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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6.25] 구원하시는 하나님 (습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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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하시는 하나님 (습 3:17)


1. 스바냐 3:17을 듣고 있으면, 사랑의 세레나데가 생각난다.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로 들린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깊고 깊은 사랑을 만난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서 처음부터 이런 사랑의 노래를 들려주신 것이 아니다. 스바냐의 처음 예언의 노래는 정말 무섭고 두렵다. 스바냐 1장은 곧 다가올 여호와의 날을 말씀하신다. 1장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은 “진멸한다. 멸절한다. 벌한다.” 이런 단어들이다. 그 외에도 그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는 말들로는 “슬픔, 울음, 패망, 끊어짐, 황폐, 환난, 고통.....”
  
한 마디로 말하면, 정말 무섭고 가슴 떨리는 말들이다. 무시무시한 말들이다.


2. 하나님은 누구에게 이 진노를 쏟아 붓는다고 했는가? 우리 생각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 물론 스바냐는 이스라엘의 이웃 나라들(이방나라)에 대한 벌을 선포하고 있다. 2장에 보면, 가사, 아스글론, 블레셋, 가나안, 모압과 암몬 등 수많은 이방 나라가 언급되고 있다. 하나님은 그 나라들에게 진노를 쏟아 붓겠다고 하신다. 그러나 그것뿐인가? 성경을 보라.

(1:2~6)을 보라. 땅위에 모든 것(모든 피조물), 사람, 짐슴, 공중의 새, 바다의 고기, 제사장 들, 우상 숭배하는 자들,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
(1:12)을 보라. 마음속으로 하나님은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즉 하나님은 아무런 일도 행하시지 않는 분이다. 하나님을 마치 죽어계신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등불을 가지고 찾아서 벌하실 것이라고 했다.)
(3:1~2)을 보라.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예루살렘)

하나님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나라만 멸망시키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영광으로 가득했던 예루살렘에도 진노를 쏟아 부으시고,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말하는 유대와 예루살렘에도 그 진노하시는 여호와의 날이 임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3. 왜 하나님은 이렇게 진노할 수밖에 없었는가? 

가장 큰 이유는, 유다에 가득했던 우상숭배 때문이었다. 스바냐 선지가 활동했던 때는 요시야의 때였다고 성경은 말한다. 요시야는 우상을 배격하는 등 유다의 종교개혁을 단행했던 때였다. 그러면 이런 일들이 없거나 언급되지 않아야 하는 일 아닌가?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요시야의 아버지는 아몬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므낫세였다. 이 므낫세는 유다에 온갖 우상을 들여놓은 사람으로 유명했다. 북이스라엘을 우상의 나라로 만든 사람이 아합왕이었다고 한다면, 유다는 므낫세 시대에 가장 우상숭배가 심했다. 

그 시대는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숭배뿐만 아니라, 자식을 불로 태워 죽이는 제사방법인 밀곰(말감)까지 들어와 있었다. 성경에는 ‘그마림’이란 이름도 언급되는데(1:4) 

이것은 이방종교의 제사장이이다. 아예 이제는 이방 종교가 들어와 합법화되었고, 제사장까지 있는 그런 형편이 되어 버렸다. 므낫세와 아몬의 시대는 그렇게 타락했다. 요시야의 그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종교적 유산을 물려받았다. 요시야가 왕에 오른 때는 고작 8살이었다. 그는 너무 어려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요시야가 본격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하기 전, 스바냐가 가슴을 치며 애통했던 시기는 이렇게 온 나라가 우상으로 가득했다. 

둘째, 하나님이 진노하여 여호와의 날이 이를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을 믿는 유다 백성들조차 하나님을 바르게, 제대로 섬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호와를 찾지도, 구하지도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일도 하실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은 복도 화도 내릴 수 없는 분이라고 했다. 복과 화는 오직 우리의 손에, 우리의 노력 여하에, 우리의 운명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불신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다. 


4. 다시는 6. 25와 같은 전쟁, 그 참상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6. 25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아픔과 상처, 고통을 가져다 준 전쟁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돌이키게 한 하나님의 채찍이었는지 모른다. 우리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의 바램은 한결같다. 다시는 이런 전쟁의 참극이 이 땅에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이 땅의 안위를 위해서 염려한다. 

손양원 목사님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3개월 쯤에 뒤에 한국전쟁에 대한 한국인 최초의 신학적 해석을 내린 분이다. 그 분은 1950년 9월 13일 수요일예배설교를 준비하셨다. 그 분은 6. 25 한국전쟁이 하나님의 징벌(신벌)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그 날 준비한 설교는 하지 못하셨다. 왜냐하면 그 날 손양원 목사님은 공산당에게 검속되어 잡혀가셨기 때문이다. 그 미완의 설교에서 보면, 한국전쟁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첫째, 국가 지도자의 죄. 둘째, 민족 지도자들의 죄. 셋째, 미군정의 잘못된 정책, 넷째, 기독교의 죄악. 기독교의 죄악으로는 기도의 부족, 우상숭배, 의인을 몰아낸 일, 목사들의 변절, 성도들의 타락, 노회와 총회의 분열, 좌우의 이념의 논쟁 등....

그 시대와 이 시대가 얼마나 다른가?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가?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손양원 목사님의 논리대로라면, 이 땅에 다시 6. 25와 같은 하나님의 징벌이 없을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 땅이 그런 죄악 가운데 놓여 있다면, 하나님의 채찍이 다시 몰아칠지도 모른다.   

1)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너무나도 강팍하다. 지금의 이 현실이 얼마나 심각한지 사람들은 별로 놀라지도 않는 것 같다. ‘전쟁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누가 그렇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북한이 핵무기를 어떻게 쓸지 아무도 모른다. 성경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리들에게 그 대책 없는 편안함을 경고한다.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의 죄악과 그에 따른 심판의 위험을 예언했지만, 다수의 백성들은 거짓 선지자들의 번영 신학에 사로잡혀 심판의 심각성을 올바로 직시하지 못했다. 마침내 심판의 참혹한 결과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생활이라는 처절한 실패와 절망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어떤가? “괜찮을 거야? 별일 없을 거야? 설마 무슨 일이 일어날라고?”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거짓 종교지도자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대가를 치뤄야만 했다. 

2) 어떤 사람들은 우리들이 북한보다 훨씬 잘 살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부하기 때문에, 군사력이 우위에 있기 때문에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부유함이 결코 우리를 이 진노로부터 건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1:18)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우리가 가진 금과 은, 그 재물의 풍부함, 경제력이 결코 여호와의 진노의 날과 같은 전쟁을 원천적으로 막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3)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정말 무엇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인가? 

(2: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3:7) “내가 이르기를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리기로 정하기는 하였지만 너의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스바냐에서 하나님은 심판 가운데에서도 신실한 백성들을 남겨두며, 그들이 구원의 회복에 참여할 것을 약속하신다. 여기서 스바냐가 정의하고 있는 남은 자들은 자신의 죄를 올바로 직시하고, 언제나 겸손한 마음으로 여호와만을 신뢰하며 의탁하는 자들을 말한다. 

ex) 이사야-여호와 앞에서 입술의 부정을 깨달은 후에 자신의 죄악을 한탄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해하는 이사야를 하나님의 매신저로 부르신다. 
  
모세 -그가 자신만만해할 때는 그를 사용하시지 않고,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절망하던 노년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부르신다. 
  
예레미야-자신을 어린아이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기에 부족하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열방을 위한 메신저로 파송하신다. 
이와 같이 자신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절감하기에 오로지 여호와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들이야말로 신실한 남은 자들이다.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우리에게 구원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에게 이 땅에 평화와 안전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다. 
구원은 정치인에게, 강대국에게, 어떤 부요함에, 어떤 제도에, 어떤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늘 하나님은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다.
“너희들이 나의 구원을 맛보기를 원하느냐?” 
“너희들이 이 땅 가운데 전쟁이 없는 평안을 맛보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이 땅과 너희의 심령속에 가득한 돈의 우상, 명예의 우상, 물질의 우상, 잘살고 편안해지려는 우상을 버려라. 
너희 마음속에서 하나님은 아무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아무 것도 하실 없다고 이미 체질화되어 버린 너의 마음을 깨뜨려라. 

모든 것이 인간의 손에 이루어지고, 인간에 의해 달려 있다고 믿는 인본주의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 분을 의지해라. 그 분의 기쁨이 되라. 그 분의 사랑을 노래하라. 그 구원을 찬양해라. 
이 땅에 다시 6. 25 전쟁과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여러분과 내가 바른 믿음의 모습으로 사는 것이다. 그것만이 유일한 길이다.
그렇게 믿고 살아간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 사람은 화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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