 같은 온갖 무기로 저항하며, 그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자유를 소중히 하고 있는지 보여 준다. 그러다가 잡히면, 자신들이 얼마나 큰 불행을 느끼고 있는지를 생생히 표현하고, 그 뒤에도 잃어버린 자유를 계속 탄식하면서, 자신들의 노예상태에 대해 절대로 만족하는 법이 없다.”

그렇다. 동물들은 정말 야생의 상태에서 가장 아름답다. 양계장의 닭이나 돼지우리의 돼지를 보면 불쌍한 생각이 들지만, 하늘로 비상하는 청둥오리 떼, 산 속에서 우연히 만난 다람쥐나 산토끼 같은 것을 볼 때 신기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나는 어릴 때 냇가에서 피라미들을 잡아본 적이 있다. 넓고 시원한 곳을 헤엄치던 놈들이라 그런지 그것들은 좁디좁은 어항 속 환경을 견디지 못한다. 금붕어와는 달리 피라미는 금세 어항에서 뛰어나오거나 죽어버린다. 어린 생각에 그것들은 성질이 참 급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본성이 자유로운 것들이었던 것이다. 우린 어항 속의 금붕어가 예뻐서 보다가도 그것들이 갇혀 있고 주는 산소와 주는 먹이로 살아간다는 것을 보고 나서는 그들이 얼마나 답답할까 연상을 하면서 불쌍하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하지만 냇물을 거슬러 힘차게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피라미들을 보면 나도 힘이 생기고 생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낙산교회 04.11.28 주일예배 설교)

야생 속에서 자유롭게 사는 동물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우리에게 이런 기쁨을 준다. 그것은 자유 때문이다. 인간은 본래 자유로운 존재이고 자유를 갈망하기 때문에 자유를 누리는 자연, 동물을 보아도 아름답고 기쁜 마음이 드는 것이다.

보에티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보다 저급한 동물조차 마지못해 하면서 가까스로 길들여지고 있는데, 원래 자유롭게 살기 위해 태어난 인간이 그 본성을 완전히 바꾸어, 자유에 대한 추억도 그것을 되찾고자 하는 욕구도 다 잃어버렸다는 건 얼마나 괴이한 얘기인가!”

그러면서 실례로 전제군주들이 백성들을 어떻게 길들이는가를 보여준다.

“아시리아의 역대 왕과 그 뒤 메디아의 왕들은, 민중이 자신들을 이상하고 거대한 인물로 상상하고 영원히 그 망상에서 깨어나지 않도록, 가능한 한 민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볼 수 없는 것을 과장되게 생각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아시리아 왕정 하의 민중은 그 비밀 덕택에 노예제도에 길들여졌고, 군주를 아는 자가 적으면 적을수록 스스로 노예가 되어갔던 것이다. 또 때로는 원래 왕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채,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왕의 존재를 믿고 그것을 두려워했다. 이집트의 초기 왕들은, 민중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는 반드시, 나뭇가지를 들고, 또는 머리에 불을 얹고 가면을 쓰고 나가서, 민중에게 외경심을 불어넣으려 했다.”

이러한 속임수는 참 우습기도 하고 허술해 보이기도 하지만, 아무리 허술한 함정에도 민중들은 걸려드는 법이라고 한다. 전제군주로서는 그들을 속으로 비웃고 있을 때가 가장 그들을 속이기 쉽고, 가장 지배하기 쉬운 때라고 한다. 그러니 전제 군주들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복종과 노예적인 봉사뿐만 아니라, 언제나 자신을 신으로 숭배하도록 민중을 길들였다는 것이다.

바울이 모세가 얼굴에 너울을 쓴 것을 비판하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위험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예언자요 지도자라 할지라도, 그 얼굴에 너울을 씌워서 뭔가를 은폐하고, 그리하여 백성들에게 거짓 권위를 세우고, 그들에게 두려움을 주고, 그들을 노예화한다면, 그 너울은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아무리 훌륭한 율법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읽는 사람의 마음에 너울이 덮여서, 그것이 사람들을 억압하고 노예로 만드는 도구로 변질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먼저 그 마음의 너울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 너울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만 비로소 제거될 수 있다고 한다(14b).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해당이 된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군사 독재를 하는 사람들이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 그들은 총칼로 정권을 탈취했고 늘 경제발전과 정의사회 구현을 구호로 내세웠기 때문에 그들의 본 모습은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아무도 그들의 참 모습을 알지 못하면서, 그저 두려워하고 그 권세에 복종하고 또 아부하기도 하였다. 최근에 와서,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그 너울들이 하나씩 벗겨지고 있다. 국민들 위에 절대 권력자로 군림했던 독재자들의 한없이 초라한 모습들이 하나씩 드러나고 있다. 그들은 애국자도 영웅도 아니었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폭력을 쓰는 자들이요 재물욕과 탐욕에 찌든 기회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이 수의를 입고 재판을 받을 때, 이미 그들을 가렸던 너울은 제거되었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너울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물러나도 그들이 이미 길들여놓은 국민들은 그 너울이 없이 사는 것이 불편한 것이다. 이미 그들은 그 너울에 길들여져 있는 것이다. 전에는 유신독재니 군부독재니 하는 것들이 이 나라의 민주화를 막는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것이 물러난 지금에는, 그런 것에 길들여진 이른바 수구 보수 세력들이 민주화를 원치 않고 막으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지난 주 목요일에 우리 교회를 세우신 운산 김관석 목사님을 추모하는 강연회가 KNCC에서 있었다. 우리교회에서는 나 외에 오재식, 노옥신, 강문규 교우가 참석했다.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운산’(雲山)이라는 호를 풀이하면서, 산이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있는 것 같이, 김관석 목사님은 앞에 나서지 않는 것 같아도 실질적으로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의 판을 짜고 주도하였다고 회고하였다.

이렇게 70-80년대에는 KNCC를 비롯하여 크리스천들은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의 선봉에 섰지만, 지금은 KNCC도 보수교단들이 가입하면서 이전과는 달라졌고, 사회 문제에 대해서 분명한 견해도 말하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요즘은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의 보수 세력의 대변자들이 된 것 같이 보인다. 보에티가, 사람들이 노예생활에 습관이 되면 왕의 존재를 확인하지도 않고 그저 두려워한다고 말한 것처럼, 이제 너울을 쓰고 국민을 억압하던 존재들이 사라졌는데도, 크리스천들은 이전의 그 너울이 더 오래 있어주기를 바라고 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너울에 익숙해진 것이다.

2.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것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그들의 마음에 너울이 덮여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주께로 돌이키면, 그 너울은 벗겨집니다.’”(15-16절)

여기서 14절 말씀이 한번 더 반복이 되고 있다. ‘오늘날까지도’를 강조한 것은 모세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즉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라는 의미다. 아무리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어왔어도, 그 너울이 벗어지지 않았고, 그래서 소용이 없었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해오고, 전통적으로 해오고, 습관적으로 해온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보에티는 사람들이 노예가 되는 원인에 대해서 몇 가지를 든다. 첫째는 습관이다.
아무리 혈통이 뛰어난 말이라 해도 처음에는 재갈을 물어뜯지만 나중에는 그것을 가지고 놀게 되고, 처음에는 멍에를 지는 것을 거부하며 소란을 피우지만, 마지막에는 사뭇 자랑스러운 듯이 마구를 달고 유유히 걸어가게 되는, 그 습관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은 항상 국왕의 신민으로서 그에게 복종해 왔고, 자신들의 조상도 그랬기 때문에, 자신들은 당연히 지금의 노예상태에 만족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자신들에게 폭압을 가하는 군주의 권력을, 그것이 긴 역사를 가졌다는 이유로 억지로 정당한 것으로 믿으려 한다.

유대사람들은 오랫동안 해오던 대로 습관대로 하는 것만 생각했지 그것을 새롭게 읽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이 주께로 돌이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우리를 덮고 있고 너울, 고정관념, 나쁜 습관은 우리가 주께로 돌아서는 행동이 없이는 벗겨지지 않고 고쳐지지 않는다.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이미 고정 관념이 지배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한국 크리스천들이 성경을 많이 읽지 않아서 저렇게 수구 보수 세력이 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성경을 많이 읽는다. 하지만 이미 고정관념과 교육받은 것이 너울로 덮여 있어서 성경의 의미를 곡해하고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서 결국은 자기들의 아집과 독선을 뒷받침하는 데 써먹고 있다. 그들이 주께로 돌아서지 않는 한, 성령의 도우심으로 새롭게 깨닫지 않는 한 그 너울은 걷히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습관의 노예가 될 수 있다. 남의 이야기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자신을 돌아보아야겠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우리 마음을 덮고 있는 너울은 없는지, 나도 모르게 습관이 되어서 나를 얽어매고 있는 것은 없는지, 나도 모르게 중독이 되어 정신을 못 차리게 하는 것은 없는지, 돌아보아야겠다. 그것이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 성경과 상관없는 사람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술 중독도 무섭고 담배 중독도 무섭지만, 더 무서운 것은 이렇게 습관과 인습을 따라서 내가 오랫동안 해 온 경험을 따라서 고정 관념을 갖고서 마음에 너울을 덮고서 성경을 보는 것이다. 성경은 입으로 읽고 마음으로는 이미 정해진 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로 돌아서지 않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않고는 이 너울이 걷히지 않는다.

보에티가 말하는 노예가 되는 둘째 원인은 쾌락이다. 그는 키루스가 리디아인의 수도 리디아를 점령한 일을 예로 든다. 그는 그 아름다운 도시를 파괴하고 싶지 않았고 오랫동안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생각해냈다. 즉, 그 도시에 술집과 유곽, 극장 같은 유흥시설을 만들고, 주민들에게 그것을 이용하라는 포고령을 내린 것이다. 이 방법은 매우 효과적이어서, 그 뒤 그는 리디아인과 전쟁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이 가엾은 민족은 거기서 다양한 오락을 만들어내어 그 즐거움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래서 로마인은 리디아인의 이름에서 따온 ‘ludi’라는 말을 ‘소일’(消日)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작은 새가 그물에 걸리는 것보다, 물고기가 낚시 바늘에 걸리는 것보다, 가느다란 깃털로 입술에 살짝 기름을 발라주기만(가려운 곳을 살짝 긁어주기만) 해도 일반민중이 이내 노예로 전락하는 것이 훨씬 더 쉽다. 연극과 흥행물, 광대, 격투기, 진기한 동물, 그림, 그밖에 이와 비슷한 온갖 어리석은 것들이, 옛날 사람들에게 노예제도에 대한 함정이 되고, 자유에 대한 보상이 되며, 전제정치를 유지하는 무기가 되었다. 이것이 옛날의 전제군주들이 민중을 그 멍에 아래 잠재우기 위해 이용했던 농간이라고 한다.

바울은 이미 로마가 식민지에 건설한 화려한 로마식 도시들이 쾌락을 도구로 하여 이런 우민화 정책을 쓰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고린도이다.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창녀들에게 드나들었고, 성적으로 문란한 것으로 유명하다. 바울은 성도로서 그런 방종에 빠지는 자는 교회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강경한 입장을 취하였다. 그것은 그가 성 문제에 보수 입장을 취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사람들을 실질적으로 노예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말할 때는 항상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고 하면서, 죄와 정욕에 종노릇하지 말라고 거듭 강조하는 것이다(롬 6장, 갈 5:1, 13).

3.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습니다”(17절).

그러므로 바울은 주의 영, 즉 성령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다고 한다. 우리가 성령 안에 머물지 않고 자유함을 누릴 수 없다. 로마가 식민지에 이식한 문화가 그 주민을 노예로 만드는 문화였듯이, 미국이 오늘날 한국을 비롯하여 그들이 군대를 주둔시키는 나라에 이식하는 문화는 쾌락주의 물질주의에 빠진 저질 문화요 우리를 종으로 만드는 노예 문화이다. 그것은 우리를 상품을 소비하는 노예, 그들의 노래와 영화에 열광하는 문화적 노예로 만든다. 그런 문화는,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우리 마음과 눈에 너울을 씌워버린다.

오늘 이 세상 문화는 우리가 성령 안에 머물게 놔두지 않는다. 타락 문화, 물질문화, 나쁜 습관들이 온갖 너울들이 되어서 우리를 가리고 그리스도의 영 안에 있지 못하게 한다. TV를 보아도 자녀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아도, 우리가 즐거워하고 웃는 것을 보아도, 주의 영 안에서 하는 것보다는 늘 이 세상이 주는 즐거움에 습관이 되어 웃는 것일 뿐이다. 그러는 한 우리는 늘 쾌락의 노예, 습관의 노예, 물질문화의 노예가 될 뿐이다.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다.

어젯밤에도 교회 일을 마치고 전철역으로 가는데 수많은 대학생들이 모여서 연극을 보려고 줄을 선 것을 보았다. 과연 저들을 저렇게 모이게 하고 열광하게 하는 게 무엇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으로 우리 교회가 그들의 문화를 연구하고 함께 호흡해야 할 과제가 있다.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오늘 이 사회에서 누리는 문화는 그다지 건강하지도 않고 그들을 자유롭게 하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오직 그들에게 씌워진 너울을 벗기고 그들을 온전히 자유하게 할 수 있는 분은 영이신 주, 성령뿐이다.

집의 아이가 매트릭스에 빠져서 1, 2, 3편을 다 보고 제작 과정까지 보는 걸 보았다. 나도 옆에서 보니 재미있어서 한참 같이 보았다. 하지만 조금 뒤로 물러서서 보면 현란하기는 해도 내용은 별 것 아닌 이것저것을 짬뽕한 것에 불과하다. 불교의 정신주의와 이집트 부활 신화, 중국의 쿵푸와 일본의 사무라이 검법, 컴퓨터 그래픽과 약간의 상상력 그리고 엄청난 자본의 결합체일 뿐이다. 그게 우리 자녀들을 매혹시키고 있다. 그게 별 것 아니란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막강한 자본의 힘과 현란함에 밀려서 막지 못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아이들이 교회에서는 자유로움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매트릭스 같은 액션물을 보면서는 자유를 느낀다고 한다. 물론 그 자유가 일시적인 스트레스 해소의 쾌감이나 콜라 같은 것임을 안다. 하지만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다면, 그들이 진정으로 열광할 수 있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을 교회가 줄 수 있어야겠다. 우리 교회에 청년들이 모여들고 그들이 성령을 충만히 받고 성령 안에서 누리는 진정한 자유를 맛볼 때, 진정한 기독교 문화도 꽃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비전을 가지고 우리 공동체를 더욱 튼튼히 만들어 나가야겠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 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께서 하시는 일입니다”(18절).

바울도 신자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모두가 마음을 덮고 있는 너울을 벗어버리고,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고 더 큰 영광에 이르는 비전이다. 이것이 바로 영이신 주,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세상이 씌운 너울, 우리 스스로 마음에 쓰고 있는 너울을 힘차게 걷어치우기를 바란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다고 하였으니, 여러분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진정한 자유를 누리시기 바란다.
그리하여 우리를 얽어매는 온갖 올무들과 나쁜 습관과 쾌락의 함정으로부터 해방되어,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마침내 더 큰 영광에 이르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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