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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지리산 편지]‘쉽게 즐겁게 깊게 변하게’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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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16

나는 목사로써 직책이 직책인 만큼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기회가 많다. 일주일에도 수차례씩 설교, 강의 혹은 성경 공부 등을 해야 한다. 어떤 경우이든 내가 사람들 앞에서 말하게 될 때는 다음의 네 가지 기준이 있다. ‘①쉽게 ②즐겁게 ③깊게 ④변화되게’이다.

첫째번의 ‘쉽게’부터 살펴보자. 나는 신학교 재학중이였던 때에 빈민촌에 들어가 빈민들의 친구가 되겠노라고 선포하고는 빈민들을 위한 사역에 열중하였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신도들 앞에 서면 꼭 실천하려고 애쓰는 한 가지 원칙이 있다. 다름 아니라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하겠노라는 노력이다.

처음 사역을 시작하였던 때에 반년 가까이 제일 힘들었다. 왜냐하면 내가 설교하는 때에는 교인들이 아예 자버리는 것이었다. 보다 못해 어느 주일 낮에 내가 교인들을 다음과 같이 나무랐다.
“여러분! 예배당이 여관방입니까? 호텔입니까? 왜 예배당에만 오면 조는 것입니까?”
나의 이런 질책(?)을 한 할머니가 답하였다. 앞자리에 앉아 졸고 있었던 그 할머니가 답하기를 “우릴 밤 낮 존다고 나무라는 것 같은데 젊은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곤란다구요”하고 말했다.  

내가 30세 나이에 청계천 빈민촌에 들어가 예배시간마다 졸고 있는 교인들을 나무랐더니 졸고 있던 할머니의 또 다른 말은
“자기가 우릴 재우면서 우리가 존다고 나무라는건 경우가 없는 짓이야요”였다.
나는 할머니의 그런 말에 어안이 벙벙하여 물었다.
“할머니 그기 뭔 말인가요? 내가 자장가를 불렀어요 왜 재운다고 하는기야요?”
내말에 할머니는 오히려 내가 딱하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차며 다음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그럼 재우잖구요. 설교라고 할 때마다 도대체 먼 소릴 하는지 우리가 알아들 수가 있어야지요. 우리가 알아들을 소리를 해야지 무슨 소린지도 모를 소리는 혼자 해놓고서 우리더러 존다고 나무라면 그기 경우없는 짓이 아니야요?”

나는 할머니의 그런 말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날 밤에 나 혼자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할머니의 말이 열 번 옳은 말이었다. 대학에서 철학 공부하였답시고 껌팔이 하고 넝마주이하고 손수레에 채소 장사하여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칸트니, 하이데거니 하는 소리를 하였으니 그들이 졸지 않고 어쩌겠는가.
나는 자신의 처사가 옳지 않음을 절실히 깨닫고 그 다음부터는 빈민촌 주민이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에서 설교하려고 애쓰게 되었다. 그러기를 몇 해를 하고 나니 이제는 쉽게 하는 것이 아예 체질이 되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바닥사람만이 아니라 배운 사람들도 무조건 쉬운 말로 하는 설교를 좋아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쉽게 설교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내가 설교 할 때나 강연 할 때에 그리고 성경공부를 인도 할 때에 늘 염두해 두고 적용하고 있는 네 가지 원칙으로 ‘쉽게, 즐겁게, 깊게, 변화되게’임은 이미 소개한 바 있다.
‘쉽게’는 이미 소개하였으니 오늘은 ‘즐겁게’에 대하여 살펴보자.
다산 정약용 선생이 이르기를 “정치와 행정의 핵심은 백성들로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정치나 행정이 그러하다면 종교는 더 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백성들로 즐겁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 종교의 본질에 속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동양에서는 종교의 본질을 두 가지로 내세웠다.
첫 째가 안심입명(安心立命)이요, 둘째가 경세제민(經世濟民)이다
첫 번째의 안심입명이란 것은 백성들의 마음에 평안을 얻게 하고 자신이 감당하여 할 사명을 깨닫게 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래서 나는 설교 할 때면 늘 염두에 두는 것이 설교를 듣는 교인 내지 청중이 즐겁게 들을 수 있게 하는 데에 신경을 쓴다. 그런데 설교를 듣는 분들이 즐거운 시간이 되려면 먼저 나 자신이 즐거운 마음이 되어야 하고 설교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설교하는 것이 즐겁다.

설교를 준비 할 때부터 설교를 마칠 때까지의 전 과정이 나에게는 즐거움이다.
이런 마음가짐을 더 넓혀 나의 목회관(牧會觀)자체에 까지 연결된다. 나의 목회관을 쉽게 줄여서 말하자면 “예수 믿어 행복하자”는 목표이다. 나중에 천국에 가서 행복하여 지는 당연한 것이거니와 천국 가기 전 이 땅에 사는 때부터 예수로 인하여 행복하여 지자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설교 듣는 시간부터 행복한 시간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설교를 즐거운 마음으로 하고 듣는 교인들 역시 즐거움을 누리게 하는데 관심을 쏟는다.  
  
내가 신약성경 중에서 특히 좋아하는 구절이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께서 베드로를 부르시던 부분이다. 베드로의 본래 이름은 시몬이었다. 베드로란 이름은 예수께서 부쳐 주신 이름이다.

요한복음 1장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께서 베드로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이르시기를 “네가 지금까지는 시몬으로 살아왔지만 장래에는 베드로로 살 것이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로 인하여 시몬이 바뀌어 예수님의 제자중의 제자인 베드로가 되었다.
누가복음 5장에서 보면 베드로가 되기 전 시몬이었던 시절에 그는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고 살아가던 어부였다. 어느 날 밤 시몬이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고기를 전혀 잡지 못하고 아침녘에 빈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을 때다.
그때 예수께서 오시어 시몬의 배를 빌려 그 배에 서시고는 호숫가에 모여든 청중을 향하여 설교를 하신 후 시몬에게 말씀하시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시오”
물론 이때에 ‘깊은 데로’란 말은 그물을 깊은 데로 던져 깊은 곳에 있는 고기를 잡으라는 말이지만 나는 이 말을 폭 넓게 해석하여 “삶의 그물을 깊은 데로 던지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신앙의 세계는 깊이의 세계이다. 한국교회가 요즘 세인들로 하여금 빈축을 사게 되는 점 중 하나는 깊이의 차원이 결여되고 있는 탓이 크다. 설교든 강연이든 영혼의 깊은 곳에 울려 반응을 일으키게 되는 깊이의 차원이 없다면 그 설교나 강연은 부질없는 소리로 머무르고 말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설교 할 때에 어떻게 깊이 있는 내용을 전달 할 것인가에 마음을 쏟곤 한다.  
  
설교의 마지막 목표는 무엇인가? 변화이다. 인간의 변화이다.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바대로는 예수님이 베푼 첫 이적이 요한복음 2장의 가나마을 혼인 잔칫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기적이다.

이 기적에 담겨진 상징적인 의미가 깊다. 먼저 초상집이 아닌 잔칫집에서 베풀어진 기적이란 점에서다. 예수께서 첫 기적을 잔칫집에서 베풀었다는 것은 교회가 잔칫집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교회라는 잔칫집에서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신부는 교회이면서 교회 안의 교인들이다.
교회를 상징할 수 있는 잔칫집에서 베풀어진 이적이 물을 포도주로 만들었다는 것은 인간의 변화를 상징한다. 물은 시간이 지날수록 썩는다. 그러나 포도주는 세월이 지날수록 값어치가 나간다. 말하자면 물과 같이 세월이 지나면서 쇠약해지고 부패되는 인간을 변화시켜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값진 인간으로 되는 것 곧 사람이 변화되는 것을 상징한다.

나는 설교할 때마다 생각한다. “이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마음에 변화를 일으킬 수가 있느냐”에 대한 질문이다. 그리고 “나의 설교를 듣는이들이 변화되려면 먼저 설교하는 나 자신이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설교하면서 적용하는 네 가지 원칙이 ‘쉽게, 즐겁게, 깊게, 그리고 변화되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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