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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지리산 편지] 내가 본 받고 싶은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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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29

옛날에 살았던 위인이든 지금 살아 있는 인물이든 간에 어떤 인물의 인격과 사상, 삶의 모습과 비전을 존경하며 따르며 본받고 싶어 할 때에 누구누구를 아이덴티파이(Identify)한다고 표현한다. 기업에서 쓰는 말로 다르게 표현하자면 벤치마킹(Benchmarking)한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물론 나는 크리스천으로서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가기를 원하는 바이지만 이 경우는 신앙의 대상이기에 다른 인물을 본받고자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아이덴티파이하는 인물로 다섯 분이 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지자 한 분과 우리 역사에 나오는 세 분, 그리고 일본 역사에 나오는 한 분을 합하여 다섯이다.

성경의 인물로는 이스라엘의 첫 선지자 사무엘이요, 우리 역사에 나오는 인물들로는 신라의 원효 큰스님과 조선조의 다산 정약용 선생과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 그리고 일본의 인물로는 명치유신을 성공시킨 사카모도 료마(坂本龍馬, 1835∼1867)이다.

그러면 내가 왜 이들을 본받고자 하는지를 간략히 적어 보겠다. 요즈음 자녀들을 기르는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이 본받을 만한 위인들을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자주 듣게 된다. 그런 부탁에 대한 대답의 하나로 내가 본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소개하는 것도 좋을 듯하여 이를 소개하려 한다.  

내가 본받기를 원하는 인물의 첫 번째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지자 사무엘이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역사의 암흑기였던 사사시대 말기에 등장하여 왕정시대를 열었던 인물이다. 말하자면 역사의 과도기를 살아가며 새로운 시대를 열어 나가는 일에 창조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던 인물이다.

내가 그를 본 받기를 원하는 것은 네 가지 점에서다.

첫째는 그는 성직자로서 평생을 깨끗하게, 투명하게 살았던 점에서다.

둘째는 그가 당대에 전국민적인 신뢰와 지지를 받는 위치에 있게 되면서 수차례 백성들이 그에게 왕이 되어주기를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한길같이 성직자로서의 자신의 자리를 지켰던 점에서다. 그는 사울왕과 다윗왕, 두 번에 걸쳐 왕을 세우는 킹메이커(King-Maker)의 역할을 수행하였지 자신은 왕의 자리에 나가려 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는 사무엘처럼 끝까지 나는 성직자의 위치를 지키리라 다짐하고 있다.

셋째는 그가 노후에, 곧 현역에서 은퇴한 후에 오히려 큰일을 성취하였던 점에서다. 고향인 라마에 훈련공동체인 ‘라마 -나욧’을 세우고 뜻있는 젊은이들을 모아 낮에는 노동하고 밤에는 비전을 나누며 민족의 진로를 함께 모색하였다. 다음 세대를 위한 젊은이들을 기른 점에서 나는 사무엘을 닮고 싶다.

넷째는 그가 민족의 위기를 맞을 때마다 몸을 아끼지 아니하고 앞장서서 국난(國難)을 극복해 나간 한 점에서 그를 본 받기를 원한다.

원효 큰 스님은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지 100년 만에 배출된 인물이다. 한국의 개신교와 비유하여 말하자면 꼭 이즈음에 해당되는 인물이다. 나는 한국교회의 성직자의 한 사람으로써 스스로 부끄럽게, 안타깝게 여기고 있는 부분이 있다. 한국 개신교 100년사에 원효에 걸맞는 그런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지 못한 점에서다.

나는 4가지 점에서 원효 큰 스님을 높이 평가하고 또 그런 점에서 닮기를 원하고 있다.

첫째는 그는 당시의 불교가 귀족들과 학자들 사이에서 귀족불교로 머물러 있었던 때에 그가 등장하여 민중 불교로 전향시켰던 점에서다. 어느 시대의 어느 종교이든 민중들의 삶에 희망을 주는 구원의 종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여야 한다. 그런 점에서 원효 큰스님은 당시의 불교를 민중불교로 체질을 변혁시킨 공로자였다.

둘째는 그가 소승 불교를 대승불교 내지 호국불교(護國佛敎)로 변형시킨 점에서 그를 본 받고 싶다. 지금 한국의 기독교도 다분히 개인구원 내지 내세신앙에 머물러 있는 감이 짙다. 이런 때에 역사구원과 현실타파의 역할을 감당하는 기독교 본래의 역할을 감당함에 원효가 본보기가 되어질 수 있다.

셋째는 당대의 불교가 숱한 종파로 분열되어진 종파불교(宗派佛敎)를 하나로 통합하는 운동에 계기를 마련하여 준 점에서다. 지금 한국개신교는 지나치게 분파되어 있다. 이런 때에 원효가 당대에 행하였던 역할처럼 이 시대에도 그런 역할이 필요하다.

끝으로 원효는 사찰 울타리 안에 머물지 않고 세속으로 들어가 서민대중들과 애환을 함께 나누었다. 심지어 파계승으로 손가락질 받는 것까지 무릅쓰고 그렇게 실행하였다.
이 시대 한국 기독교계도 그런 과감한 자기관리, 내지 개혁성이 필요한 때다.

이런 점들에서 나는 원효 큰 스님을 본 받기를 원하고 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선생은 내가 본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인물들 중에 세 번째 분이다. 몇 년 전에 내가 일본 동경을 방문하였을 때다. 동경대학교의 교수 한 분이 “만일에 200년 전에 조선 왕조가 다산 정약용 선생을 영의정으로 세워 그가 경륜을 펼치게 하였더라면 일본이 조선의 종이 되었을 것이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

다산 선생은 국내에서보다 해외에서 더 높이 평가 받고 있는 경륜가가 아닐까 싶다. 듣기로는 월남의 민족주의자요, 공산주의자였던 호치민이 지하에서 투쟁하던 시절에 쫓기는 길이 아무리 급하여도 다산 선생의 저서 『목민심서(牧民心書)』 보따리만큼은 꼭 들고 다녔다고 한다. 지금도 하노이 시에 있는 호치민의 유품을 전시한 방에는 조선의 다산 정약용 『목민심서』 전권이 보퉁이에 싸인 채로 보관되어 있다. 호지명이 투쟁하던 시절에 들고 다녔던 보퉁이요, 월맹의 대통령이 된 후에는 그의 집무실 책상 위에 두고 수시로 읽곤 하였다는 설명서가 붙은 채로다.

다산 사상 내지 다산 정신의 요체는 ‘목민 사상(牧民思想)’이다. 그는 정치나 행정의 최종 목표 내지 최고 가치를 백성들을 평안하게 돌보는 목민 정신의 실천에 두었다.
시대는 바뀌어도 그의 이런 정신과 사상은 변하지 않고 날로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수령이 백성을 위해 있는 것인가, 백성이 수령을 위해 태어난 것인가? 백성이 곡식, 옷감을 내어 그 수령을 섬기고, 백성이 가마, 말, 말먹이, 하인을 내어 그 수령을 보내고 맞으며, 백성이 그 고혈과 뇌수를 짜내어 그 수령을 살찌우니, 백성이 수령을 위해서 태어난 것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수령이 백성을 위해 있는 것이다.” -다산의 원목(原牧) 중에서-

다산은 왕권을 신성불가침으로 여겼던 당시의 봉건사회에서 과감히 군주제를 부정하고 민주제를 제창하였던 인물이다. 이런 주장은 당대의 실학자들 사이에서도 독창적인 생각이었다. 나는 다산의 이러한 독창적인 자기주장을 존경하여 마지않는다. 그리고 다산이 훌륭하였던 것은 그의 합리적인 사고방식 때문이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중국과 서양의 선진 사상과 과학, 기술을 연구하여 자연과학 전반에 걸친 넓은 지식을 쌓았다. 그리고 이런 과학 기술을 백성들의 복리를 증진시킴에 활용코자 힘썼다. 예를 들어 그가 수원성(水源城) 건축의 책임을 맡았을 때에 몸소 거중기를 고안, 제조하여 4만 냥의 자금을 절약하였다. 그리고 박제가와 함께 종두법에 대한 연구와 실험을 하기도 하였다.

다른 선각자들에 비하여 이런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을 가졌던 정약용이야말로 오늘날에도 반드시 본받아야 할 인물이 아니겠는가!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하거든 먼저 그대가 건전한 인격이 되라. 중생의 질고를 어여삐 여기거든 그대가 먼저 의사가 되라. 의사까지 못 되더라도 그대의 병부터 고쳐서 건전한 사람이 되라.”

도산 선생은 자아 혁신(自我革新)을 거듭거듭 강조하였다. 그는 사람을 일컬어 ‘개조하는 동물’이라 하면서 민족 개조에 대하여 일관되게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민족 개조는 우선 자아 개조(自我改造)를 통하여 실현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진정한 민족 향상은 우선 지도자층 각인의 자기 개조가 아니고는 달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도산은 한 민족과 국가가 자주독립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을 도덕성을 갖춘 국민의 힘이라 지적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국민의 힘은 국민 각자의 ‘건전한 인격’과 그런 인격을 갖춘 국민들의 ‘신성한 단결’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라 하여 ‘건전 인격’과 ‘신성한 단결’을 이루어 내는 일에 삶을 투자하였다. 오늘에 와서 이러한 도산 선생의 생각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함을 느끼게 된다.

이 나라를 이끌고 있는 지도자들이 자아 혁신 내지 자아 개조를 통한 건전 인격을 갖추지를 못하고 그런 인격을 바탕으로 하는 동지적 결속을 이루어 내지 못하고 있기에 그로 인하여 온갖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 어느 때보다 도산을 본받고 싶어진다.

요즘 일본인들에게 일본의 역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고르라 하면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를 뽑는다. 그는 1835년 하급 무사의 가정에서 태어나 19세 때에 무술 수업 차 에도에 올라갔다가 미국의 페리가 이끌고 온 4척의 구로후네(黑船)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 후에 소위 운동권 지사들과 교류를 맺으며 일본의 근대화 운동에 헌신케 되었다. 그의 공헌으로 인하여 메이지 유신이 무혈혁명으로 성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메이지 유신 성공을 코앞에 두고 자객의 칼에 맞아 암살되었다. 그가 죽을 때의 나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을 때 나이와 같은 33세였다. 비록 33년의 짧은 삶이었지만 그는 일본의 100년 기초를 닦은 업적을 쌓았다. 그가 활약하던 시기의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운 막부 정권이 250여 년을 지탱한 이래 속으로 곪아 있었다. 요즘 말로 수구 꼴통 세력이 되어 국가가 새로워지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들과는 달리 천황을 중심으로 새 일본을 건설하겠다는 뜻을 품은 신진 세력들이 체제 전복에 도전하고 있었다. 이런 시대에 사카모토 료마는 새 일본 건설에의 뜻을 품고 자신의 삶을 헌신하였다.

그가 일본 역사에 최고의 인물로 존경을 받는 이유는 자신의 영달을 도모함이 없이 오로지 일본의 영광만을 위해 몸을 던진 그의 헌신과 미래 일본에 대한 상상력이 넘치는 경륜 덕분이었다. 지금 이 나라에 그와 같은 인물이 꼭 필요한 때라 여겨진다.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가 위대하였던 점은 그가 죽음을 앞둔 얼마 전의 사건에서 드러난다.
당시의 일본은 글자 그대로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하여 있었던 때였다. 250년에 걸쳐 일본을 지배하였던 수구세력으로서의 막부(幕府)측과 신일본을 건설하겠다는 포부를 품은 개혁 혁명 세력간에 갈등과 다툼이 최고조에 올라 전쟁 아니고는 해결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피비릿내 나는 내전을 눈앞에 둔 때였다. 이런 때에 개혁 세력측에 속하였던 33세의 청년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는 스스로 생명의 안위를 무릅쓰고 수구세력의 실권자를 찾아갔다. 그와 독대를 한 자리에서 료마는 이치와 현실을 낱낱이 따지며 설득하기 시작하였다.

당신네 수구파도 나와 같은 개혁파도 함께 원하는 공통점이 있지 않느냐? 그 공통점을 통하여 하나로 뭉치자. 새로운 일본건설에의 비전이다. 이를 마다하고 서로 싸우게 되면 서구제국주의자들의 밥이 되기 마련이 아니겠는가? 지금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양편에 무기를 대주며 싸움을 부추기고 있지 않는가? 우리가 서로 싸워 힘이 약하여졌을 때 저들이 우리를 삼킬 것이다. 그러니 당신네 수구세력이 권력을 우리들에게 양도하라. 그러면 우리측에서 당신네측에 일체의 보복없이 하겠다. 그래서 평화혁명을 이루자고 설득했다.

이렇게 성공한 것이 무혈혁명으로서의 명치유신(明治維新)이다.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가 수구 세력의 실권자와 담판을 지어 무혈혁명으로서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 성공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에 개혁 세력의 동지들이 한자리에 모여 새롭게 시작될 유신 정부의 각료들을 정하는 조각을 위한 모임이 열리게 되었을 때다.

당연히 개혁 세력 안에도 여러 유파가 있기 마련이어서 서로가 유력한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욕심들을 내었기에 수 시간 동안 논의를 하였으나 결론이 나지 못하였다. 이에 사카모토 료마가 좌중을 향하여 요청하였다. “우리가 이럴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모여 차 한 잔 나누고 있을 동안에 내가 다락에 올라가 조각의 윤곽을 잡아 올 테니 그 초안을 가지고 다시 논의하자.”라고 제안하였다. 이에 좌중 모두가 동의하였다. 그래서 모두가 차를 나누며 환담을 하는 동안 료마는 다락방에 올라가 긴 시간 장고 끝에 조각 명단을 짜서 내려왔다. 일동이 그 명단을 보고 놀란 것이 정작 유신 성공의 최고 공신인 료마 자신의 이름은 없었다. 각 파벌별로 골고루 배정을 하면서 자신은 아무 자리에도 없었다.

모두들 왜 자신을 뺐느냐고 물은즉 “나는 동지들께 국정을 맡기고 전함들을 모아 상선대를 만들어 세계 무역에 나서겠다.”라고 답하였다. 이런 부분이 사카모토 료마의 위대한 점이다.
사심 없는 봉사 정신, 전체를 위해 자신을 버리는 마음가짐, 오늘의 한국에 꼭 있어야 할 마음가짐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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