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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긍휼을 베푸는 자의 축복 (마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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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을 베푸는 자의 축복 (마 5:7)


인간의 삶에서 대개 네 가지의 생활 태도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첫째 종류의 사람은 받기만 하고 주저 않는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생활 태도입니다. 
둘째로는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으며 나만 아는 개인주의적인 태도입니다. 
셋째로는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생활 태도로서 이는 지극히 합리적이요 서로 도와주면서 사는 건전한 생활 원리입니다. 
끝으로 보다 차원이 다른 인생관이 있습니다. 이것은 받을 생각을 떠나서 될수록 주고 싶어하며 주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생활 태도입니다. 이는 이기주의에 상반되는 이타주의로서 위대한 사람일 수록 이것은 생활 태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덕을 끼치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의 산상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천국을 소유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온유한 삶은 땅을 차지하는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배고프고 애통하며 온유한 마음으로 지내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넘치게 되면 이제는 우리가 우리의 이웃에 대해서 긍휼과 자비를 베풀 차례가 된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수수의 원리'란 것이 있습니다. 주면 받게 되고 또 더 많이 주면 많이 받게 되는'기브 앤드 리시브'(Give and receive)라고 하는 생활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말씀은 긍휼을 베푸는 자에게 축복이 따르는데 긍휼을 받을 것이라는 축복의 말씀인 것입니다. 마치 우리의 빈 그릇에 기름이 가득히 차고 넘치면서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까지 자비를 끼치는 긍휼의 마음을 가르친 줄 압니다.

우리 기독교는 긍휼의 종교입니다.
사랑의 종교입니다.
용서의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임이라고 주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긍휼이 여기는 자의 축복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겠습니까?

첫째로, 긍휼을 베푸는 신앙의 동기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에게는 양심적인 마음의 동기에서 긍휼을 베풀고자 하는 경우도 있지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그 크신 자비와 사랑을 받으면서 나아가 사랑을 베풀고 남을 긍휼이 여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요, 심판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한편 우리를 사랑하시고 긍휼이 여기시는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구약성서에서 '자비하다'는 뜻인 '케세드'(Chesedh)라고 하는 말이 150번이나 쓰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애굽 땅에서 돌아올 때에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힘입었습니다. 야곱이 벧엘 광야에서 돌 베개를 베고 잘 때에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하고 "여기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내가 몰랐구나"라고 외쳤습니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 갔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체험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가게 될 때에 그 사막 지대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가운데 물을 마시고 만나를 먹었습니다. 옷이 해어지지 아니했습니다. 한나가 아기가 없어서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긍휼과 자비로 아들 사무엘을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 103편 17절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절망과 좌절 가운데 있는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통한 용서와 구원을 주시려 사랑의 화신으로, 긍휼과 자비의 화신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사"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은혜요 긍휼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을 입은 자는 긍휼을 베풀어야 축복을 받는다고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 하신 성품, 자비하신 인격, 사랑이 넘쳐흐르는 생활을 본받아 너희도 가서 이 자비와 긍휼을 베풀 때에 너 또한 자비와 긍휼의 축복을 받게 된다는 산상수훈의 말씀입니다.

유명한 섹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 소설을 통해서 섹스피어는 자비와 긍휼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는 사실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긍휼의 성질은 강요되지 않는 것이니 그것은 하늘의 단비처럼 내린다. 이 지상의 그것은 두배의 축복을 내린다. 그것을 베푼 사람에게나 받는 사람에게나 축복이 된다. 긍휼은 이 세상 임금의 지위보다도 더 위에 있고 그것은 왕의 가슴속에 군림한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속성이고 그리고 지상의 권력은 하나님을 가장답게 되리라." 긍휼 함과 정의가 조화가 될 때에 바른 질서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작가의 주장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는 사람들입니다. 그 성격을 본받기 때문에 그 생활을 따르는 우리는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신앙적인 근거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세상은 자비를 잃습니다.

둘째로, 긍휼을 베푸는 생활이 참된 크리스천의 생활입니다.
크리스천의 긍휼은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긍휼이 여기사 구원해 주신 까닭에 나는 이 긍휼을 베풀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수해가 났을 때에 5천만원, 1억원의 의연금을 내고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얼굴이 비치는 그런 자비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나의 생활 속에서 나의 이웃에게 가장 개인적으로 가장 구체적으로 사랑을 베풀고 긍휼을 베푸는 것인 크리스천의 긍휼이요, 자비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얻어맞고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때 종교인이요,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레위인 이나 제사장은 죽어 가는 사람의 신음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대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죽어 가는 사람을 만져 부정하게 되면 종교의식을 행할 수 없다는 종교적인 형식과 양식 때문에 긍휼을 베풀지 못하고 지나친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업신여기는 사마리아인은 가던 길을 멈추고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 상처에다 포도주와 기름을 발라 주고 그 사람을 자기의 나귀에 태워 주막집으로 데리고 가서 두 데나리온을 내어놓으며 부탁했습니다. "이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내가 어디 가는 길이니 부비가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드리겠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너희도 이같이 자비를 베풀어라"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어느 날 주한 미 대사관의 부 대사가 찾아와서 "지금 내가 귀국하는 길인데 입양할 고아가 있으면 나에게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 아이를 데리고 미국까지 가겠습니다"라고 특별한 요청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부 대사가 여비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기왕 공무로 미국에 가는 길에 입양하는 아이를 안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고아 입양 사업은 뜻이 있는 고귀한 일이니 기저귀를 갈아주고 우유를 먹여 가며 아이를 데리고 가는 일에 참여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 받을 삶의 태도입니다.

지금은 필리핀에 가서 선교 사업을 하고 있는 마린 베이커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우리 나라에서 오랫동안 선교사 일을 했었습니다. 이 사람이 대전에 있을 때에 아기를 낳았는데 선천적인 심장병 때문에 18개월 동안 고생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때 죽은 아기를 선교사 묘지에 묻은 다음 베이커 선교사는 먼저 고아원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가장 못나고 몸의 이곳 저곳에서 진물이 나는 보잘 것없는 고아를 부둥켜안고 "나는 내  아이 대신 이 아이를 양자로 삼겠오"하며 데리고 가서 그 병 투성이 진물 투성이의 가장 못난 아이를 잘 길러서 지금은 미국에 유학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 후 또 하나의 아이가 죽었습니다. 그때에도 그는 고아원의 불쌍한 아이를 입양하여 잘 길러서 지금 필리핀 대학을 보냈습니다. 베이커 선교사는 그 아이들을 장차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 받을 사람의 삶의 태도입니다.

여러분 특별히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우리는 많은 문화적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고 누구보다도 많이 배웠습니다. 그러한 우리는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고 구원을 베풀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제1차 대전과 2차 대전이 일어났을 때에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 출신들과 캠브리지 대학 출신들이 제일 먼저 전선에 뛰어들었고 또 제일 많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더 많이 나누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불란서 말에 '노블레스 오불레지'(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귀한 사람은 의무를 더 감당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많이 배운 사람은 많이 배운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돈이 많은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권력이 있는 사람은 권력 없이 시달리는  사람을 돌보아 주는 것이 '노불레서 오불레지'라는 말이 가지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미움과 증오가 없는 바른 질서의 사회는 우리들이 먼저 사랑을 베풀 때에 이루어집니다.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근처 아파트 지역에서 일어난 이야기들입니다. 한번은 어떤 운전사가 미처 손님 한 분을 내려 주지 못하고 아파트 정류장을 지나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곳에서 내리려던 신사가 그 운전사에게 어떻게 욕을 하며  곤욕을 주는지 운전사는 그를 내려 주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이 지역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 알아줘야 됩니다. 알아줘야 됩니다" 하더랍니다.

아파트 근처에서 물건을 배달하는 청년은 맥주병 하나를 고층까지 올려다 줍니다. 수박 한 덩어리를 날라다 줍니다. 그리고서도 바른 대접을  못 받으니까 아파트 문을 툭 차면서 하는 말이 "잘 먹고 잘  사시오"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1848년 칼 마르크스(Karl H. Marx)가 공산당 선언을 했을 때에 독일의 비스마르크(O.Mismarck)는 이 빈부의 격차를 없애기 위해서 평등 정책을 썼기 때문에 공산당이 들어오지 못했습니다만 이것도 모르고 정신 차리지 못했던 제정 러시아는 1917년 공산당 혁명이 일어나 공산당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성경 찬송을 끼고 있는 우리가 먼저 사랑과 긍휼을 베풀 때에 무질서와 부패로 얼룩진 사회가 없어지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저 한강을 찾아가 미꾸라지를 풀어 주고 자라나 살려  보내는 것이 자비가 아닙니다. 추상적인 이야기는 마십시다. 우리는 우리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사랑을 베푸는 복된 삶을 사십시다.

빅토리아(Victoria)여왕이 나이팅게일(F. Nightingale)에게 준 기념 훈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긍휼을 행하는 길은 하나뿐이 아니다. 말로도 할 수 있고 돈으로도 할 수 있다. 돈도 없고 말로 할 수 없거든 눈물로 할 수도 있다."

오늘 우리가 먼저 긍휼을 베푸는 자가 되십시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하나님의 긍휼의 복을 더하십니다.

끝으로, 긍휼을 베푸는 이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따릅니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선을 심으면 선을 거두고 악을 심으면 악을 거둡니다. 긍휼을 심는 자는 긍휼을 거둡니다. 게으름을 심는 자는 실패를 거둘 수밖에 없습니다.

'동작과 그 반작용'(action and reaction)의 원리가 있습니다. 이 초인종을 조금 치명적 조그맣게 울립니다. 강하게 치면 큰 소리가 납니다. 치지 아니하면 소리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동작'(action)이 없기 때문에 '반동'(reaction)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에 하나님의 반작용이 은혜가 더해집니다.

잠언 19장 17절에 보면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린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베푼 것도 결코 그 상급을 잃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1절,2절을 보면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임이요. 너희의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많은 혜택을 받았습니다. 긍휼을 입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긍휼과 자비를 베풀 차례입니다.

17세기 초반에 탐심에 눈이 어두워진 많은 백인들이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금 덩어리를 찾고 다이아몬드를 캤습니다. 나중에는 그곳에 사는 흑인들을 빼내어 노예로 팔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흑인들이 노예 무역에 의해 짐승처럼 팔려 갔습니다. 그 노예 무역을 했던 사람 중 하나가 회개하고 큰 은혜를 받은 후 지은 찬송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 와"(찬송가 253장 "Amazing  Grace"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은 흑인을 결코 짐승 같은 노예로 생각지 아니했습니다. 그들도 역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리빙스톤은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고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슈바이처(A. Schweitzer)는 그들의 더러운 고름 주머니를 어루만졌습니다.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은 그들을 해방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를 베풀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가는 구체적인 긍휼을 베푸는 태도입니다. 자비를 베푼 자가 복을 받습니다. 

황해도 운율에 이 찬영 장로님이 계셨는데 이 분은 큰 부자로 일년 농사를 지으면 특별히 마련한 십일조 창고에 가득 넣어 두고 교회 살림을  하며 또 학교를 설립하는 등 좋은 일을 많이 하신 분입니다. 집안에 잔칫날이 오면 먼저 큰 잔치를 베푸는데 그 잔치는 황해도  거지를 다 초청하여 여는 잔치였다고 합니다. 황해도 뿐 아니라 평안도, 함경도 거지들까지 몰려와 잔치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가난한  장사의 물건값을 절대로 깍지 말라고 자녀들에게 항상 당부할 만큼 선한 분이었습니다.

그곳에 공산당이 들어오면서 토지개혁을 시작했습니다. 이 장로님의 과수원도 토지개혁으로 공산당에게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로님은 내일이면 과수원이 공산당에게 넘어가는 그 전날에도 하루종일 과수원에 나가 김을 매고 거름을 주며 수고를 했습니다. 그때 지나가던 사람이 "내일이면 남의 과수원이 될텐데 무엇 하러 그렇게 수고하십니까?"하고 물으니까 이 찬영 장로님은 "누구인들 이 과실들을 먹을게 아니오, 나는 오늘 이 과수들을 가꾸어야 합니다"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6.25동란이 터졌습니다. 다 빼앗기고 이 장로님이 오고 갈 데도 없어졌을 때 그에게 긍휼을 입은 거지들이 모여 와서 이 장로님을 도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 그분의 손녀 되시는 이해성 집사님이 광림 교회에 다니는데 이 집사님이 남편 되시는 분이 지난번 일본의 뉴 제팬 호텔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때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이 기적도 부모가 뿌린 선한 씨앗의 결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긍휼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내가 있는 처소에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를 베푸십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긍휼을 베푸는 종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속해 주셨으니 내 주변의 적은 일로부터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풀고 긍휼을 베풀 때에 우리 사회에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시고 그리스도의 긍휼을 베푸는 가운데 긍휼이 여김을 받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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