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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한의 성령세례(4) (요 1: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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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성령세례(4) (요 1:19-51)


성령강림주일 이후로 계속해서 성령세례에 대하여 강론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주님께서 받으신 성령세례가 그 모범이기에 4복음서를 따라 성령세례가 무엇이며, 어떤 일을 하게 하는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요한복음이 말씀하는 성령세례에 대하여 강론하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공관복음서의 내용들을 살펴볼 때마다 각 책이 그 주제에 맞게 특징들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 살펴볼 요한복음 역시 공관복음서와 아주 다른 특징들을 갖고 있습니다. 성령이 감동한 저자들이 기록한 대로 우리는 해석할 수 밖에 없으니, 그 책의 주제와 특성에 맞게 성령세례를 이해하고, 그 성령세례를 따라 우리의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하다 하겠습니다. 

성경이 언약서이기 때문에 그 언약을 푸는 것이며, 우리는 언약 외에 그 어떤 것도 미루어 생각할 권위가 없으니, 다만 성경을 풀어 해석하여 말씀을 전하는 수 밖에는 없습니다.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은 20:31절에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어 생명을 얻게 하려고 이 요한복음을 썼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1장부터 12장까지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대로 영생을 주러 오셨다는 것을 말하고, 13장부터 20장18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영생을 주셨는가를 말하며, 20장19절부터 끝까지는 영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합니다.

요한복음이 생명에 대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증거하기 때문에 우선 우리가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대략적으로 파악하고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늘 말씀을 드렸듯이 성경은 생명을 언약적인 관점에서 말하고 있지, 존재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요한복음에서 말씀하는 생명은 쉽게 말해서 ‘함께 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1장1절부터 ‘함께 함’에 대하여 말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비유로 자주 말씀을 드렸는데 부부가 살았다 하는 생명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한 집에 살지 않아도, 한 상에서 먹고 마시지 않았어도, 그저 각자의 육체적인 호흡이 부부간에 끊어지지 않으면 살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부부가 ‘함께 함’이 곧 생명입니다. 물론 부부는 한 집에서 사랑함으로 영원히 함께 하자고 결혼식에서 맹세한 것처럼, 사랑의 언약으로 부부가 함께 사는 것이 곧 부부의 생명인 것입니다. 

이처럼 부부의 함께 함이 곧 하나됨이며 부부가 갖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부부는 아주 사소한 일까지라도 서로 공유하고 비밀이 없는 관계로 삽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생명으로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부를 가리켜 일심동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요한복음이 말씀하는 생명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본 후에 오늘 본문을 접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19-28절까지 세례 요한이 자기에 대하여 증언하고, 29-34절까지는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어린 양에 대해 증언하며, 40-49절까지는 처음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한 후, 50-51절에 예수님이 자신에 대하여 증거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렇게 요한복음은 예수님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증언하였는지를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들어가려면 본문 전 문맥에서 무엇을 말했는가를 살피는 것이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요한복음의 서론이라고 하는 1장1-18절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이 곧 생명이신데,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고,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까 아버지 품 속에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심이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가운데 육신으로 보이게 나타나셨다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대할 때 우리는 ‘보다’라는 말을 매우 중시해야 합니다. ‘함께 계심’과 ‘보다’는 요한복음에서 여러 번 나오며 매우 강조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새출애굽의 구원을 이루시는 다윗의 자손을 ‘모든 육체가 다 보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40:5절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럼 19-28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기서 세례 요한은 자기에 대하여 증언하는데, 그 증언의 내용은 요한의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세례 요한에게 ‘네가 누구냐?’고 물은 것과, 요한이 대답하여 그리스도가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 처음 부분에 나옵니다. 

그런데 이는 마가복음에서 주님께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더러는 세례 요한이라 하고, 엘리야라고도 하고,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도 한다고 제자들이 답했던 부분과 비슷합니다. 그때 주님은 그리스도로써 자기의 할 일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이와 같이 세례 요한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것처럼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자기의 하는 일에 대하여 증거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요한은 주의 길을 곧게 합니까? 내 뒤에 오시는 분, 즉 내가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기 어려운 분을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는 일입니다.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신데 그 분의 앞에 온 전령으로 그의 길을 평탄케 하려는 일이 세례 요한이 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은 마치 시내산에 여호와가 강림하시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옷을 빨고 삼일 동안 기다림으로 준비한 일과 같습니다.

이러한 세례 요한의 자기의 일을 따라서 이제 29절 이하에 예수님을 증거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이 증언은 다음 날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한 말과 같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1:15절에 예수님을 ‘자기 보다 앞서 계신 분’으로 증언했습니다.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그래서 자기가 물로 세례를 줌을 통하여 이 분을 이스라엘에게 나타내 보이려 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거는 성령세례를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1:32-34절입니다.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그럼 세례 요한은 어떻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할 수가 있었습니까? 세례 요한은 그가 누구이신지 원래 알 수 없었지만 성령이 그의 위에 내려서 머무르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성령이 내려서 그의 위에 머무는 것을 보고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분이신 줄 알았고, 그가 하나님 아들이심을 증언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에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는 말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며, 다른 하나는 ‘성령 세례를 베푸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럼 이 두 가지 증언에 대하여 하나씩 살펴 보겠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증언은 어떤 뜻이 있습니까? 이 증언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유월절 어린 양을 잡았던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그 유월절 양은 ‘세상’ 죄를 지고 가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바로 왕을 섬긴 죄를 지고 간 어린 양이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오는 유월절에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 양의 고기를 먹었습니다. 이 유월절에 무교병을 먹어야 했습니다. 평소에 먹었던 것과 다른 누룩이 없는 떡을 먹음으로 이제 이스라엘은 바로에게 속하지 않고 여호와께 속한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므로 유월절은 애굽 나라 백성으로부터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새로이 출생하는 날이었습니다. 

그 후 유월절에 나와서 홍해를 건넘으로 이제 완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홍해의 바닷물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옴으로 그들은 물을 통과함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 다음 시내산에 이르러 여호와의 강림하심을 보았고 율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종된 백성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서 그 나라를 봉사하며 모세의 명령을 따라 살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유월절 어린 양을 통하여 홍해의 세례를 받음으로 여호와의 종된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교회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을 통하여 성령 세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것입니다.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처럼 이제 땅에서 나지 않고 위로부터 난 새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살며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써 하늘 나라를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근데 여기서 우리가 요한 복음이 말씀하는 성령세례에 관한 특징을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제까지 보았던 공관복음서의 성령세례를 말하는 부분과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32절과 33절에서 말합니다.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와 ‘머무는 것을 보거든’입니다. 이러한 표현이 바로 요한복음이 가진 성령세례에 관한 특징입니다. 이를 따라서 요한복음이 말하는 성령세례는 한 마디로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성령은 ‘머무는 영’입니다.

마태복음의 영은 무엇이었습니까? 열매를 맺게 하는 영입니다. 누가복음의 영은 무엇이었습니까? 긍휼과 구제의 영입니다.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는 희년의 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의 영은 어떤 영입니까? ‘머무는 영’입니다.

‘머물다’라는 단어는 다른 단어로 바꾸어 쓸 수 있습니다. 오늘 설교의 처음에 생명에 대하여 말씀을 드릴 때 ‘함께 함’이라고 했던 그 말과 바꿀 수 있습니다. ‘떠나지 않고 함께 계심’도 머문다는 말과 바꾸어 쓸 수 있습니다.

사실 성령세례에 관하여 우리가 들을 때에는 기이한 현상이나 체험은 많이 들었어도 ‘머물다’라는 의미로서는 많이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머무는 영’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구약에 임하였던 영을 생각해 보면 더욱 잘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주보 설교개요란에 참고구절로 올려 드린 민수기서를 보십시다. 

민수기 11:24-25절입니다. “모세가 나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에게 알리고 백성의 장로 칠십 인을 모아 장막에 둘러 세우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영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영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하지 아니하였더라.” 

구약의 이스라엘 장로 70인에게 임한 영은 어떤 영이었습니까? 모세에게 임한 영이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머문 영은 아니었습니다. 잠깐 머물다가 떠나간 영이었습니다. 영이 내릴 때에는 예언을 하다가 영이 떠나가면 다시는 예언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비교해 보면 요한복음에서 말한 ‘머물다’는 표현은 그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셨기 때문에 이제 영이 항상 머무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성령세례입니다. 한 번 오시면 다시는 떠나가지 않는 영입니다. 

그럼 어떻게 영이 머무는가? 아니 영이 머물러서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이에 대하여 35-51절까지 말한다고 보면 좋겠고, 아울러 요한복음 전체도 바로 이렇게 머무는 영으로 말미암아 함께 하는 생명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말한다고 보면 좋겠습니다. 즉 머문 영으로 함께 하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서론적으로 35-51절이 말한다고 보면 좋다는 뜻입니다.

35절 이하에는 처음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한 내용들이 나옵니다. 먼저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에게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이 증언을 듣고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이 따르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이 물었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두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사실 대답이 아니라 또 물은 셈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께서 “와 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럴 때 이 ‘와 보라’는 말씀은 요즘처럼 전도구문으로 쓰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냥 성도들은 단순히 안 믿는 이방인들에게 ‘와 보라’고만 해서 어떡하든지 교회로 데리고 오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디로 따라가야 하는가를 이 두 사람이 물었을 때 주님은 ‘와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서 주님이 계신 데를 보고 함께 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와 보라’는 말은 그 뒤에 이어진 말처럼 ‘가서 계신 데를 보고 함께 거함’이란 말과 일치합니다. 그저 한 번 교회에 출석만 해달라는 말과 전혀 다른 뜻입니다. 그런 후에 두 사람 중 하나인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가서 증거했습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처음 제자들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한 증언입니다. 빌립은 예수께서 갈릴리로 가려 하시다가 만나 ‘나를 따르라’고 하시니 따랐던 제자입니다. 빌립은 또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나다나엘을 찾아서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했습니다. 

45절입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이 빌립의 증언에 대하여 나다나엘은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이렇게 대답하니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다시 말했습니다. “와서 보라.”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은 것은 아마도 나다나엘이 성경을 열심히 읽으며 이스라엘의 임금을 사모하여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이 읽었던 성경은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난다는 말씀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었으면서도 나다나엘은 빌립의 증언을 따라서 예수님을 찾아 갔습니다.

근데 예수님이 나다나엘이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이 말씀은 나다나엘의 성경의 언약을 따라 메시야를 기다렸고, 그 언약을 진실함으로 바라고 기다렸기 때문에 하신 것일 겁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하며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서 나다나엘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고 대답합니다. 

이 부분을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먼저 보았다고 한 말씀에 대하여 왜 나다나엘이 금방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또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고백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점장이처럼 과거의 사실을 밝히 들여다 보거나 미래의 어떤 일을 미리 점을 쳐 주니까, 나다나엘이 이렇게 고백한 것일까요? 

이러한 내용은 창세기의 야곱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하면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 가운데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한 것은 야곱을 연상케 합니다. 야곱이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 것을 알고 에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 27:36절입니다. “에서가 이르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하지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야곱은 잔 꾀로 속이는 자였습니다. 

또 본문 51절의 말씀도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하여 하란으로 향하여 가다가 벧엘에서 돌베개를 하고 자다가 꿈을 꾼 때에 나타난 일과 거의 같습니다. 창 28:12절입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이 꿈을 꾸고 일어나 야곱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 28:16-17절입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야곱은 꿈을 꾸기 전에는 이 곳이 여호와와 함께 계신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인 줄 알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이 곳이 하나님의 집이며 사닥다리가 하늘에 닿아 있는 하늘의 문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나다나엘은 자신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을 때 주님이 함께 계셨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야곱의 집을 새롭게 완성하시는 분으로 오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분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의 고백 후에 주님은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50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바라고 기다렸던 이스라엘의 임금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리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되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더 큰 일은 무엇일까요? 51절 말씀입니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좀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야곱에게 벧엘에서 나타나신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과 거의 같습니다. 야곱은 그 곳이 하나님의 집인 것을 꿈을 깨고 나서 알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주님이 말씀하신 더 큰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가 이제 더 큰 하나님의 집을 세우러 오신 분이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나다나엘이 본 주님과 함께 하는 집이 아니라, 요한복음 14장에 말씀하시듯이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셔서 거처를 예비하시는 그 집은 더 큰 집입니다. 

그 집은 어떻게 지으셨습니까? 그의 부활하신 몸으로 옛 성전을 헐고 새 성전을 지으셨습니다. 제자들이 증거했던 것처럼 예수님은 메시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임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증거를 통하여 더 큰 일을 하시며 더 큰 집을 지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보혜사 성령이 함께 하는 성전을 지으실 것입니다. 

이 주님께서 지으시는 성전 곧 하나님의 집은 비록 주님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시지만 보혜사 성령을 보내셔서 자기 사람들과 언제나 함께 하실 것입니다. 제자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시지 않고 늘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 집은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 집은 어떤 집입니까? 요한복음 2장 이후에 이를 말씀하십니다. 새로운 포도주의 기쁨이 있는 혼인잔치의 집입니다. 이 집을 주님은 자기 몸으로 지으십니다. 이 성전에는 니고데모와 같은 자가 아닌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 참여합니다. 이 집에는 사마리아 여인과 그 동네 사람들이 들어오며 다시는 물을 길러 야곱의 우물로 올 필요가 없는 영원한 생명수로 함께 하십니다. 이 집에는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가 안식일에 나음을 입었던 것처럼 새 안식의 주인이 함께 하십니다. 이 집에는 모세로 말미암아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로 함께 하는 생명이 아니라,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으로 먹는 나라입니다. 그렇기에 이 구원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을 상속하여 세웠던 그 나라와는 다릅니다. 요한복음 7장의 초막절의 명절은 이제 실로암의 물을 길어다가 성전제단에 붓는 옛 구원이 아니라, 생수가 강같이 그 배에서 흘러나는 영원한 생명수, 곧 성령이 함께 하는 구원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1-12장까지 7개의 표적을 보였습니다. 그 일을 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죽은 나사로를 살렸음에도 유대인들은 도리어 예수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이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주님께서는 더 큰 표적을 보이셨습니다. 요한복음 13:1절이 이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더 큰 표적은 더 큰 일입니다. 그 일은 바로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한 표적입니다. 자기 목숨을 제자들을 위하여 유월절 어린 양으로 주심입니다. 

여기서 ‘끝까지’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머물다’란 말입니다. 요한복음의 성령세례는 머문 영이 함께 합니다. 어떻게 함께 하는 것입니까? 표적이 아니라 ‘끝까지 사랑함’으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심은 곧 제자들과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제자들에게 근심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주님이 육신으로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거하심으로 함께 했던 것보다 더 유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거하며 영원히 머물 것입니다.

주님을 미워한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할 것입니다. 주님을 죽인 세상이 제자들을 핍박할 것입니다. 이런 모든 환난 속에서도 성령은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교회를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환난 속에서 넉넉히 이기게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쉽게 말해서 ‘끝까지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까? 성령이 머물러 계시는 주님은 이를 제자들과 함께 하신 언약식사에서 나타내셨습니다. 최후의 만찬에 함께 앉은 제자들은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예수를 팔고, 예수를 부인하며 도망칠 자들이었습니다. 그것을 아시면서도 그들을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끝까지 사랑합니다. 자식이 부족하고 심지어 부모를 속일지라도 부모는 끝까지 사랑합니다. 부모는 자식에게서 자신을 떼어 낼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주의 성령이 우리와 함께 거하셔서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우리를 주님의 몸된 성전에 함께 하는 지체로 만드셨습니다.

이 일은 주님의 부활하심으로 이루셨습니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셔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자기 몸을 보이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본 제자들은 주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어떤 다른 사람보다 더 사랑함을 고백했습니다. 그것이 베드로의 고백이었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고백입니다. 그렇기에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서도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나이 많아 늙기까지 주님의 사람으로 함께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요한복음의 성령세례를 받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찌 형제의 작은 잘못 때문에 그 형제와 나 사이에 휘장을 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찌 내게 미친 손해 때문에 형제와 나 사이를 갈라 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성령이 거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부인과 배역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함께 하는 처소를 지으시기 위하여 그들을 사랑하셔서 그 집으로 인도하신 주님의 백성이 될 수가 없습니다.

형제를 용납하고 용서하며 끝까지 사랑하는 자들이 바로 ‘머문 영’이 함께 하는 성령세례를 받은 주님의 자녀들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작은 일로, 보잘 것 없는 사소한 일로 마음을 닫거나 형제에게서 자기 자신을 돌리지 마십시오. 그러한 잘못과 부족이 드러날 때 도리어 끝까지 사랑함으로 ‘머문 영’d로 함께 하는 성령세례를 받은 주님의 사람으로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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